[북미
원주민 이야기3]
샤머니즘이란
무엇인가
검은호수 서정록
民俗學을 하는 임재해 교수에 의하면, 安東댐이 들어선 뒤 10년쯤 지나 댐 주변의 마을들을 답사한 결과 마을에 남아 있던 당나무들이 완전히 말라죽은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마을사람 몇이 남아 마을을 지키며 동제를 지내는 경우에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고 하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지역
주변의 마을은 예전보다 물이 더 풍부해졌으므로
나무가 번성해야 하는데 말라죽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情에 굶주려 죽은 것입니다.
情이란 무엇입니까? 靈魂의 交感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나무도 靈魂을 갖고 있고 사람들과 交感을 합니다. 늘 당나무 주변에 모여
살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情에 굶주린 당나무들이
결국 죽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현재 서양 사람들의 사고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에서는 나무의 靈魂을
認定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思考의 틀 속에서 그들은
物質과 精神을 나눕니다. 兩者는 물과 기름 같아서 섞일 수 없으며, 섞여서도 안 되지요. 그것이 西洋 사람들이 몸과 靈魂, 物質과 精神, 善과
惡을 바라보는 態度입니다. 이런 思考는 우리의 몸과 自然의 存在들을 神性치 못한 것으로, 人間의 精神에 견주어 低級한 것으로 여깁니다. 自然히
우리의 일상생활과 이 세상의 삶 또한 세속적인 것으로, 신성치 못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神性함은 오로지 人間의 精神과 靈魂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有限한 이 世上의 삶을 否定的으로 봅니다. 죽음을 惡으로 보는 視角도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오직 靈魂이 돌아갈 天國만이, 世俗을 벗어난 神的인 價値만이 最高의 善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思考는 必然的으로 인간 以外의 自然의 存在들을 道具的 對相으로,
單純한 物質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過去와 歷史 또한 否定的인 視覺으로 보게 합니다. 역사적 유물이란 영혼이 없는, 또는 영혼이 떠난
딱딱하게 굳은 골동품에 불과하니까요. 따라서 과거의 역사란 언제든 돌아가야 할 근원과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되기보다는 부정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됩니다.
그들의
발전, 진보적 사관은 바로 이런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의 직선적인 시간관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기지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발전이 없는 역사란 곧 정체요, 퇴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발전된 物質文明을 갖지 못한 社會를 야만인, 원시인으로 여겼습니다. 白人들이 인디언들을 그처럼 철저히 짓밟은
배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서구의 이원론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인디언과 제3세계의 주민들뿐이겠습니까! 어머니 대지 또한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얼마나 함부로 파헤쳐지고 파괴되었던가요!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인류의 생태적 위기, 전 지구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 西洋人들 역시 그들의 이런 二分法적 思考의 問題点을 認識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 代表的인
것이 生態主義的 思考입니다. 그 중에서도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는 환경문제를 기술 중심으로 접근해 오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人間과 環境을 分離해서 生覺할 수 없으며 이 世上의 모든 存在는 巨大한 生命의 그물망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을 認定하는 데까지 나아간, 가장 發達된 認識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심층생태주의가 전통적인 서구적 사고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다른 서구사상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의
에고(ego)로부터 출발하니까요. 그런데 나의 에고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 主觀, 내 觀點에서 行動합니다. 하지만 나의 주관대로, 즉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다른 존재들로부터 반발과 제재가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부득이 다른 존재 역시 '무언가(something)' 意志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타자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모든 게 이런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他者의 存在를
認定하긴 하되 그 方式이 매우 觀念的이고 消極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北美 인디언들은 그렇게 生覺하지 않습니다.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들이나 호주의 원주민들,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西洋 사람들의 思考方式을 이해할 수 없어합니다. 왜?
그들이 보기에는 동식물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심지어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神性하고
平等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보기에 이 世上에 存在하는 것들 가운데 生命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生命이 있다는 것은 곧 그
안에 主宰者인 靈魂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동식물은 물론 바위나 해와 달, 별, 심지어 산, 강, 바람, 구름, 비 또한 모두 靈魂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存在方式이 다를 뿐 우리 人間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西洋 사람들이 정신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없다고 여긴 몸과 물질에도 신성함(spirituality)이 있다고 봅니다. 물질에도 신성함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단순히 물질덩어리로 이루어진 대상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 다 영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여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하나도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소중하듯, 이 대지 위에 사는 다른 동식물과
바위 등도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내 새끼들이 귀하듯, 동물이나 벌레들의 새끼들도 귀하고, 다른 존재의 새끼들도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北美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공경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동식물은 물론 벌레조차 공경하도록 가르칩니다. 결코 벌레들을 징그러운 대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그들만의 임무와 역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의 몸과 자연의 존재들에 영적인 요소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일상 생활에는 신성함이 깃들게 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의 일상적 삶이 곧 그들의 종교요,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성
속에 깃든 신성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세속적인 것이라 하여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일상적 삶과 종교는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聖)과 속(俗)이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을 신성한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행위와 춤과 노래 또한 신성한 것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서양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를 부정시했습니다. 정신이 아닌 몸을 사용하는 행위는 세속적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종교적 의례나 축제 따위를
제외하면 평상시에는 춤추며 노는 것을 멀리했습니다.
西洋人들의 몸에 대한 이러한 觀念을 바꾼 사람이 바로 舞踊家 '이사도라
덩컨'입니다. 그녀는 몸으로도
靈魂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西洋 사람들에게 커다란 衝擊으로 다가왔고, 그녀 以後 現代舞踊은 몸으로 어떻게 靈魂의
노래를 表現할 것인가에 焦点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靈的인
요소를 중시합니다.
그러나 北美 인디언들은 물론,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춤과 노래야말로 神性한 것임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춤과 노래야말로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고 나누는 靈的인 行爲임을,
祈禱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天地萬物을 기쁘게 하고, 神들을 기쁘게 하며 서로
마음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또한 人間의 몸과 自然과 다른 存在들을 構成하는 物質에도 靈的인 料素가 있다는 것을
認定하게 되면 過去와 歷史를 보는 態度가 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이란 기본적으로 신성할
수밖에 없기-최악의 경우에조차-때문이지요. 自然히 우리의 祖上들이 겪은 과거의 경험과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겪는 경험에는 신성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새가 들려주는 노랫소리, 시냇물이 흐르던 모습, 태풍이 대지를 휩쓸며 정화하던 일, 봄이면 남풍이 불어오고 들판의 새싹들이 돋던 일들,
우리를 먹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던 동물들, 마른 대지에 내리던 단비, 가슴이 답답할 때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던 바람소리...,
그 모든 것이 영적이고 신성한 것이 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이 늘 自身을 낮추고 주위의
動植物들로부터, 그리고 自然現狀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서 삶이란, 그리고 과거의 삶이란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지혜와 신성함의 보고가 됩니다. 신성한 이야기가 되고 신화가 됩니다.
그래서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현재 못지않게 과거와 역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속에 미래와 지혜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요시 여깁니다. 자연히 옆과 아래를 바라보기보다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땅은 신성치 못한 곳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만물을 실어
기르는 대지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어머니란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지극한 것입니다. 나를 낳고 길러 주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지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대지는 한낱 물질덩어리에 불과하니까요.
북미 인디언들과 구대륙의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생태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存在의 靈을
認定하게 되면 當然히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사냥을 할 때
동물신령에게 먼저 許諾을 求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許諾없이 사냥하는 것은 다른 존재의 영혼을 해치고, 생명을 해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사냥을 한 뒤에는 반드시 感謝를 하고, 나에게 몸을 준 動物의 靈魂이 다시 再生, 還生하기를 빌어주는 것이 基本입니다.
작은 형제여, 너를 죽여서
미안하다
그러나 네 고기가 필요했단다
내 아이들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라며 울고 있거든
작은 형제여, 나를 容恕해 다오
너의 용기와 힘, 그리고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마
자, 이 나무 위에 너의 뿔을 매달아 줄게
그리고 붉은 리본으로 장식해 주마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너를 기억하고 너의 靈魂에 경의를 표하마
너를 죽여서 미안하다
작은 형제여, 나를 容恕해 다오
아마도 샤마니즘 하면
우리는 맨 먼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무당의 푸닥거리를 떠올리겠지요. 신을 모신다고는 하지만 다분히 기복적(祈福的)인 그들의 모습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가 들어오고, 계급과 신분과 착취와 축적의 요소가 들어온 뒤에 변질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샤마니즘은 구석기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종교적 정신의 근원입니다. 그 당시에는 국가도 없었고, 계급과 신분과 착취와
축적의 요소도 없었습니다.
북미
인디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저는 국가와 계급과 신분과 축적이 개입하기 전의 샤마니즘의 모습을 보려면 북미 인디언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착취와 기복이 없습니다. 나보다는 늘 내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먼저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도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지식과 편견과 물질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질 못하지요. 편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사람에 대한 태도가
그러할진대, 동식물이나 벌레나 바위 등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유로울 리 없겠지요. 그와 같은 편견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둘러싼 대상들을
찬찬히 살펴보세요.
산을 바라보세요.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세요. 하늘의 구름과 강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 앞에 서 보세요. 비를 맞아 보세요. 아침에 동녘에서 뜨는 해를 보세요. 그 바람을, 그 비를, 그 아침해를 그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 다른 나무와 동물과 풀의 숨결과 섞입니다. 그리고 산과 구름과 비와 강과 바위의 숨결과도
섞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숨결과도 섞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들이쉬고 내쉬는 바람에는 다른 존재들의 숨결이 들어와 있고, 나의
숨결은 다른 모든 존재들의 숨결에 갈마듭니다.
숨을
쉬는 그 自體만으로 이미 우리는 靈的인 存在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숨을 쉬는 이 몸을 한낱 物質덩어리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영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신성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숨을 쉬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숨을 쉬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과 關係를 맺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하나로 連結되어 있지요. 그것보다 더 영적인 것이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샤마니즘입니다.
서정록 / 고대 동북아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글쓴이는
저서로 『백제금동대향로-고대 동북아의 정신세계』(학고재)가 있고, 역서로는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나무심는사람)가
있습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3년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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