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북미 원주민 이야기 - 4 /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것은?

장백산-1 2013. 7. 8. 15:39

 

 

 

      북미 원주민 이야기-4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것

                           검은 호수 서정록

 

 

 

 

 

야스퍼스는 紀元前 5世期를 前後하여 유대교의 이사야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중국의 공자와

노자, 배화교의 졸아스트,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人類의 스승들이 出現하여 人類의 救援을 위한 宗敎를 創始한

時期를 人類의 추축시대(樞軸時代)라 말한 바 있습니다. 人類의 師標가 될 큰 가르침들이 出現한 時代라는 것입니다.

 

 

 


이 時期를 前後하여 조로아스터교(배화교), 佛敎, 基督敎, 儒敎와 같은 큰 宗敎가 태동되었으니, 그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創始한 宗敎를 高等宗敎라 하여 다른 宗敎와 區別해서 부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誤解가 있습니다.

만일 조로아스트나 이사야, 예수, 공자와 노자, 석가모니오 같은 인류의 스승들이 태어난 時代가 살기 좋은 때였다면,

平和로운 時代였다면,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은 새로운 宗敎를 일으켰을까를 生覺해 볼 때, 분명히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태어난 時代가 和平한 시대였다면, 그들은 그저 凡夫로 살았을 것입니다.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기에, 도탄에 빠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견디고 연마한 끝에 人類를 救援할 가르침을 創始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事實은 석가모니가 生老病死로 苦惱하는 住民들을 보면서 煩惱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出家했던 것이나,

예수가 로마의 支配 아래 도탄에 빠진 유대민족과 다른 민족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十字架에 매달린 것을 通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公子가 활동하던 시기는 제후들이 득세하여 전횡하던 春秋時代였습니다. 조로아스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라시아의 草原時代에서 家畜을 키우며 移動生活을 하던 아리안族이 中央아시아로 南下할 무렵, 中東의

사치스런 物質文化를 接하면서 混亂에 빠져들자 조로아스트는 그들의 삶을 일깨우기 위해 배화교를 창시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대민족이 페르시아의 支配하에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을 때, 民族의 장래를 걱정하며 장차 새로운 구세주가 나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의 旣成宗敎가 太動되던 時期를 살펴보면, 極度의 混亂期로 치닫던 시기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렸으며, 政治는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했습니다. 기성종교들은 당시, 이를 보다 못한 인류으 스승들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시한 종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 神話에는 人類가 상고(上古)의 黃金時代에서 銀의 時代, 靑銅時代(또는 영웅시대), 鐵의 時代로 내려오면서 점점 더 나빠졌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銀의 時代란 지금으로부터 대략 1萬年 前, 女性들에 의해 農業이 始作된 시기와 一致합니다. 女性들이 달을 숭배했기 때문에 달빛을 따라 은의 시대라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시기는 그 이전의 수렵과 채집의 시대에서 초기 농경시대로 넘어온 시기를 말합니다.

 


청동시대는 쟁기가 발명되면서 남성들이 농업생산에 뛰어든 시기로, 대체로 남성들이 생산을 담당하기 시작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힘센 남성들이 청동무기를 들고 다른 부족과 민족을 지배하는, 이른바 '영웅'시대이기도 합니다. 은의 시대가 이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한 평화의 시대였다면, 청동시대는 지배와 피지배가 갈리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여성보다 남성의 권위가 커지고, 힘이 법이 되고 권력이 되는 그런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철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른바 '國家'가 태동합니다. 이 때쯤 되면 지배와 피지배는 물론 계급과 신분이 나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립니다. 사람들의 삶이 극도로 고단해지기 시작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요.

 

 

야스퍼스가 人類의 樞軸時代라고 지칭한 時代는, 神話的으로는 바로 이 鐵의 時代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철의 시대는 근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추축시대에 인류의 스승들이 창시한 기성종교들은 바로 이 鐵의 시대를 貫通하는 社會體制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産業時代에 들어오면서 旣成宗敎들이 흔들리는 理由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黃金時代를 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바로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샤마니즘을 신봉하던 이들이 살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過去에 北美 인디언들이 살던 방식은, 그리고 세계의 많은 원주민들이 살던 방식은 아마도 생산수단으로 보면 가장 原始的인 形態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重要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수렵과 채집의 시대야말로 國家와 階級과 身分, 支配와 被支配,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蓄積과
搾取 등의 弊害가 아직 없던 시대라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농경이 시작된 뒤의 유골의 건강상태보다 그 以前인 수렵과 채집 시대의 유골들의 건강상태가 더 낫다는 고고학계의 보고입니다. 농업이 시작되면서 생산수단이 안정적으로 확보되기 시작했으므로 더 건강해져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들어오기 전의 인디언들의 건강상태가 더 나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이야길를 뒤집으면, 수렵과 채집 시대의 사람들은 수고롭게 작물을 재배하고 쌓아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만큼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생산노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을 자기수련과 내면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 수렵과 채집 시대의 宗敎가 바로 샤마니즘입니다. 거기에 견주어 야스퍼스가 인류의 樞軸時代라 칭한 紀元前 5世紀 前後의 時期는 農業이 活性化된 以後로 剩餘가 蓄積되면서 國家와 階級과 身分, 支配와 彼支配,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착취와 축적의 폐해가 여실하게 드러난 시대입니다. 이런 理由로 석가모니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조로아스트는 '혼돈의 시대'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혼돈의 시대, 고통의 바다를 헤쳐 나가도록

조로아스트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生覺과 올바른 行爲와 올바른 말의 가르침을 베풀었고,

석가모니는 罪業을 쌓지 말고 善行을 베풀 것을, 그리고 예수는 사랑과 믿음을,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에 대한 깨달음을, 공자는 예악(禮樂)과 인(仁)을, 노자는 무위(無爲)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모두 큰 가르침들이고, 그 가르침은 지금 이 時代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注目할 것은 위의 어떤 스승도 當時의 政治的 支配樣式과 生産樣式에 대해서는

正面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모두가 우리의 잘못된 마음에서 비롯된 問題라고 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樞軸時代 人類의 스승들은 當時의 社會制度나 生産樣式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社會惡으로 認定했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따라서 樞軸時代의 스승들은 그것을 變革하기보다는 그 社會惡으로부터

發生한 응어리와 苦痛과 아픔과 엉킨 매듭을  슬기롭게 푸는 智慧를 가르쳤다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의 가르침에는 지금 보더라도 커다란 智慧가 담겨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當時의 사람들이 不安과 苦痛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國家의 制度와 身分, 階級이라는 것은 언제든 엄청난 社會的 爆力으로 作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蓄積과 착취, 富者와 가난한 者의 나뉨은 熱心히 일해도 먹을 것을 얻기 어려운 困境으로 사람들을 내몰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삶이 고단할 수밖에요. 모든 것을 마음 하나로 풀기에는 世上이 너무도 각박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견주어, 初期 샤마니즘의 時代에는 국가도, 계급과 신분도, 착취와 축적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필요할 때는 채집하고 수렵해서 양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북미 인디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들은 물질의 축적 대신 나눔의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나를 生覺하기보다는 家族과 이웃과 民族을 먼저 生覺하는 아름다운 文化를 꽃피웠습니다.

 

물론 樞軸時代의 人類의 스승들도 나눔을 强調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동정과 보시의 水準을 넘지 못합니다.

物質의 餘有가 있을 때만 나누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北美 인디언들의 경우에는 나눔이 곧 生活이었지요.

 


物質은 兩面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꼭 必要한 것이긴 하나 지나치면 반드시 害가 되지요.

物質을 쌓아두고 蓄積하기 始作하면 個人의 欲望과 利己心을 刺戟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北美 인디언들은 個人의 欲望을 擴大하고, 物質에 執着하고, 利己心을 키우는 것을 무엇보다 警戒합니다.

그것은 나와 남을 나누고 다른 사람, 다른 존재들을 나의 형제요, 친척으로 보기보다는 物質을 얻기 위해 對相으로,

나의 欲望을 實現하기 위한 手段으로 볼 틈을 열기 때문이지요.

돌이켜볼 때, 農業의 剩餘로부터 促發된 이러한 신분과 계급, 축적과 착취의 잘못된 문화는 初期 샤마니즘에서

가르친 "몸과 물질에도 靈적인 要素가 있다(spiritual body)"는 커다란 가르침을 經視해 왔습니다. 그 結果 우리는 自然의 神性함으로부터 멀어지고, 남들로부터 멀어지고, 自我와 에고의 섬에 갇히는 隔離되고 외로운 存在가 되고 말았습니다.

 

現代의 都市生活은, 그리고 商品의 匿名性(익명성)은 이러한 自我와 에고의 섬을 더욱 强固하게 부추기는 側面마저 있습니다. 實際로 自然의 生命과 物質들의 靈的인 要素를 否定하고 道具的 對相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잘못된 思考는, 우리의 몸과 生命마저 그 神性함이 否定되고 商品性의 잣대로 取給되리라는 것을 豫告합니다. 이미 女性의 몸을 商品化하고,

性을 商品化하는 데서 우리는 그 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소외(疎外)'라고 했지요.

그리고 人類의 樞軸時代의 스승들과 달리 生産의 問題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生産이 착취와 축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社會革命을 主導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몸과 自然의 物質에 靈的인 要素가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政治的 社會主義의 實驗이 失敗하는 過程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가 제기했던 生産과 蓄積의 弊害를 나눔으로 풀어야 하며, 人間이 自然으로부터, 他人으로부터, 그리고 自己 自身으로부터 疎外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問題意識-卽, 모든 存在는 서로 連結되어 있고 서로 依存한다는 가르침-에 含縮된 지극한 뜻마저 無視되어서는 안 됩니다. 失敗했을  망정, 그가 提起한 問題는 지금도 有效하기 때문입니다.


北美 인디언들은 이 問題를 아주 智慧롭게 풀었습니다.

自發的인 나눔과 自身을 낮추는 恭敬과 이 世上의 모든 存在의 平等함을 具現한 民主的인 方式으로 말이지요.

제3세계의 原住民들 또한 이 問題를 큰 어려움 없이 풀어왔던 것을 볼 때, 우리는 北美 인디언들과 제3세계의

원주민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旣成宗敎에 견주어 샤마니즘을 저급한 原始的인 宗敎라 무시하지만, 北美 인디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히려 샤마니즘의 地平이 기성종교보다 훨씬 더 넓고 自由로웠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人間답고 神性하게 살았다는 事實을 우리는 外面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生態的 危機가 甚刻해지고, 地球生命의 위기가 可視化된 狀況에서는 모든 것을 마음의 問題로 푸는 데에도 限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몸과 物質에, 自然에 靈的인 要素가 있다는 것을 認定하고, 모든 살아 있는 生命이 神性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認定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自然이 '한 몸'임을, 동식물과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神性한 존재임을,

 

이 世上의 모든 存在가 '하나'로 連結되어 있음을 깨달아야겠지요. 나아가 기존의 지배와 축적과 착취의 문화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더 늦기 전에 다음 세대를 위해서 恭敬과 나눔의 文化를 發展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북미 인디언들이 白人들의 抑壓과 蔑視와 彈壓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우리에게 傳해 주고 있는

 

智慧인 것입니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 '이장', 2003년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