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북미 원주민 이야기 - 6 / 靈性에 대해

장백산-1 2013. 7. 8. 15:51

 

 

 

 

 

       북미 원주민 이야기 - 6

      靈性에 대해 - 서정록

 

 

 

 

 

 

 

지금은 靈性의 時代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靈性이란 말이 널리, 그리고 흔하게 쓰입니다. 또 수많은 靈性

共同體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地球의 生態的 危機가 可視化되고 傳統時代의 共同體文化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런 現狀은 加速化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靈性의 本質대해서 混亂을 겪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靈性이라고 하면서도 막상 쓰는 사람마다 그 意味와 뜻이 다른 境遇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神, 또는 神的인 것과 關聯된 것을 靈性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 基盤을 둔 社會的 靈性을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나 前者의 경우는 神 中心으로 봄으로써 자칫 日常的 關係나 自然과의 關係 속에 들어 있는 靈性的 意味를 忘覺하기 쉽고, 後者의 경우는 자칫 모든 것을 關係의 問題로 풂으로써 '神性함'의 問題를 소홀히 다룰 危險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生態的 均衡과 秩序를 回復하는 것을 念頭에 두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生態的 均衡과 調和가 靈性 問題의 核心이기는 하지만 이 境遇에는 자칫 生態的 根本主義에 빠질 危險이 있습니다. 그래서 靈性의 問題를 올바로 理解하는 것이 生覺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靈性이란 말은 영어로 spirituality입니다. spirit(靈)을 의미하는 말의 抽象化된 形態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靈'이란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靈이란 우선 몸(body)과 물질(matter)에 對立되는 槪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과 物質이 直接的이고 個別的인 것이라면, 靈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抽象的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靈에 對해서 시베리아나 호주,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등지의 샤마니즘을

觀察해 보면 고대인들은 숨결(breath)이나 言及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靈魂이란 抽象的인 槪念이 없던 古代人들에게 生命을 可能하게 해주는

숨결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살아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 여겨졌던 것이지요. 實際로 古代의 創造 神話들을 보면 하나같이 '生命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 人間과 萬物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숨결은 바람입니다. 바람은 우리가 呼吸을 할 대 우리 몸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합니다. 그와 함께

다른 存在의 몸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서로의 숨을 섞습니다. 피도 마찬가지지요. 피는 물입니다. 물은

新陳代謝를 通해 우리 몸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면서 우리를 살아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들락날락거리는 물은 다른 存在들의 몸을 들락거리는 물과 섞입니다.


따라서 숨결이나 피는 關係性, 循環性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古代人들은 直接的이고

可視的인 對相들 너머에 있는 것이면서 이들 對相들을 살아 있게 하는 同時에 다른 存在들과 關係 짓는 것을

이라 生覺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關係(관계) 무엇인가요?

關係란 個別的인 存在와 對相들을 連結짓고 서로 依存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含縮이 많은 말이지요.


예를 들어 보지요. 인디언들의 靈性과 관련된 말 중에 가장 重要한 말로 '偉大한 神靈'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서구의 神(god)에 해당하는 말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理解하는 偉大한 神靈은 그런 人格的인 神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바람이나 물의 活動을 理解하면 이해하기가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生命을 가진 모든 存在를 드나들며 모든 存在들의 숨결을 서로 섞습니다.

그렇게 모든 存在들을 連結짓지요. 물 또한 모든 存在들을 넘나들며 서로의 물을 섞습니다. 어디 숨겨과 물뿐인가요.

우리의 行爲 또한 다른 存在들에게 影響을 미치고 그들은 또 다른 存在들에게 影響을 미치면서

나의 行爲는 나를 둘러싼 關係의 關係網을 돌아 結局

내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生覺도 마찬가지지요. 나의 生覺은 다른 存在들에게 影響을 미치고,

그렇게 關係의 關係網을 돌아 다시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서로 連結된 모든 存在들의 關係와 그 意味의 總合이 바로 偉大한 神靈입니다.

그러므로 偉大 神靈 서양이나 아시아의 神처럼 人格的인 그런 神이 아닙니다.

이 世界의 存在의 眞相이면서 各各의 存在에게 意味를 附與해 주는

인드라網과 같은 窮極的인 그 무엇인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모든 살아 있는 存在는 靈(魂)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生命을 가지고 있는 存在는 모두 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때 은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의 主宰者를 意味합니다.

나라는 存在에 意味를 주는 그 무엇을 그들은 이라 했던 것이지요.


이 世上에서 存在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前提로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나 혼자서는 存在할 수 없다는 데 問題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自足的인 存在라면, 굳이 다른 存在가 必要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存在에게 依存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나 以外의 다른 存在들과 같은 時·空間에 있을 때에만 生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때 비로소 삶의 意味를 가질 수 있는, 그런 二重 三重으로 缺陷을 가지고 있는

存在입니다.


그래서 主宰者로서의 나의 靈을 말하려면, 나를 둘러싼 關係網을 前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關係 속에서 나의 存在의 意味와 내가 할 일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다못해 飮食을 먹고 마시려고 해도

다른 存在의 도움 없이는 不可能합니다. 다른 存在의 犧牲 없이는 말이지요.


따라서 主宰者로서으 은 스스로는 存在할 수 없고, 오직 이 世上의 關係網의 작은 매듭으로서만이 存在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이되 내가 아닌 것이 나의 主宰者의 實相이며, 그것을 아는 것이

所謂 깨달음의 本質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所重하면 다른 存在들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所重합니다. 結局 이 世上에 所重하지 않은 存在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모두 다 偉大한 神靈의 部分이요, 關係의 그물網의 한 軸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動植物을 取해야 합니다. 生命이 없는 것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生命만을 먹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딱한 모습입니다. 東學의 2代 敎主였던 海月 선생은

이것을 가리켜 "生命으로 生命을 먹인다(以天食天)" 했습니다.

 

 

 

예언자』의 作家인 '칼릴 지브란'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풉니다.

"네가 大地의 香氣를 맡으며 살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늘을 向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햇빛을 받고 살아가기를 빈다.

그러나 너는 먹기 위해 生命을 죽여야만 하고,

너의 渴症을 축이기 위해 새로 태어난 生命을 위해 生産해 낸 牛乳를 빼앗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의 食事가 崇拜의 行爲가 되게 하라.

그리고 숲과 평원의 純粹하고 無垢한 存在들이 犧牲되는 식탁을 너의 제단이 되게 하라.

그들이 사람 안에서 더 순수하고 무구해질 수 있도록...

動物을 죽일 때 그에게 가슴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라-
너를 죽인 똑같은 힘에 依해서 나 역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먹힐 것이다.

너를 나의 손에 가져오게 한 自然의 法則은 나를 보다 더 强力한 손에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피와 나의 피는 그렇게 사라지지만 우리의 水液은 하늘의 나무의 목을 적실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깨물 때 사과에게 가슴으로 말하라-


너의 씨앗들은 내 몸에서 자랄 것이다. 어느 날 네 꽃봉오리가 내 가슴에서 필 것이다.

그리고 너의 香氣는 나의 숨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四季節 내내 기뻐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