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북미 인디언 이야기 - 7 / 숲의 사람들

장백산-1 2013. 7. 8. 16:03

 

 

 

 

       북미 인디언 이야기 - 7

      숲의 사람들 - 검은 호수 서정록

 

 

 

 

                           

 

 

숲은 뿌리를 땅에 박고 하늘을 向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사람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同時에 살아 있는 뭇 生命들의 쉼터입니다. 北美 인디언들은 나무를 '서 있는 사람' 또는 '키 큰 사람'으로 부르지요. 굳이 인디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人類의 燈불이 된 큰 스승들이 큰 나무 밑에서 智慧를 길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詩人 시드니 레이니어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는 혀가 없는 나무를 위해서 말한다
봄이 가고 다시 봄이 올 때마다 나무는 더욱더 高貴해진다
그리고 말없이 깊은 生覺에 잠겨
祈禱하는 굳센 팔들을 쭉 펼치고는
커다란 祝福의 가지들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나무는 서 있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이 詩句는 많은 여운을 줍니다. 그런 나무들이 모인 숲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靈적인 開眼을 하게 해 주고, 때로는 勇氣와 위로를 주고, 때로는 親舊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 숲과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들과 콘크리트 都市에서 자란 사람 間에는 情緖的으로 커다란 差異가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印度의 修行者들이 나이가 들면 숲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됩니다.


무릇 生命을 가진 存在는 空氣과 마찬가지로 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所謂 文明이 싹튼 곳들을 보면 예외없이 이 을 破壞하고 있습니다.

수메르와 그 뒤의 바빌론 文明이 발생한 中東 地域이 過去에 나무들이 있는 草原 地域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聖經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적어도 구약 시대만 해도 -대략 기원전 2천 年에서 1천 年경만 해도- 틀림없이 숲과 草原이 같이 있는 그런 地域이었습니다.

그것이 過度한 羊과 염소 유목으로 인해 지금처럼 荒無地로 變했습니다.


그리스 文明의 발상지로 유명한 미케네 지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過去에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였던 곳이지만, 그래서 그리스 神話에 온통 숲의 神과 精靈들에 關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곳이었지만, 오늘날은 민둥山만이 남아 있는 그런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科學과 技術이 넘쳐나는 現代 文明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숲과 우리의 삶은 과연 兩立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전 그렇지 않은 證據를 北美 인디언들에게서 봅니다. 北美 인디언들은 東部와 西部의 廣大한 山林을 배경으로

人類史에 다시없는 靈적인 共同體를 이루었던 사람들입니다. 수우族, 샤이엔族 등이 東部의 白人들에게 밀려

大平原에서 버펄로 사냥을 하는 유목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18세기 말엽 이후의 일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 역시 다른 인디언 部族들과 마찬가지로 廣闊한 山林을 舞臺로 數千 年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 인디언 하면 몽골리안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當然히 아시아에서 베링海를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간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이야기라 할 수 있지요. 무슨 이야기나 하면, 血統上 또는 遺傳的으로는 그렇게 아시아에서 건너갔을지 몰라도

文化的으로는 아메리카에서 그들 나름의 獨者的인 文明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에서 最初로 文明을 꽃피운 곳은 古代의 마야 地域입니다. 지금의 멕시코 南部에서 유카탄 반도에

 

이르는 地域이지요. 이들 地域에서는 紀元 前後부터 本格的인 文明이 發生하고, 그 꽃은 北美와 南美 大陸으로

퍼져나가 아메리카에 찬란한 인디언 文化를 이룩하게 됩니다.

얼마 전, 人類의 紀元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한 女人의 後孫이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굳이 아시아에서 건너갔네, 안 갔네 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文化的으로 어떻게, 또 어떤 꽃을 피웠나 하는 것이

더 重要하다고 生覺합니다. 그렇게 볼 때 아메리카의 인디언 文化는 분명히 구대륙과는 다른 獨者的인 文化의 꽃을 피웠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白人들이 그들의 文化를 破壞하고 歪曲하기 前까지는 말이지요.

 

그런데 같은 아메리카라고 해도 中南美 지역과 北美 지역 間에는 커다란 差異가 있습니다. 中南美에서는 일찍부터 잉여와 축적, 계급과 신분 구조, 국가의 지배 구조 등이 나타나면서 중동이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숲을 破壞했습니다. 所謂 마야제국, 아즈텍제국, 잉카제국 등이 바로 그러한 文明의 産物이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 견주어 北美 인디언의 境遇는 狀況이 다릅니다. 물론 그들의 文化에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고,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北美 인디언 문화와 中美 지역의 인디언 문화에는 유사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北美 인디언들은 中南美 인디언과 달리 剩餘를 蓄積으로 만들지 않았고, 身分과 階級, 國家와 같은 것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先祖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숲을 破壞하지 않으면서,

卽 自然과 均衡과 調和를 이루며 幸福하게 사는 法을 發展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白人들이 처음 北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끝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거대한 숲, 그것도 키가 백미터

가까이 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들을 보고는 그 웅장함에 경탄을 연발했다고 합니다.

事實 北美 인디언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높은 水準의 靈的 삶을 살았던 데에는 바로 그와 같은

울창한 숲이 있었다는 점을 念頭에 둘 必要가 있습니다. 울창한 숲 가장자리에 살다 보면 큰 마을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自然히 작은 親族共同體 單位로 숲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마을이 形成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살던 그 숲의 마을을 生覺해 보십시오. 뒷山에 가도 앞山에 가도, 몇 사람이 팔을 잡고 둘러싸야 겨우 품에 안을 수 있는 그런 큰 나무들이 빽빽했을 것입니다. 아니, 마을 自體가 그런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겠지요. 요즈음 우리 주변의 산들은 거의가 팔뚝 굵기보다도 작은 나무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북미 대륙에는 數百 年씩 묵은 큰 나무들이 즐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 나무들을 堂山나무, 또는 신목(神木)이라 해서 崇拜하는 文化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큰 나무들은 人間보다도 오래 살아 大地의 神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요.

그런 큰 나무 앞에 서면 아무리 感性이 무딘 사람이라도 경건해지게 마련이니, 神靈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北美 대륙의 광활한 山林에 미쳐 一生을 산 뮤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白人들에 의한 西部開拓 時代가 끝났을 때 곳곳에 남아 있던 몇몇 울창한 山林 地域을 保護하기 위해 國立公園의 槪念을 創案해 이를 實現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일대의 울찬한 산림들을 순례하며 많은 글과 그림들을 남겼는데,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나무들이 하나같이 엄청나게 굵고 키가 百미터 이상 되는 神靈스러운 나무들입니다. 그런 나무들이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숲, 그것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地平線과 맞닿은 숲들을 想像해 보십시오.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숲에서 나무들과 숨결을 나누며 쓴 글들은 珠玉처럼 아름답게 빛납니다.


東部 地域도 마찬가지였습니다. 白人들이 이주 初期에 남긴 글과 그림들을 보면 숲이 얼마나 울창하던지,

神秘스러울 정도입니다.


北美 인디언들이 살았던 숲은 바로 그런 경이와 아름다움과 꿈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숲이 울창하면 계곡에

물고기도 많은 법. 그들은 그런 나무 -사람들이 모인 숲 가장자리나 물이 있는 골짜기에 살면서 수렵과 어렵,

그리고 채집 생활을 하며 '풍요로우면서도 소박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워낙 숲이 울창하다 보니 야생 과실과도 많았었나 봅니다. 특히 야생 딸기 등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철따라 산에서 나는 이런 과실들과 인디언

상추로 알려진 왕고들빼기 등의 野菜를 거두어다 먹었습니다. 모든 게 自然 그대로의 것이었지요.

肥料 치고 農藥 쳐서 재배한 요즈음의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발도르프 학교의 설립자로 유명한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어떤 사람이

"요즈음은 왜 過去의 위대한 스승과 같은 분들이 잘 안 나옵니까?" 하고 묻자, 슈타이너가

먹는 것이 過去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을 겁니다.

요즈음처럼 化學肥料로 키운 作物과 自然에서 제 스스로의 힘으로 宇宙의 氣運을 받아 成長한 作物은 그 靈적인 힘이나 氣運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인디언들이 그처럼 높은 靈性을 가지고 있었던 데는 이처럼 山林을 잘 保存하고, 自然에서 나는 튼실한 것들을 取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늘 感謝하면서 말이지요.


게다가 그들은 아시아처럼 통나무집을 짓지도 않았습니다. 땔감 또한 반드시 죽은 나무만을 모아다 썼습니다.

그러므로 숲이 破壞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땔감을 담당한 것이 女性이었다는 점과

그들에게 나무를 찍어 넘어뜨릴 도끼가 없었다는 것이 이것을 象徵的으로 말해줍니다.

 


 

그래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熱心히 努力하면 숲과 강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들은 人類史에서 찬란히 빛나는 '나눔의 문화'를 發展시켰는데, 이러한 나눔의 文化야말로 어려운 시절에 굶주림과 기아를 피하게 해 주었습니다. 내가 사냥에 失敗해도 다른 사람이 成功하면 같이 먹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캘리포니아의 해안 지대에 사는 오론네족의 경우, 사냥해 오면 4분의 1가량만 自己가 取하고, 나머지는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극한 나눔의 實踐은 북미 인디언들에게 거의 共通的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들은 나 個人보다는 家族과 이웃과 部族을 먼저 生覺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本이

되고, 서로를 챙겨주는 家族共同體가 形成됩니다. 인디언들은 혈연가족뿐 아니라 같이 마을을 이루며 사는 이들을 모두 家族으로 여겼습니다. 이른바 '擴張된 家族'이지요. 이런 擴張된 家族은 社會經濟的인 共同體이기도 하면서 靈的인 共同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擴張된 共同體의 배경에는 울창한 숲과 自然이 있고, 動植物이 있습니다. 山과 江이 있고,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있고, 냇물이 있고, 해와 달과 별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큰 나무를 '서 있는 사람', '키 큰 사람'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숲의 文化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그저 불쏘시개나 건축물의 재료로만 生覺하는 그런 文化에서는 그런 感性이 나올 수 없지요.


 

숲은 결코 文明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除去해야 할 對相이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는 길을 낸다며 산들을 깎고

동강내고 허리를 뚝뚝 잘라 버립니다. 그리고 함부로 나무를 잘라내고 파헤칩니다. 심지어 地球의 허파라는 熱帶 雨林

마저 無差別로 베어 냅니다. 인디언 式으로 말하면 숲은 어머니 大地의 皮膚이지요. 인디언의 어법이 아니더라도

이나 구릉은 살아 있는 生命입니다. 우리의 祖上들이 山神靈을 말하고, 山에 들어갈 때나 무덤을 쓸 때

먼저 山神께 祭를 지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山과 숲을 함부로 파헤치고 破壞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파헤쳐진 山을 지날 때면 山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파서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動物들이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그 비명이 귓전을 때립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大地 위에 팔을 벌리고 서면 우리 또한 나무라고...., 그렇게 움직이는 나무일 뿐이라고...,

나무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만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서 있을 뿐이라고..., 우리는 나무로부터

大地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法을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의 祖上들은 나무의 生命이 곧 사람의 生命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나무의 그늘을 떠나 멀리 방황한다면,
나무의 果實의 자양분을 찾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또는 사람들이 나무에 등을 돌리거나 그들을 破壞하려고 한다면,
큰 슬픔과 災殃이 내릴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힘을 잃을 것이다.
꿈을 꾸고 神命 보기를 그칠 것이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말다툼을 벌일 것이다.
眞實을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서로 正直하게 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自身들의 땅에서 살아가는 法마저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들은 自身들의 몸을 서서히 毒으로 채울 것이며,
그들이 손대는 것마다 毒으로 變할 것이다.

--생태공동체를 일구는『이장』, 2004년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