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불교의 근본가르침은 無我

장백산-1 2013. 8. 14. 13:25

 

 

 

 

 

禪에서 본 金剛經 /설우스님

 

經을 보되 經의 말씀 그대로 글줄을 따라가면

부처님이 대단히 원통하게 생각하신다 참 답답하고 한심하다.

그렇다고 經의 뜻을 어긋나서 자기 소견대로 얘기하면

그건 또 부처님 말씀이 아니고 마구니 말씀이 된다'

그래서 이 經을 바로 볼 수 있는 眼目, 이 正見이 잘 열려야 한다.

 

禪은 무엇을 禪이라 하는가? 

佛心을 禪이라 한다.

佛心은 眞理 ,法 그 自體이다.

眞理, 法  自體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의 方便이 아니고 달 自體를 禪이라 한다.

부처님의 마음 性稟  그대로 내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의 사는

부처 입장에서 법문을 하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선이라 한다.

선을 잘 하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생활해가는 사람이 선을 잘 하는 사람이다.

 

事實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

여러분들이 整理해야 할 것은 우리가 重生이 아니라는 事實이다.

이걸 믿든 안 믿든 이해하든 못하든 알든 모르든 여러분은 부처라는 거다.

부처가 지금 이 法門을 듣고 있고 소리를 들으면서 生覺하고 있는거다.

여러분은 그대로 부처이다. 그대로 '부처이다' 라는 것이 事實이다.

그래서 事實을 事實대로 알아라는 거다.

내가 부처라는 事實을 事實대로 알고 그리고서는 부처가 부처로서

부처의 삶을 부처의 인생을 산다. 이것이 禪이다.

 

거울(鏡)이란 事物이 오면 그대로 비춘다.

그 비추는 作用性이 아주 自由롭고 正確하게 事實을 잘 드러낸다.

이것이 혜[慧]다. 비추는 것은 慧를 말하고, 事物이 와서 비추고나서 가고 나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無心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本性이 그렇다.  육조스님은 비추는 것을 '慧'라고 하며,

事物이 떠나고 나면 無心하게 고요하게 지키는 것을 정[定] 이라 했다

비추는 것은 恒常  生活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얘기도 하고 듣고 사업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 .

이것을 平常心이라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妙有라 하고,

모든 關係가 끝나고 本來 本性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無心이라 한다.

本性은 虛空과 같이 恒常 고요하다. 虛空은 무너뜨릴 수가 없다.

虛空을 더럽힐 수도 없다. 虛空은 수명도 변함도 없다

우리의 無心하다고 표현하는 本性자리는 虛空과 같은 側面이 있다는 거다.

또 虛空은 고요하고 밝고 無心하지만은 無心한 가운데 天森羅 萬森羅 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이 虛空이 다 살려내고 키워내고 꽃도 피우고 生命으로서 活動하게끔 虛空이 만들어준다

또한 虛空은 한번도 내가 그들의 主人이라고 생색이 없다[묘유].

그래서 無心하다. 本性에 比喩한다.

 

無心하고 고요한 가운데에 다시 그 많은 生命을 살려내고

서로 주고받는 모든 關係가 서로 相生시키고 서로 幸福하게 하고

서로 便安하게 하는 作用이 無心에서 나오는 平常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眞空妙有라고 한다. 마음이 그와 같다

여러분은 思惟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불교의 根本가르침은 無我이다. 無我인데 무엇이 듣고 무엇이 輪廻하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없다고 그러면 아주 없는 걸로, 아무것도 없는 그 虛無하고 斷滅된 것을 生覺하기 때문에

무병(無病)에 들어있다 .

있다고 하면 그 있는 것이 絶對的으로 變하지도 않고 永遠히 存在하고

그 하나의 개체가 영원성을 가지고 항상 있다고 執着하는 것이 有病이다.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無我란 하늘에 구름이 없다는 말이다.

구름이 없다고해서  하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빈병이라 했을 때 병속의 물이 없다는 것이지 병 자체까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없다는 말은 우리가  잘못 본 그 탐심 욕망 어리석음 성냄 차별심 여러가지 찌꺼기들이

없다는 것이지, 항상 그 거울과 같이 광명의 빛이 나오는 우리의 지혜의 밝은 本性자리는 없는게 아니다.

그 지저분한 중생의 慾心 識心 그런 찌꺼기가 없는 '나'이다 [大我, 眞我].

없다고 하면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참' 나의 本性이 듣는다는 말이다.

내가 있다고 生覺하는 그 瞬間에는 그 慾心 어리석은 중생의 業識이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눈병난 사람이 허공을 보면서 마치 허공의 아지랑이를 보는 것과 같다.

허공에 아지랑이가 있나 그 아지랑이를 보고 이쁘다 어떻다고 하면서 한 생을 보내는 거다.

그런 것이 없는 줄 알면 거기에 나의 밝은 본성이 항상 한번도 어두워진 적도 없고 고대로 밝다.

 

그러면 이세상 천지가 다 밝다고 할 때 한 구석이라도 어두운 구석이있으면

어두운 구석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밝다는 말이 필요한데,

전체가 다 밝아버리니 밝다는 말도 필요없다.

어둠이 있을때 밝다는 말이 필요하지, 어둠이 없는데 밝다는 말이 필요없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밝음 그 자체이다. 그것이 '나'이다.

'듣는다' 그럴 때 내가 없다는데 무엇이 듣는가.  또 막힌다. 다 원만하게

통할수 있는 지혜의 문이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은 그냥 닫혀버린다.

듣는 것이 전부 나에게 고통을 주는 일로 들리고 업을 만드는 일로 들리고

업이 만들어지니까 윤회하는 일로 만들어진다.

그건 내가 잘못된 허상 욕심 시기질투 비교 차별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그것이 자기라고 생각한다.

 

 

이런것을 잘 알면 듣는 것이 바로 들리게 된다.

無心하게 들리고 또 平常心으로 便安하게 모든 生活을 智慧롭게 活用할 때는

活用하면서 境界가 오면 자신에 맞게끔 생활을 풀어나가고 그것이 끝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렇게 色과 空에 걸리지않고 自由自在하게 잘 하는 사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잘 아는 사람이다

一時는 한 때를 말한다. 여기서 한 때란 '선'적인 면에서 한때란 '지금 이때다' 하면 벌써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 현재라 하면 또 지나가버렸다 현재심도 얻을수 없다.

무엇이 한때인가? 정견이 서고 안목이 서면 자기소견 지혜가 나온다. 

공부를 많이 하면 자기소리를 낼 줄 안다.

 

우리가 日常生活을 하면서 많은 境界들에 부닥친다

사람 물질등 많은 境界를 맞을 때

또 마음속에서 경계따라 번뇌 분별심 연민심 자비 보시 사랑 이런 감정이 마음에서 올라오죠.

이러한 生覺들이 올라올 때 그걸 누가 代身해 줄 수 없다.

그래서 선사들이 '이것은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을 때 밥맛을 알 때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실 때 물맛을 알 때다.' 밥맛과 물맛을 스스로 아는 가 안다'고 했다

 

저 法門을 듣고 思惟할 줄 알아야 한다. 처음 들을 땐 이러저러한 맛이 있다.

한 삼십분 지나면 맛이 없어져버린다. 맛이 없어질 단계까지 가야 된다.

그래서 一時는 스스로 아는 者가 아는 때다.

'如是我問 一時佛' 佛은 부처다. 부처가 어디있는가 부처를 찾기 위해 마음밖에서 찾으려하지만

그러는 순간 내 부처가 그 순간에 지옥을 만들어버린다

부처는 내 本性, 여러분이 法門을 듣고 알고 지금 生覺하고 있는 ,이 마음의 作用이 부처이다. 

여러분은 내 소리를 들으면서 부처를 바로 알아버려야 한다.

지금 내가 부처인데 이걸 믿지 않고 밖으로 찾아 헤매면

그것은 도솔천에 앉아서 미륵궁이 어디냐 하는 것과 같다.

 

진짜 隱居道人은 世俗에서 衆生과 똑같이 生活하기 때문에 저사람이

수행자인지 부처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을 은거도인이라 한다.

부처가 제대로 부처가 되려면 중생으로 돌아가야 된다란 말이 있다.

부처는 權位意識이 없다. 여러분도 나도 모두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는 平等하다.

부처에서 나오는 힘은 어떤 힘이냐? 부처가 되면 '나'라는 我執이 없기 때문에

'나' 라는 틀을 만들지 않는다. 恒常  衆生을 生覺하는 마음이 부처의 모습이다

 

봄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달빛이 좋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좋다.

만약 쓸데없는 일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으면 그것이 곧 인간의 좋은 시절이다

 

- btn 설우스님의 선에서 본 금강경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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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당|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