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생활실천 수행 5가지

장백산-1 2013. 8. 18. 15:10

 

 

 

        생활실천 수행 5가지

 

모든 괴로움의 原因은 執着에 있다.
執着이란
恒常하지 않는 對相에 對해
恒常하기를 바라고,
恒常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그 어느 것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 세상의 唯一한 眞理는 恒常하지 않고 變化한다는 것이다.
오직 變化한다는 그 眞理만이 變化하지 않을 뿐이다.

諸行無常.
變化하는 것이 眞理라면 그대로 변화하게 내버려 둬야 한다.
어리석은 우리가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거스를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대로 산다는 말은 變化하는 대로 變化를 받아들이며 산다는 말이다.
變化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執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은 반드시 변화한다. 내 마음도 변화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변화하고,

나의 사랑도 변화하며, 나의 소유물들도 다 변화하고, 내 몸뚱이 조차 변화하여 空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그렇게 변화할 뿐이다.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모든 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세상의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변화에 내 삶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존재며 경계 그 모든 것은

변화라는 진리의 한 모습이며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나툼이고 부처의 나툼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唯一한 일은 변화라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수행자의 첫 번째수행은 變化하는대로 變化할 수 있도록
어느 것 하나 붙잡아두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攝受’의 수행이다.
‘수(受)’, ‘받아들임’ 그것이 진리대로 사는 첫 번째 길이자 窮極의 길이다.

그러면 變化하는데 어떻게 變化하는가. 무슨 근거로 變化하는가.
그 근거가  바로 因緣法. 이 世上은 因緣따라 그대로  나툰다.
原因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結果가 따라온다.

이 세상 그 어떤 곳에 숨어도因緣果報라는 法則을 피할 곳은 없다.
인연과보는 죽음 이후에도 반드시 따라오는 법.
지금 내 삶이 진행되어 가는 모습은 내가 과거로부터 지어 온 業障이 現實化되는 過程인 것이다.

내가 짓지 않은 것은 결코 現實化 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現實은 분명 내가 지은 일이고 과거의 결과인 것이다.
쉽게 말해 누가 나를 욕하더라도 그것은 내 과거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당장에 욕 얻어 먹는 것은 괴롭지만 그것은 過去의 惡業의 結果를 받음으로써 業을

녹여가는 過程인 것이다.

그러니 괴로운 일도 크게 보면 좋은 일이다. 다 부처님의 일이고 진리의 일이다.
괴로운 일은 과거세 악업의 과보를 받는 일이고, 그럼으로써 내 업장은 그만큼

깨끗해 지는 일인 것이다.

또한 좋은 結果만 받겠다고
일도 열심히 안 하고 좋은 일이 있기만을 바랄 것도 없다.
내 삶에 대박이 터지고, 행운만이 있길 바랄 것도 없다.
因果法에 대박이란 없다. 내가 과거세에 지은 福을 지금 받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좋은 일만 자꾸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내 안의 福을 자꾸 까먹는 일이고,
선업의 업장을 다 써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내 악업이 녹아내리느라고 그러는것이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과거에 지은 복, 선업을 받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일이라고 拒否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이라고 더 받고자 애쓸 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는 그저 꼭 必要한 일이 因緣따라 必要할 때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싫다고 拒否할 것도, 좋다고 애착할 것도 없이 그저 是非 分別을 다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
因緣法을 實踐하는 일이고, 우리의 業을 맑히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의 方式은
좋은 것은 더 얻지 못해 애쓰고 집착하며, 싫은 것은 버리지 못해 애쓰고 괴로워한다.
一切는 變化한다는 理致를 받아들이지 않고  恒常하기를 바라며 붙잡아두려 한다.

붙잡아두었을 때, 그래서 ‘내 것’이란 所有物들이 많아질 때,
좀 더 많이 所有하고 執着하는 對相을 붙잡아 두었을 때
우리들은 幸福하다고 錯覺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죽을 때 까지 執着하고 執着하고
그 執着의 對相을 끊임없이 所有하고자 하는 延長이 우리의 삶이다.
執着하는 對相을 얻었을 때 幸福하고,
執着하는 對相을 잃었을 때 괴로움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世上에 恒常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執着할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變化한다는 眞理 앞에서  執着은 괴로움만을 同伴할 뿐이다.

말 그대로 執着이라는 것은 그 어떤 對相에 대해 그것이 永遠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세상의 變化를 拒否하려는 것이고, 내 마음이 그 執着 對相에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諸行無常의 이치 즉, 變化라는 眞理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拒否하고 모든 것을 執着하려 든다.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지독한 我執.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始作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執着과 執着으로 原因된 괴로움 때문에

허우적 대는 중생을 위해 부처님께서 새삼스럽지만 執着을 놓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계신다.
變化 그 自體를 받아들이는 ‘受’의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眞理답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變化를 받아들이지 않고 잡아두려 애쓰고,

집착하려 애쓴다. 행복하기 위해 집착해 부여잡는 어리석음을 감행한다.

그래서 또다른 수행을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放下着이라는 말도 할 것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執着을 하고 사니
어쩔 수 없이 ‘집착을 놓아라(방하착)’ 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에게 당부하는 두 번째 수행법 ‘방하착(放下着)’ 이다.
이러한 ‘방(放)’의 수행은 분명 첫 번째 ‘받아들임’의 수행과 別個의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을 하니까 그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다른 말로 말하는 것일 뿐.

放下着, 가지고 있는 집착을 놓았을 때 모든 괴로움은 消滅되고,
變化라는 眞理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우리 存在는 眞理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방하착하라고, 가지고 있는 모든 집착을 놓으라고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집착을 놓으려고 억지로 애쓰며 집착을 놓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방하착이 또 다른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수행이 또다른 괴로움을 몰고 온다.
수행 잘 하고 싶은데 수행이 잘 안되서 괴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나 애쓰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애써서 수행하려고 , 부처가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지금 이대로 우리의 存在도 삶도 이미 完全하기 때문이다. 애쓴다는 것은 이미

지금 이 瞬間에 滿足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찾아 갈구한다는 말이며
지금 이 瞬間에 滿足하지 못했을 때 행복은 깨어지고 괴로움이 시작된다.

執着을 없애기 위해 애쓰지 말라. 어떤 努力도 하지 말고, 어떤 分別도 하지 말고,
어떤 判斷이나 評價도 하지 말고, 다만 執着하고 있음을 물샐틈 없이 바라보기(觀)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아무런 分別 없이 바라보기(觀)만 하면 된다.
다만 바라보기(觀)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變化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變化를 받아들였을 때 그랬을 때 眞理와 하나 되어 살아갈 수 있다.

다 같은 말이다.

받아들이라는 말이나(攝受)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나(放下着)
바라보라는 말이나(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方便일 뿐이다.

그래서 세 번째 수행으로 ‘관(觀)’, 알아차리기, 바라보기를 말하는 것이다.
한다는 말은 오직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한다는 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할 때
存在는 完全하고 完璧하게 깨어있게 된다. 그 때 存在 本然의 깨달음과 함께하는 것이다.

깨어있음과 함께 하지 않는 그 어떤 行爲들도 모두  業, 카르마가 되고 말지만,
과 함께 하게 되면 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금 이 瞬間 깨어있음의 힘은

그대로 부처가 되어, 이 世上이 本來 佛이라는 本來부터 完璧하다는 法身佛을

일깨우는 수행이 된다.

이 世上은 本來가 부처다.
이 宇宙法界 森羅萬像 그 어느것도 부처 아닌 것이 없다.
그 어떤 것도 完全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도 세상도 모두가 完全한 참성품의 나툼이다.
存在도 行爲도 모두가 완전한 부처의 나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存在도 부처요
내가 行動하는 모든 일들 또한 부처의 行動이며
부처의 行動이기에 完全한 行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行動은 물론 앞에서 말했던
‘受(받아들임)’과 ‘放(놓아버림)’ ‘觀(알아차림)’의

함이 없는 수행이 뒷받침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렇게 함이 없는 수행이 되었을 때
우리는 중생으로써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써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 사는 것이다.


세상은 本來 부처라고 말해도 아직은 부처가 아니니 괴롭다고 말하겠지만
괴롭다는 것도 우리들 錯覺이란 말이다.
꿈 속에서 아무리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꿈을 깨고 보면

그 꿈 속의 괴로운 일은 괴로움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이라는 꿈 속에서 우리가 괴롭다고 느끼고 살지만
그 삶의 꿈에서 깨고 보면 본래 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虛想일 뿐.

밧줄을 보고 뱀이라고 놀라 도망쳐 놓고 그 다음 날 밝은 가운데 밧줄이었음을 알게 되면
놀람도 괴로움도 공연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 괴로움을 없애려고 애쓸 것 없다.
괴로움의 對相을 除去하려고 애쓸 理由가 없는 것이다.
공연히 스스로 만들어 낸 괴롭다는 느낌만 놓아버리면 그 뿐.
이와같이 괴로움도 다 虛想일 뿐이다.
이 世上의 모든 일들이며, 存在, 또 境界들 모두 
있는 그대로 完璧한 부처님의 完全한 나툼인 것이다.
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것도 없이 法身佛 그 自體이다.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
어리석기 때문에 밧줄을 뱀으로 錯覺하는 것일 뿐,
本來 이 世上은 완전한 일이 항상 완전하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하는 일도 모두가 완전하고 온전한 부처님이 하는 일이다.
나라는 存在 또한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理由는 ‘나’라는 我相이 자꾸만 介入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부처라고 하는데 애써 ‘나’라고 계속 固執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世上에는 本來 ‘나’란 없다.
무아(無我)가 모든 存在의 本來의 모습이다.
諸法無我 그것이야말로 모든 存在에 대한 진리의 표현이다.
諸法無我를 實踐하며 산다는 것 卽, 眞理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말해 ‘나’(에고)로 살지 않고 ‘부처’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로 살아선 안된다. 내가 산다고 錯覺해서는 안된다.
‘나’라는 我相을 가지고 내 것을 늘려나가려는 ‘我執’에 얽매여 살면 안된다.
‘나’라는 相  내가 살고 있다는 相,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다.

‘나’가 없다면 괴로울 主體가 없기 때문에 괴로울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我相만 버리면 그대로 부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는 없다. 오직 온전한 ‘부처’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일 수 밖에 없다. 

나의 일로 부여잡지 말고, 나의 것으로, 나로 붙잡아 두려 하지 말고,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오직 부처 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 모든 일은 ‘나의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我相으로 살지 않고  全切我, 大我, 眞我, 참나로 사는 것이다.

불(佛), 자성불(自性佛) 이 것이 바로 네 번째 수행인의 자세이다.
이렇게 네 가지 수행만 삶 속에서 지키고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괴로움도 있을 수 없다.

受, 攝受, 받아들임
좋다고 잡지도 않고 싫다고 버리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면,
그렇게 大肯定으로 살면 괴로움울 일이 없다.
變化하는 것을 變化하도록 내버려 두고 認定해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에도 執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 받아들였을 때 業을 녹일 수 있고,
因果應報라는 六途輪廻의 고리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放, 放下着, 놓아버림
變化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執着할 게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한 치라도 집착이 있다면 놓아버려야 한다.
모든 집착을 놓아버린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다 놓아버리고 나면 그저 텅~ 비어 充滿하다.
놓아버렸는데 공연히 무슨 괴로움을 붙잡을 것인가.
놓아버림이 바로 깨달음이다.

觀, 觀照, 알아차림
執着을 놓으려면 다만 바라보면(觀) 된다.
執着하고 있을 때 執着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면 된다.
判斷하지 말고, 分別하지 말고 다만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는 瞬間  執着은 사라진다.
觀은 ‘지금 여기 이 瞬間’에서 온전한 滿足을 가져온다.
觀은  지금 여기 이 瞬間이 온전한 부처님 숨결임을 일깨워준다.

불(佛), 自性佛, 부처님 일
온 宇宙法界 森羅萬像 모두가 부처님(佛/自性佛)의 나툼이다.
나도, 존재도, 경계도, 일도, 모든 것이 온전한 부처님의 숨결이다.
‘나’는 없는 無我인데  我相은 不完全의 시작이며 괴로움의 主體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부처님의 일’로 돌려 놓아야 한다.
그러면 괴로울 것이 없다. 설사 괴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고,
즐거움도 내가 즐거운 게 아니라 부처님이 즐거운 것이니,
좋고 싫음에 걸림이 없어서 自由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수행의 자세를 수행자는 항상 삶 속에서 견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참된 부처님의 지혜를 회복하게 된다.
‘나’로써 어리석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으로써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제행무상을 받아들이고, 제법무아를 받아들이고, 인연과보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다만 지금 여기 이 瞬間에 깨어있을 때, 그러한 깨달음의 瞬間瞬間을 삶 속에서 演習할 때
우리는 조금씩 부처로써 살 수 있게 되고 부처님의 반야지혜를 體得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 내 마음만 밝혀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아주 중요한 하나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했던

‘지혜’와 함께 ‘복덕’을 증장시키는 일이다.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이 두루 圓滿하신 분이다.
智慧와 福德은 ‘귀의불 양족존’에서 보듯이 부처님의 두 가지 성품이다.

앞의 네 가지 수행이 智慧를 증장하는 수행이라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다섯 번째 생활 속의 수행이 바로 福德을 증장하는 실천수행이다.

바로 ‘布施波羅蜜’의 수행이다. 利他的인 베품의 수행이다.
그것은 福德을 증장시키는 수행이며, 慈悲의 수행이다.
베품이 없는 지혜나 지혜가 없는 베품은 모두가 절름발이에 불과하다.
수레의 兩 바퀴가 잘 均衡 잡혀야지만 法輪를 잘 굴릴 수 있듯이
福德과 智慧를 균형되게 고루 實踐해야만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서 그 깨달음을 일체중생에게 回向하지 않으셨다면
다만 한 사람의 이름모를 사람으로 잊혀졌을 것이다.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菩薩의 서원처럼

상구보리가 중요한 만큼 똑같이 하화중생의 대 서원이 꼭 필요한 것이다.

지혜롭기만 하고 자비롭지 않다면 그 지혜는 잘못된 쪽으로 사용될 수 있다.
지혜와 자비는 事實 똑같은 眞理의 다른 表現이다.
온 宇宙法界 森羅萬像이 둘이 아니라는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絶實한 自覺이 智慧라면
그러한 宇宙法界 森羅萬像萬物이 하나라는 眞理를 實踐함이 慈悲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 供養을 베풀 때 자비를 베푼다고 말하지 않는 것 처럼,
온 우주법계 모든 존재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처럼 남이 배고플 때

똑같이 내가 배고픈 것처럼 밥을 주는 것이고,
물론 그러한 베품은 베품이라고 이름할 수 조차 없다.
내가 나에게 밥을 주고 베풀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나와 남이 둘이 아닐 때 아무런 相 없이 베푸는

참된 무주상보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受, 放, 觀, 佛, 施
攝受, 放下着, 觀照, 自性佛, 布施
받아들이고,
놓아버리고,
알아차리고,
‘부처님 일’로 돌려 놓고,
늘상 베푸는 삶을 사는 일이

모든 수행자의 日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의 생활실천법 안에
緣起法의 實踐, 인과응보의 실천, 삼법인의 실천, 無我法의 실천, 空性의 실천, 사성제의 실천,
사념처의 실천, 금강경에서 말하는 我相을 녹이는 실천, 無分別, 無執着, 無所得, 無所有의 實踐을 비롯한 一切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實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물론 이 다섯 가지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방편의 다름일 뿐이다.

생활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
당장 괴로운 경계를 맞아 어떻게 마음을 돌려야 할지,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지,
어떻게 삶을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작은 도움이 될까 하여 다만 다섯가지로 크게 분류하여 놓았을 뿐인 것이다.

18<IMG카페 / 一寸  18<IMG

첨부파일 나무대비관세음.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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