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瞬間의 現在에 '예스' 라고 말하라.
당신이 過去에 行해 온 수많은 잘못들에 대해서
삶의 매 瞬間은
당신은 결코 '잘못'을 하거나,
宇宙法界는, 神은, 붓다는,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瞬間의 모든 것은 당신은 지금 이 瞬間, 당신으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그 事實 그 自體만으로 당신의 삶은 穩全한 眞理이다.
아무런 理由도 없이, 그 무엇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이, 戒律을 지키지 않더라도, 절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神이나 붓다를 섬기지 않더라도, 종교가 없더라도, 직업이 없더라도, 돈이 없더라도, 그 어떤 理由도 다 필요없이, 그저 存在하고 있다는 그 事實 하나 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우며, 每 瞬間 眞理로써 피어나고 있다.
우리의 삶에 失敗란 없다. 失敗처럼 여기지는 삶의 工夫가 있을 지언정, 失敗란 없다.
이 社會에서, 宗敎에서, 法에서, 수없이 조장하고 말해 왔던, '이렇게 살아라'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살아야지만 착한 사람이다' '이 戒律이나 律法을 어기지 말라' '이것을 어기면 地獄에 간다' '이런 行爲를 神은 싫어한다' 라고 말해왔던 그 모든 抑壓과 틀들에서 自由롭게 놓여나라.
그와 같이 나를 制限하고 規定짓고 抑壓하며, 틀에 가두어 두렵게 만들어 왔던, 모든 틀과 抑壓으로부터 自由로와 져라.
自由로와 지는 그것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이다. 다르마(眞理)의 屬性이다.
眞理라는 이름으로, 宗敎라는 이름으로, 어떤 特定한 가르침이나, 律法이라는 틀로 自由를 制限시켜 놓고,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地獄에 간다거나, 最惡의 果報를 받는다고 두려움을 조장해 왔던 그 모든 도그마들를 이제는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그러한 方便에 갇혀서 自由를 抑壓당하며 살아 온 지난 날들을 生覺해 보라.
方便은 自由롭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歷史를 이어오며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方便에 스스로 갇힌 채 方便 뒤에 드넓고도 광활한 自由로운 眞理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
당신이라는 存在 그 自體야말로 참이며 眞理 그 自體다.
다른 그 누구도, 다른 그 어떤 宗敎나 思想이나 哲學에도 기대거나 얽매일 필요는 없다.
거기에서 배울 수는 있을 지언정, 거기에 束縛되어서 自身의 自由를 가두지 말라.
自由를 가르치는 學校에서 自由를 가르치기 위해 學生들을 統制하고 自由롭지 못하게 制限하는 各種의 法則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서 수업을 하며, 그 수업 속에서 自由에 대해 가르친다고 生覺해 보라.
이 學校에서만이 올바른 自由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며, 오직 이 學校에서만이 眞正한 自由를 배울 수 있다고 抑壓하면서, 만약 이 學校를 벗어나게 된다면, 당신은 自由를 박탈당하게 될거라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이제 그런 學校에서 自由롭게 뛰쳐나와야 할 때다.
學校 밖에 眞正한 自由가 있다. 아니, 이미 學校에서 배울 필요도 없이, 나라는 存在 그 自體, 내가 살고 있는 이 宇宙法界라는 存在 自體가 이미 穩全한 眞理의 現顯(현현)이었다.
당신은 그 學校에서 아무리 많이 배운다고 할지라도, 그 學校가 가르쳐 준 도그마에 갇힐 수밖에 없다. 學校에서 배운 그것만이 眞理라고 믿게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事實은 眞理가 없기 때문이다. 固定된 眞理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眞理 그 自體의 眞理는 없다. 다만 나의 眞理만 있을 뿐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모든 것은 自己 規定 自己 制限이기 때문이다. 내가 規定하는 나의 眞理가 있을 뿐, 나의 眞理 그것 自體로써 穩全한 客觀的 眞理는 없다.
'이것이 眞理다'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佛法의 核心 가르침이다.
내가 眞理라고 規定하는 나의 眞理가 있을 따름이다. 方便의 眞理가 있을 따름이다.
그동안 世上에서 이야기 해 온 眞理라는 모든 말들은, 眞理가 아니었다!
붓다 입멸 후 500여 년 경 나가르주나라는 제2의 석가라는 菩薩은, 그러한 事實을 勝義諦, 第一義諦라고 이름함으로써, 말로써는 表現되지 못하는 眞理라고 설했다.
우리가 眞理라고 말하며, 절에서 가르칠 수 있는 眞理는 그저 世俗諦, 卽, 方便의 眞理밖에 없음을 역설하였다.
'낙서금지'라고 벽에 씀으로써 낙서를 금지할 수 있는 方便은 될 수 있지만, 낙서금지라는 그 말 自體가 이미 낙서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方便으로 받아들일지언정, 그 말을 따라서 너도 나도 벽에다 '낙서금지'라고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歷史가 해 온 일, 宗敎와 思想家가 해 온 일 眞理라고 들어온 모든 가르침이 해 온 일이 '낙서금지'라는 말의 덧칠에 불과했다.
이제 낙서금지라는 그 말을 分釋하고, 따라 쓸 것을 生覺하지 말고, 그저 그 텅~ 빈 벽에 어떤 낙서도 하지 말라.
그저 텅~ 빈 채로 있으라. 그저 每 瞬間에 存在하고 있을 뿐, 어떤 方便의 글씨도 쓰려고 하지 말라.
宇宙法界는 붓다는 神은 眞理는 그저 每 瞬間 이렇게 그냥 그러하게 온전히 存在하고 있는 그것이다.
붓다는 그저 每 瞬間 온전히 存在한다. 神은 그저 每 瞬間 온전히 存在하고 있음이다. 붓다는 神은 眞理는 아무런 判斷도 없고, 그 어떤 眞理라고 하는 生覺도 없으며, 그저 그냥 그러하게 온전히 存在함 그 自體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 그저 텅~ 빈 本質만이 남게 될 것이다.
'떠들지 마!'라고 소리치지만, 사실은 그 말 自體도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제 그런 말도 따라하지 말고, 그저 沈默으로 존재하라.
떠들지 않게 하기 위한 그 어떤 말도 어떤 가르침도 그 어떤 思想도 事實은 다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말도 眞理 그 自體일 수는 없다. 소음일 뿐, 眞理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眞理는 없다. 眞理가 없다는 말은 곧 모든 것이 眞理라는 것을 意味한다. 眞理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라는 삶은 그 自體로써 眞理인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어떤 行爲를 하든, 당신의 삶은 하나의 崇高한 眞理이다. 그렇기에 眞理는 없으며, 自己 規定, 自己 眞理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人間은 그 自體로써 옳다. 自己 眞理에서는 언제나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眞理다.
붓다는, 神은, 眞理는,宇宙法界는 우리에게 完全한 自由意志를 賦與해 주었다. 붓다 神 眞理 宇宙法界는 우리 모두를 通해 眞理를 드러낸다. 神은 꽃 한 송이를 通해 眞理로 피어난다.
산과 들과 꽃 한 송이와 당신과 나를 빼고, 그 어디에도 별도의 神이나 붓다가 있다고 生覺지 말라.
아무리 수준이 낮거나, 돈이 없거나, 階級이 낮거나, 能力이 없거나, 性格이 나쁘거나, 罪를 지었을지라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라.
그는 그 어떤 높은 자리에 있는 그 어떤 高貴한 자리에 있는 聖스러운 사람과 티끌 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는 그 自身의 眞理를 꽃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높거나 낮다거나, 잘났거나 못났다거나, 선하거나 악하다는 등의 分別은 無明에 휩싸인 人間만이 하는 差別心일 뿐, 眞理는 그런 것을 모른다.
오직 眞理는, 붓다는, 神은, 宇宙法界는 一切 모든 存在를 完全히 同等하게 사랑하며, 尊貴하게 여기며, 찬탄할 뿐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난 부분에 대해 認定받기를 願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 工夫를 通해 苦痛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는 사실을 結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보다 높지 않고, 낮지도 않으며, 나보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神의 사랑을 더 많이 받거나 적게 받지도 않으며, 더 많이 깨달았거나 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모든 存在는 저마다 穩全한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自己 自身의 眞理의 길을 아름답게 걷고 있는 중이다.
우리 모두는 神이며, 붓다이고, 眞理 그 自體로써 同等하다.
설사 나쁜 짓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그 行爲를 通해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아름답다. 가해자는 가해자의 몫을 通해 깨닫고, 피해자는 피해자의 몫을 通해 깨닫는다. 그 둘은 원한과 복수의 관계가 아닌 서로를 깨닫게 해 주는 아름다운 스승이요, 사랑스런 관계다.
마음 깊은 곳에서 피해 받음을 통해, 핍박 받음을 通해 무언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었던 사람, 혹은 피해 받는 것을 스스로 願했던 사람이 이 世上이라는 演劇 속에서 피해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양쪽 모두는 저마다 自身의 眞理를 行하고 있을 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完全히 容恕받고 있다. 물론 自己 스스로 容恕하지 못하는 경우를 빼고.
처벌이나, 罪의 果報는 언제나 自己 自身이 願했을 때만 온다.
만약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온전히 그 모든 것을 容恕했고, 그 모든 것이 다 完全했음을 理解하게 된다면,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自己 自身을 사랑하고, 理解하고, 容恕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果報도 받을 必要가 없다.
業報는 機械的으로 無條件 받는 것이 아니다. 絶對的인 것이 아니다.
우리 存在의 根源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存在다. 그저 存在하고 있는!
그러니, 더 이상 自己 自身을 抑壓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지도 말라.
당신은 完全히 安心해도 좋다. 이 世上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肉體의 죽음 以後를 걱정하지 말라.
宇宙의 根源은 자비와 사랑의 波長, 그 波長 안에 넘실거릴 뿐이다.
宇宙의 根源 거기에는 악, 두려움, 근심, 걱정, 죄라는 槪念이 붙을 자리가 없다.
지금까지 이 世上에서, 歷史에서, 宗敎에서. 수도 없이 많은 各種의 學校에서 가르쳐 온 모든 것을 넘어 설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넘어 自己 自身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지금 이 瞬間이라는 온전히 存在함, 그저 그러하게 '있음'으로 每 瞬間에 있는 것이다.
오로지 每 瞬間에 幸福하게 存在하고 있으라. 完全히 安心한 채, 두려워할 것 하나 없이, 每 瞬間 自己 自身으로 存在하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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