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시대의 멘토 법륜 스님에게 길을 묻다

장백산-1 2013. 12. 2. 00:01

 

 

 

 

우리 시대의 멘토 법륜 스님에게 묻다

한겨레신문 [토요판] 커버스토리 / 법륜 스님 인터뷰 곽병찬 대기자  2013.11.29  

 

 

 

 

“모순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사회는 발전하고, 저항력이 사라지면 사회도 정체하고 낙후하게 된다.” 26일 서울 서초동 평화재단에서 만난 법륜 스님은 변화를 원한다면 생각과 행동을 달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과 <한겨레> 곽병찬 대기자(왼쪽), 최우리 기자.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스님은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답을 일러줍니다. 알 수 없는 미래, 답답한 현실 때문에 법륜 스님에게서 답을 구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스님 말씀대로 어지러운 내 마음이 편해지면 세상의 모든 고민은 사라지는 건가요. 이 세상은 정말 선한 의지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걸까요. 스님의 이야기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지금 우리는 스님에게서 무엇을 구하려는 걸까요.

 

 

“통일시대 열겠다던 박근혜 대통령, 원칙 버렸다”

 

26일 아침 8시 서울 서초동 평화재단 사무실에 헐레벌떡 들어서더니,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섰다. 전날 광주에서 네 종류의 행사를 가졌고, 이날도 그만큼의 일정과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문즉설, 토크쇼, 간담회 등. 보는 사람이 숨찼다. 1.5평 정도의 접견실 한쪽 벽면은 책들로 빼곡하고, 잘 보이는 곳에 <신동엽 전집>이 꽂혀 있다. 197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삶의 한 푯대가 되었던 시인 신동엽. 스님은 장시 ‘금강’의 가장 대중적인 시편 하나를 읊는다. “껍데기는 가라…”. 그건 일반인에겐 알려지지 않은 긴 공백의 세월을 넌지시 일러주는 은유 같았다.  

 

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사미계를 받은 게 1969년, 보통 2~3년 뒤 받는 구족계를 받아 공인된 승적을 갖게 된 것은 1991년. 수행공동체 ‘정토회’를 세상에 알린 게 1988년이었으니, 20년 가까이 수행자로서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간단히 ‘보림 중이었다’면서도 “사실 그때가 지금 하는 일의 근원이 되긴 했지…”라고 말을 아꼈다.  

 

사미계를 받고 2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온갖 모색을 했다.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유신 말기엔 체포당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속가의 형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었다. 1980년대 불교 운동권에선 ‘최석호 법사’로 유명했다. 청소년이나 대학생 불자회를 지도하고, 작고한 여익구씨 등과 불교계 사회운동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법륜 스님’보다 더 유명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러면 스님 이름으로 책이 출간됐다 하면 단번에 30만권 이상씩 팔리는 지금의 명성과 격이 같겠는가.  

 

어느 날 시험공부 때문에 부랴부랴 도서관을 가려는데 도문 스님이 이렇게 물었다. ‘어디 가느냐.’ ‘도서관 갑니다.’ ‘뭐 하려고?’ ‘시험공부 하려고요.’ ‘시험 잘 치르면?’ ‘가고 싶은 대학 가려고요.’ ‘대학 가서는?’ ‘…’ ‘결국 죽으러 가는 건데, 뭐가 그리 바쁜가.’ 그때 문득 깨치는 바가 있어 머리를 깎고 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흔히 말하는 ‘이 세상이 싫다’ 그런 이유에서 출가한 것과는 무관했지요. 스승님(도문 큰스님)께선 애초 저에게 첫째 경주 최씨이니 최제우 선생의 그 뜻과 정신을 계승하라, 둘째 독립운동가 용성 조사의 유업을 계승하는 민족지도자의 역할을 하라고 하셨지요.

 

 

임원과 노동자의 평균급여 차
사회적 합의로 줄여야 합니다

 

안되면 미국처럼 부자들이
재산 환원하는 풍토 조성하든가
10배 이상 격차 벌어져선 안돼요

 

 

운동한다는 학생들은 게을렀다 

 

-그런데 2년 만에 다시 사회로 나왔습니다.

 

=복지으라고 하셨지요. 20대, 그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의 정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정의에 무관심한 불교계에 좌절감을 많이 느꼈죠. 그렇다고 딴 길을 간 건 아닙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 대학생들과 자주 접했는데, 운동한다는 학생들의 삶의 자세가 불만스러웠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무엇보다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이, 체제를 유지하는 고등고시 준비하는 사람보다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서 학생들을 만나면 품성론을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학생운동권에 엔엘(NL)계열의 품성론이 강조되던 때와 일치하는군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변혁운동을 하려면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하는데, 분단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으면 얼치기로 끝납니다. 왜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식민 치하에서의 독립운동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분단에 이르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불교운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머니 보살들도 지지하는 대중운동이 되야 하고, 그러자면 불교적 사상이나 문화적 기반 위에 그리고 실천적 삶이 든든해야 하는데, 불교 이름만 붙이고 활동해서는 안되지요. 머리 깎은 걸로 모양으로만 행세 하면 어떤 신도가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연초 스님은 크게 3가지 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개인을 치유하고 사회를 치유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자. 이 가운데 개인의 치유는 욕망을 어떻게 내려놓느냐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욕망 자극을 통해 굴러가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욕망 이전에 욕구란 게 있습니다. 생명체라면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 욕구가 지나쳤을 때 욕망이 되고, 욕망이 지나치면 탐욕이 됩니다. 욕구엔 생존욕와 종족번식욕이 있습니다. 닭은 침입자가 오면 도망갑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죠. 그러나 어미닭은 병아리를 품고 침입자에게 덤빕니다. 종족보존의 욕구가 발동되는 겁니다. 두 가지 욕구는 생명 현상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욕구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건 욕구와는 차원이 다른 생물학적 본능 아닌가요?  

 

=예, 생명의 본능입니다. 생명이 유지되려면 두 가지 본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욕구는 욕망이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육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신작용에서 나옵니다. 정신작용에는 좋은 작용과 나쁜 작용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배 고픈 돼지는 먹을 때 다른 돼지를 밀쳐냅니다. 절대 나눠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배 고파도 다른 사람과 나눠먹을 수 있죠. 이것을 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물은 배가 부르면, 다른 동물이 남은 음식을 와서 먹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남은 음식을 창고에 넣어두고 굶어 죽는 사람을 보고도 안 내놓습니다. 이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이때 흔히 ‘짐승 같은 놈’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는 짐승만도 못하죠. 욕망이란 자신의 욕구가 타인의 생존을 해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나의 이익이 남의 이익을 해칠때 이를 욕망이라 그러죠. 그러면 욕망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절제해야죠. 욕망보다 더 나아가면 소위 탐욕이 되는데, 그건 타인만 해치는 게 아니라 자신도 해칩니다. 그때는 절제가 아니라 버려야 합니다.  

 

-사회 구조가 욕망을 자극하고, 탐욕을 부추기는데 쉽게 절제하고, 버릴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혼자서 사냥을 하면 토끼 한 마리를 잡는데, 둘이서 협력하면 세 마리, 셋이서 협력하면 다섯 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합시다. 협력하면 생산이 증가되는 거죠. 문제는 분배입니다. 이때 한 사람이 두 마리를 가지려는 건 욕망이고, 세 마리를 갖겠다고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은 협력도 공동체도 파괴하는 만큼 결국 본인에게도 손해가 됩니다. 한 마리를 갖는것은 욕망이 아니라 기본권리입니다. 기본은 보장하면서, 각자의 기여도에 따라 조금씩 더 혹은 덜 가져가게 해야 합니다. 즉 탐욕은 없애고 욕망은 절제하도록 하고 기본은 보장하는 것, 그것이 사회의 활력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가 아니죠.  

 

-기본을 정하는 게 쉽겠습니까. 최저임금을 정하는데, 기업가와 노동자 사이에 한번도 합의가 이뤄진 적이 없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혼자 일했을 때 얻는 만큼은 언제나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불의입니다. 그런 제도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아등바등 경쟁해 더 좋은집
종노릇한다면 세상은 안 바뀝니다
신분제 철폐에 힘 모아야지요

 

불이익 당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세상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버는 돈은 순전히 내가 번 돈인가   

 

-요즘 임원과 노동자의 평균 급여가 수십 배 차이가 납니다. 과거엔 4~5배에 불과했습니다. 격차는 갈수록 커지죠. 구성원의 상승 욕망을 자극해 경쟁을 강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는 계산이죠. 사회도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이고 보면, 기본은 정하는데는 원칙이 없어 보입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격차를 줄이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면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을 통해 재분배를 강화해야죠. 최고 소득세율이 70%에 이르는 나라도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안 되면 미국처럼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할 겁니다. 격차가 수십배로 벌어져선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선 최소세율을 2~3% 더 올리는 것도 안 되고 있습니다. 캠페인은 많지만 기부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요. 합의 자발성 등 선한 의지만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버는 돈이 순전히 내 힘만으로 버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버는 것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혼자서 1마리 잡는데, 둘이서 세 마리를 잡았다면, 1마리는 무조건 각자에게 나누고, 더 확보된 것은 기여도에 따라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이, 노인, 환자나 장애인, 재난을 당한 사람 등은 우선 보호해야 할 겁니다.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그런 인간적인 원칙보다는 욕망의 원칙이 통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갈등이 커지고 있고요. 같은 생산라인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데 임금이 두배 세배 차이 나고,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기업이 수두룩 하고요.  

 

=당장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거나, 화를 내면서 충돌하는 건 적절치 않습니다.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고 시간을 두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선악이나 옳고 그름 차원에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 가진 걸 내놓기 싫어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런 심정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베풀지 못한 걸 후회하는 것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합의와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설득, 조정, 타협의 노력이 필요한 거죠.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손해라는 걸 인식시켜야 합니다. 다른 한편에선 사회적 강제도 필요합니다.  

 

-진보적인 정부에서도 사회적 강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죠.  

 

=국민의 의식이 바뀌는 게 먼저입니다. 민주사회에서의 강제는 국민의 의사, 즉 투표에 의해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는 방법을 통해서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편에선 상승욕 즉 탐욕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으로 추락의 공포를 주입하는 그런 구조를 놔둔채 개인에게 욕망,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하는게 공허해 보여 묻는 것입니다.  

 

=신분사회에서도 뉘집 종이냐에 따라 삶의 수준이 달랐습니다. 아등바등 경쟁해서 더 좋은 집 종 노릇하려 한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종의 신분제를 철폐하는데 힘을 모아야지요. 지금도 모든 사람이 대기업 노동자가 되겠다, 고시를 치르겠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경쟁합니다. 취직하면 동료를 밟고 올라가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세상을 바꿔주지 않습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죠.  

 

=성장주의 물신주의에 지금 종교도 그런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사회가 부정의하면 이런 신앙이 확산되기 마련입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사회정의 실현에 젊은이들이 앞장섰지만, 지금은 각자가 그 체계 속에 안착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불이익과 소외가 사회적 문제인데도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도 하고요.  

 

=먹고 사는 것이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안정된 직책의 노예는 해방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데도 별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지금은 경제구조나 사회 시스템이 너무 거대해져 개인이 저항하기엔 너무 막막하지요. 기득권 구조가 확고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모순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사회는 발전하지만, 저항력이 사라지면 사회도 정체하고 낙후하게 됩니다.  

 

-스님은 지금 여기, 당장 행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회가 이런데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성폭행 당한 여성이 있다고 합시다. 가해자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해자를 처벌한다고 이 여인의 아픔이 치유되는 건 아닙니다. 당장 먼저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스스로 불행한 기억을 치유해야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내 손을 부러트렸다면, 복수부터 꿈꿀 게 아니라, 치료부터 받아야 합니다. 처벌한다고 팔이 낫는 건 아니죠. 처벌은 치료와는 별개지요.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게 먼저죠. 당장 제도를 혁파할 수 없다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또 개인의 상처가 치유돼야만, 잘못된 제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불평 불만 속에서는 불행만 깊어지고, 변화의 힘도 나오지 않습니다. 먼저 개인을 치유하고, 치유된 사람들이 손을 잡고 사회 정의 실현에 나서야 하는 거죠.  

 

 

안철수 신당’에 대한 생각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치유해야 할 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문제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언제나 부딪치는 게 분단 문제입니다. 그 앞에서 진보를 위한 노력은 항상 주저앉게 됩니다. 분단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사상의 자유,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도 왜곡없이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남한 사회는 물론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연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는 대북 문제가 거의 미국의 의도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점차 우리 주도권이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미·중 사이의 경쟁 때문에 남북이 선택할 수 있는 재량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죠.  

 

=세계적으로 보면 지금 세력 판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이 조금씩 쇠퇴하고, 중국이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을 재무장시켜 중국을 견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요구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 국방장관이 청와대까지 와서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죠. 그러나 과거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선 어려운 일입니다. 중국은 중국 나름으로 한국이 미· 일 군사협력체제에 끼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있죠. 박근혜 대통령을 극진히 예우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안보의 면에서는 미국,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매우 어려운 처지입니다. 이런 처지는 우리가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들어 한· 일군사협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앞으로 한·미·일의 군사위협 때문에 어쩔수 없이 중국에 더욱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북은 더욱 멀어지게 되겠죠. 만약 남북관계가 원만하다면, 미국이 한·일 군사협력을 강요할 수도 없고, 북한도 중국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것입니다. 남북간의 긴장과 대결이 동아시아에서 미·중 또는 일·중의 경쟁 구도 속에서 남북한을 하위변수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남북이 협력하고 통일로 간다면, 한반도는 긴장지대가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지대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북긴장은 국내 정치적으로 집권 보수세력에게 자신의 입지 강화에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이 미흡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의 위험한 구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는 일입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한· 미· 중 협력체제를 구축하더라도, 인도적 지원이나 민간 교류를 통해서 긴장을 완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선 방향이 덜 잡힌 것 같아요.   

 

-방향이 덜 잡힌 게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한 건 아닌가요.  

 

=안목이 부족한 탓일 겁니다. 북의 행동에 대한 ‘괘씸한’ 감정, 여기에 국내 정치적 이해가 겹쳐 있는 것 같습니다. 소탐대실의 전형이죠. 이제 일본은 미국과의 든든한 관계를 업고, 한국민에게 함부로 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범법자라느니, 경제제재만 하면 삼성 같은 거 금방 망한다느니. 중국 역시 극진히 예우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이어도를 자신의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켰습니다. 결국 지도층의 불투명한 국가관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집권하는지는 중요한 건 아니고, 분단 문제 극복을 최대의 민족적 과제로 인식하고 남북갈등을 풀어나가야 하는데, 그런 정치세력이 형성됐으면 좋겠다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죠.  

 

-그래서 지난 해 정치에 간여했던 건 아닌지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단일화가 잘못돼 질 수밖에 없었다’고 서운한 감정을 표현했었죠. 안철수 의원이 신당 창당에 나섰습니다. 안 의원을 그런 국가적 민족적 과제를 풀어갈 수 있는 인물로 보시나요?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십시요. 기존 정치세력에 실망한 국민의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여망이 ‘안철수 바람’을 일으킨거지, 안철수의원 개인의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 여망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건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을 수렴할만한 능력이 안 됐기 때문이겠죠. 원래 자질이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질 건 아닙니다. 신당도 창당이 능사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만드는 건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국가관이 분명한 사람들인가, 진실로 새로운 시스템을 가질 것인가 따위가 정리돼야죠. 그냥 만든다면 당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지, 새로운 정치세력은 아니잖아요. 그건 지켜봐야겠죠. 누구든지 통일을 지향한다고 하면 누구에게든 조언을 할 겁니다.  

 

 

생각 다르다고 종북으로 몰아서는 안돼   

 

-상황은 중차대한데, 정부는 국정원 문제를 우격다짐으로 해결하려다 남북관계는 물론 국내 정치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통일시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원칙 있는 대북정책, 창조경제 등을 내세웠지요. 말은 좋았지만, 지금 현실은 반대로 간다고 할 수 있어요. 원칙을 버린 것 같이 보이네요. 또 법치와 법질서 확립을 강조했죠. 그런데 정부 출범할 때부터 대통령이 정부조직법이 개정되기도 전에 관료를 임명하는 등 법을 어겼습니다. 지도자는 엄격히 헌법과 법을 지키고 국민은 조금 어겨도 봐줘야, 그래야 정치가 제대로 되는데, 반대입니다. 국정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박 대통령이 보고 받은 적도 없고 지시한 적도 없다고 한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한 기관이 정치적 중립의 의무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다면, 범법 행위에 대해 진상을 소상히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그 다음에 재발 방지 조처를 위하고, 정부를 대표해서 누가 사과할 것인지 정해서 사과하면 됩니다. 또 국정원 문제의 진상 규명에서 의심받을 가능성이 있으면, 그런 의심이 들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정치적 논란이나 정쟁으로 비화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헌법과 법이 규정한 원칙에 따라 처리하면 됐습니다.  

 

-조처에는 특별검사도 포함되나요.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고, 여야 합의로 할 일입니다.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보장하는 선에서 검찰에 맡길 수도 있고, 중립 보장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없다면 새 시스템을 도입해야겠지요. 여야 합의로.  

 

-합의가 될까요? 이미 여당은 특검제 반대를 거듭 천명했는데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다수는 소수의 의견을 수용해주는 방식으로 풀어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과 힘 없는 사람이 다툴 때, 약자가 수용하면 굴복이 되지만, 강자가 수용하면 포용이 됩니다. 포용이 되어야 통합이 되지, 굴복하게 되면 또 저항이 일어납니다. 여당이 야당을 포용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이 정부에 대해 그동안 여러 자리에서 통합적 화쟁 리더십을 기대하고 주문했습니다. 지난 1년 가까이 지켜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가능할까요?  

 

=불가능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가능성의 정도가 낮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진보와 보수의 과도한 갈등을 우려해왔습니다. 지금 사회적 분열이 진보, 보수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옳고 그름의 문제일까요.  

 

=진보라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에 침묵할 순 없고, 보수라면 민종공동체 회복 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진정한 보수세력이라면 민족 통일을 위해 북쪽의 현실적 권력을 인정하고 가야한다고 봅니다. 지금 종북 몰이가 한참인데, 생각이 틀리다고 그런 식으로 몰아서 매도해선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보쪽도 다른 의견을 반통일세력이니 반민족주의니 몰아서도 안 됩니다. 국민은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고, 대통령은 나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이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알아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인재를 등용할때도 불편부당해야 하고 지지하지 않았다고 어떤 불이익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국민통합이 이루어 집니다. 만약 내가 지지하지 않았다고 선거결과를 부정하고 나를 지지해 주지 않았다고 불이익을 준다면 국민분열만 가져올 뿐입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경쟁은 공정히 하고 결과에는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마다 정치권에선 중도를 표방한 정치세력이 등장합니다. 대개 애매한 중간 지대에 머물다 사라졌죠.  

 

=불가에선 중도가 정도입니다.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처럼, 중도를 일률적으로 중간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양극단을 배제하고, 독단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정신을 지향하는 것을 두고 중도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선악, 시비까지도 지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려말 승려 신돈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개혁가라고도 하고, 권력이나 탐하는 권승이라고도 합니다. 혹자는 스님을 그런 신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겠다는 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에겐 생각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규제할 수 없죠. 다만 내 안에 그런 요소가 있는가 살피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하겠죠. 

 

 

‘왜 그리 바쁘게 사는가’라는 스승의 물음에 깨치는 바 있어 출가했다는 스님이지만,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게 산다. 하다못해 질문도 끝까지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답은 어느 현안이나 논문 한 편 분량의 준비된 답변이 나온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법복도 손에 든 채 뛰쳐나갔다. 국회에 일정이 있다고 했다. 국회…. 도문 스님을 흉내 내 묻고 싶었다. 어디로 그리 바삐 가십니까?

 

다음은 8세기 중국의 고승 대주 혜해선사와 한 제자의 문답. “불법을 어떻게 공부하십니까.” “배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잔다네.” “남들이 다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까? 밥 먹으면서 온갖 삿된 것 다 따지고, 잠자면서 온갖 생각 다 일으키지 않는가.” “무엇이 삿된 것이고 무엇이 바른 것입니까.” “마음이 물건을 좇으면 삿되고, 물건이 마음을 좇으면 바른 걸세.”

 

인터뷰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정리 최우리 기자

 

 

법륜스님 - 정토회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