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선어록(禪語錄)
14. 부처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달마의 悟性論6-三身) 『부처들은 세 가지 몸(三身)을 갖고 있다. 그 세가지는 응신(應身), 보신(報身), 법신(法身)이다. 應身은 現身 또는 化身 이라고도 부른다. 現身은 중생이 善行을 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낸다. 報身은 중생이 智慧를 쌓을 때, 그리고 法身은 중생이 崇高한 것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
그러나 實際로 부처들은 세 가지 몸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세 가지의 몸이란 사람들의 理解를 돕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理解力은 얕을 수도 있고, 중간일 수도 있으며, 깊을 수도 있다.
이해력이 얕은 사람은 자기가 福을 쌓는 다고 想像하면서 現身을 부처로 錯覺한다. 중간 정도 이해력을 가진 자는 자기가 苦痛의 終止符를 찍었다고 想像하면서 報身을 부처로 錯覺한다. 그리고 이해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이 佛性을 體驗하고 있다고 想像하면서 法身을 부처로 錯覺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은 자신의 內面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에도 迷惑되지 않는다. 無心이 곧 부처이기에, 그들은 마음을 通하지 않고 곧바로 부처를 이해한다.』의 해설
事實上 부처는 단 하나의 몸도 갖고 있지 않다. 부처란 純粹한 虛空이다. 純粹한 虛空은 아무런 限界도 없는 純粹한 하늘이다. 이 無限함은 오직 부처가 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現身者가 自身의 存在를 잊는 瞬間 '나'라는 生覺이 그의 內面에서 일어나지 않는 瞬間, 그는 부처가 어떤 몸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부처가 아무도 아닌 存在임을, 부처는 純粹한 沈默이며 텅~비어 있음이고 完全한 제로임을. .
『各 個人이 業을 만든다. 業이 各 個人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직 完全한 사람만이 이 生에서 어떤 業도 짓지 않고 또 그것의 果報도 받지 않는다. 그대가 業을 지을 때 그대는 그 業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 그대가 業을 짓지 않을 때 그대는 業과 함께 사라진다.』의 해설
行爲에는 두 가지 形態가 있다. 하나는 反作用이고 또 하나는 反應이다. 누군가가 그대를 辱한다. 그대는 화가 난다. 그는 그대의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사실 그는 主人이고 그대는 奴隸처럼 行動한다. 그가 그대 안에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그가 그대를 조종하고 있고, 그대는 조종을 당하고 있다. 누군가 그대를 辱하면 그대는 卽時 過去의 經驗한 情報에 따라 反作用을 한다. 이 反作用이 바로 業이다. 그것은 그대를 묶는 힘이고, 그것은 그대를 묶는 사슬을 낳는다.
그러나 反應은 反作用과는 全的으로 다른 것이다. 反應은 다른 사람에 依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대를 辱하고 비난한다. 그대는 그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그저 듣기만 할뿐이다. 그가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그것은 그 瞬間의 내 關心事가 아니다. 그대는 즉각적인 反作用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그대는 하나의 거울처럼 그대의 깨어 있음으로 그가 말하는 것, 그가 행동하는 것들을 비춘다. 그리고 그 거울 같은 冥想 속에서, 現在 속에서, 過去의 經驗이 아닌 그 瞬間에 깨어있음으로부터 어떤 反應이 나온다. 만약 그대가 고요히 듣는다면 그가 辱을 한다해도 그것에 대해 화를 낼 理由가 없다.
그의 말은 옳든지 틀리든지 둘 중 하나다. 그의 말이 옳다면 그대는 그에게 感謝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 自身을 바꾸면 된다. 혹은 그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면 그대는 단순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들었지만 그것은 事實이 아닙니다. 事實이 아닌 말에 대해서 왜 내가 反應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나는 事實이 아닌 말에 氣分 나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그의 말에 더 이상 神經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의 問題지 그대의 問題가 아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무슨 行動을 하든지 물들지 않는다. 그의 行動은 反作用이 아니라 反應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처럼 어떤 判斷도 介入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純粹하게 비춘다. 그것은 過去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現在 意識으로부터 나온다. 그대의 過去 經驗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를 묶는 사슬이 된다.
어떻게 하면 人間의 行動이 스스로에게 束縛되지 않는 境地에 이를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人間의 行動이 또 다른 生을 낳는 原因/業因이 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行動함이 없이 行動할 수 있는 意識이 誕生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의 存在가 아무 것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들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대는 그대 行動의 産物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行動보다 훨씬 偉大하다. 좋은 行動이든 나쁜 行動이든 그대는 行動과는 次元이 다르며, 모든 것을 變化시키는 것도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만약 누군가 그대를 解放시킬 수 있다면, 反對로 그대를 生과 死의 輪廻의 수레바퀴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대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救世主를 믿는 모든 宗敎는 人間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그것들은 各 個人의 自由와 尊嚴性과 自負心을 앗아가 버린다. 地獄은 不幸이고 天國은 幸福이다. 그러나 幸福도 一定 期間이 지나면 지겨워진다. 그대는 얼마나 오랫동안 幸福을 持續할 수 있겠는가? 西洋의 宗敎 指導者들은 그 누구도 그것에 對해 生覺해보지 않았다.
『聖人의 가르침을 理解하는 사람은 聖人이다. 衆生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衆生이다. 중생의 가르침을 抛棄하고 聖人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聖人이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世上 사람들은 聖人을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의 해설
佛像은 그대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부처는 危險하다. 그와 만나는 것은 끊임없는 冒驗의 連續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대가 사라져 버리는 目的地를 向해 그대를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存在할 것이지만 하나의 에고로서가 아니라 純粹한 意識으로서 存在할 것이다. 가까이 가는 것은 危險하기 때문에 世上 사람들은 멀리서 우러러보기만 한다. 그들은 그대를 變化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變化되기를 원치 않는다. 世上에서 가장 큰 勇氣란 自身의 存在를 衆生에서 不滅의 存在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經에 이르기를 "모든 겉모습이 겉모습이 아님을 알 때 그대는 如來를 아는 것이다. 眞理에 이르는 數千 數萬의 門들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의 겉모습들이 虛空처럼 透明해질 때 그것들은 사라진다. 衆生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염려한다. 그들은 배가 부를 때 배고픔을 염려한다. 그들의 삶에 確實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聖人은 過去를 生覺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未來를 念慮하지도 않는다. 또한 現在에 執着하지도 않는다. 瞬間에서 瞬間으로 그들은 道의 길을 따른다.』의 해설
마음이 그 모든 幻想과 꿈과 思念과 妄想들을 데리고 멀리 사라지는 瞬間 그대는 自身 안에서 하나의 깨어남을 發見할 것이다. 그것을 부처라 부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단지 槪念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分明하다. 그대의 마음이 사라지는 瞬間, 神性한 어떤 것이 그대 안에 나타난다. 그것은 무성한 잎과 무수한 꽃, 수많은 열매를 가진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過去는 지나가 버려 더 이상 存在하지 않고, 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現在는 每瞬間瞬間 쉬지않고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흘러감에 執着할 理由가 무엇인가? 完全한 깨어 있음과 自然性 속에서, 瞬間에서 瞬間으로 그들은 기쁨과 平和와 沈默의 삶을 살아간다. 서서히 그들의 沈默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理解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깨어 있음이 絶頂에 이를수록, 每瞬間이 그들에게는 樂園이다. 그때 그들은 구름 너머의 어딘가에 있는 樂園 같은 것은 生覺하지도 않는다. 그때 樂園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때 樂園은 지금 여기 이 瞬間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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