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깨달음에 대한 오해와 진실
어떤 一念 修行者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말을 반복하자. 옆에 함께 사는 사람이
'내가 나지 누구야' 라며 빈정거린다는 말은 간혹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누구나 그렇게 生覺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다.' '나는 누구인가' 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사실이다.
전생에 그런 책을 본적이 있다. 책의 제목이 '나는 누구인가' 였다.
표지에는 불품 없는 노인네의 사진이 있었다. 라마나 마하리쉬'였다.
살아있는 동안에. 죽기전에 꼭 해야만 할 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죽을 때 죽더라도 '나'라도 알고 죽어야겠다는 뜻밖의 할 일이 생겼다.
수억겁 전생에 한번도 生覺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 내가 나라도 알고 죽는다면 무슨 餘恨이 있겠는가? 였다.
'道' 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 봤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 했다.
'부처, 道, 깨달음... 등의 말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 했다.
내 인생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억겁 전생. 불교, 기독교, 천주교... 잠시 경험했었다.
단학선원이라는 곳에서의 몇 달동안에. '육체는 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방식에 바탕을 둔 단전호흡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강남역 주변에서 ' 道를 아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이 짜증스러웠다. 모두 관심 밖의 일들.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일 쯤으로 여겼다. 인생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 후 언젠가.
'어. 육체가 나라는 生覺일 뿐' 이라는 生覺. 그 한生覺이 일어나기 까지는 '내가 나가 아닐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육체가 나다'는 生覺도 하나의 生覺일 뿐이며,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生覺 또한 하나의
生覺일 뿐이라는 生覺. 그 生覺이 나를 비롯한 宇宙萬物에 대한 모든 疑心의 根源地였다. 그리고
그 生覺들 또한 事實的인 것이 아니라, 말, 말, 말들로 創造된 것들일 뿐, 虛構的인 것이었다.
言語로 表現되는 모든 것들은 事實的인 것이 아니라, 虛構的인 것들이다.
사실. '나는 나다'는 말이나, '나는 사람이다'는 말은 事實的인 말이 아니라 虛構的인 말이다. 귀신이 있다는 말도 虛構的인 말이며, 귀신이 없다는 말도 虛構的인 말이다. 어린아이시절부터 他人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事實的으로 여기는 것이다. 말을 배우지 않았다면, '나'라는 것은 없다. '귀신'이라는 것도 없다. 마음이라는 것 또한 本來 없던 것이다. 단지 하나의 生覺, 生覺, 生覺들... 그것들에 대해서 어떤 것은 事實的으로 여기는 것이며, 어떤 것은 事實的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앞편에서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입장에 대해서 설며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런방식으로 말을 배웠지만, 경험에 바탕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經驗以前의 生覺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 事實的으로 여기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과 相對的이며, '너가 있다'는 말과도 相對的인 말이다.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과 相對的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한글을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理海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生覺의 理致와 屬性 ,즉 '生覺의 原理'에 대해서 理解 하기 위해서는 一念法, 一念冥想法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만 自身의 삶에 있어서 큰 利益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佛經에는 '以陀羅尼 無盡寶' 라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經을 많이 읽으면 많이 읽는만큼 無窮無盡한 寶物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석가모니의 말이 우상숭배사상으로 歪曲되면서 창조된 헛소리들이다. 모든 경전들이 그런 방식으로 人間들을 洗腦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다. 언술이 뛰어난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妄想이다.
사실 깨달음이란 '일념법'에 대한 설명과 같은 방법으로써 일념의 無念處에서 '나가 나가 아님'에 대해서 事實을 事實 그대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며, '無意識. 潛在意識'을 보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의 紀元이라는 事實에 대해서 事實을 事實 그대로 아는 앎이다.
어차피 경험에 바탕을 둔 思考方式으로써는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하지만 이젠 달리 生覺해 볼 수 있다. 經驗以前의 思考에 대해서 記憶할 수는 없으나,
이런 말들로써 知的으로나마 理解는 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生覺해 볼 수도 있다.
가령. 왜 나는 꼭 나라야만 하는가?
왜, 나는 나가 아닐 수 없는가?
'나'와 '너' 는 相對的인데, 相對的인 말인데, 왜 우리는 '나와 너'라는 分別로써 서로를 나처럼
사랑할 수 없는가. 왜, 우리는 眞實로 疎通될 수 없는가. 왜 우리는 平和로울 수 없는가.
그렇다.
思考方式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誤謬 때문이다. 事實的이 아닌 말, 말, 말에 그렇게 洗腦당한 것 뿐이다. 相對的인 말, 말, 말에 그렇게 洗腦당한 것 뿐이다. 二元性, 多樣性에 洗腦 당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나다'는 방식으로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에... 그런 思考方式으로 洗腦당한 것이다.
이런 말들.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들이다.
하지만, 인류가 平和롭기 위해서는 이런 말들을 이해 해야만 하며, 더 나아가 교육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인간세상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현세상에는 오직 나의 말만이 진실된 말이다.
수천년 전부터 經典이라는 이름으로 傳해져 오는 말들 중에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남겨진 말들에는 이와 같은 뜻이 包含되어 있다. 그들 또한 그들이 存在하던 時代의 狀況과 條件에 따른 가장 普遍的인 言語로써 이런 말을 傳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의 말은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으뜸 가르침'으로써의 '종교'인 것이다.
그대와 人類의 自由와 平和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중요한 말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이런 글들에 대한 知的 理解로써 自身의 삶에 어떤 이득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며,
둘은 일념을 증득하였을때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대체 '무궁무진한 보물'이라는 뜻의 '以陀羅尼 無盡寶'라는 말은 어떤 緣由에 의해서 생겨난 말인지.
그 이유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해도 상관 없는 일이다.
그 이전에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등산로를 걷는 사람들이 있다. 산을 즐기는 사람들의 생각과, 산을 싫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건강을 위해서 걷는 사람들의 생각과, 돈을 벌기 위해서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하는 사람의 생각과 일념수행을 위해서 걷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같은 길을 가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인간의 삶 또한 이와 같다는 뜻이다. 일념이 무르익어 깊어진 사람들에게는 힘들다는 생각도 없으며, 괴롭다는 생각도 없으며, 사념이 없는 시간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없음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그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기쁜마음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또한 깊이 잠듦과 같은, 유사한 '생각의 휴식'으로써 진정한 정신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한 생각의 차이지만, 그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삶이 기쁨일 수도 있으며, 삶이 고통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人間들의 모든 生覺은 思念이다. 그 思念들을 自身 스스로 統制할 수 없기 때문에
苦痛을 苦痛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生覺들은. 사사로운 生覺들일 뿐, 가치 없는 生覺들이라는 뜻이며, 생각은 인간 삶의
고통의 主要 原因이다. 根據가 없는 앎에 바탕을 둔 生覺들이기 때문이며, 事實的인 앎에 바탕을 둔
生覺들이 아니라, 모두 分別된 生覺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고통은 相對的인 말이다. 그렇다면, 한 生覺 바꿀 수 있다면... 恒常 즐거움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며, 즐거움만 지속된다면... 苦痛이라는 말이 필요치 않은 말이며, 즐거움이라는 말 또한
相對的인 말이기 때문에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相對的인 言語를 超越한 '고요함의 境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불교의 '극락왕생'이라는 말이나 기독교의 '하늘나라'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육체가 나다'는 말이나,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말은 상반된 말, 相對的인 말이며, 한生覺의 差異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나다'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옳지 않은 말이며,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런
말에 대해서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을 뿐, 다른 이견이 있을 수는 없는 올바른 말이다.
이곳 카페의 모든 말들이 이와 같이 논리적인 말이며, 참된 이치이며, 진실된 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상에는 오직 나의 말만이 진실된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말이 그렇듯이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그러하다. '내가 사람이다'는 말은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며, 한 생각의 차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논리적으로도 옳지 않은 주장이며, 분별이며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에 허구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든 주장들에 대해서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이런 말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한다는 것은 그대의 삶, 인생에 크나큰 이익이 따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첫째, 自身의 마음이 事實的인 것이 아니라 虛構的이라는 事實에 대해서 事實을 事實 그대로 理解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이해란, 타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타인들의 모든 말들이 分別로 이루어진 말들이며, 根據 없는 主張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만이 진실된 앎이며, 가치 있는 앎인 것이다.
'내가 나다'는 말이 根據가 없는 말, 말, 말이듯이 사람들의 모든 주장들이 根據 없는 낭설, 풍문들일 뿐 事實的인 것이 아니라고 이해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방랑자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근심걱정 해야 할 일이 없으며,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現實이 地獄이라면, 그런 앎에 대해서 天國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예수'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예수의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오래 참고 忍耐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生覺한다. 아니다. 오래참고 인내하다 보면, 여인들의 '홧병'이라는 말과 같은 心臟病을 앓게 되는 원인이 되며, 스트레스에 의해서 수많은 疾病이 생겨나게 되는 根本的인 原因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인내하라는 뜻이 아니다.
自身의 마음이 本來 있던 것이 아니라, 記憶할 수 없으나, 어린아이시절부터 他人들로부터 들었던 말들에 의해서 造作된 마음이며, 記憶된 生覺들, 말, 말, 말들로 構成된 虛構的인 마음이라는 事實에 대한 올바른 理解로써 슬기롭게 마음을 便安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다.
'내마음은 본래 내마음이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理解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상식적인 말이며, 보편타당한 앎이기 때문에, 일념상태의 행위로써 '마음이 없는 行爲'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사실 인간 세상에는 전에 없던 방법이며, 인간의 觀念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想像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知的으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말이며, 누구나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는 오직 일념법, 일념윤회법만이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인간들의 삶은 손오공의 잔재주와 같은 방식들로써의 천태만상으로 드러난다. 개개인들 모두가 자기만의 자존심을 주장하며 오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들이다. 그런 삶 속에서 마음이 편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사실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이 어불성설이며, 근거 없는 낭설이다.
사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인간들의 끊임없는 발전 행위와 각종 종교들, 그리고 여행이나 오락이나 음악, 예술, 문학 따위 등의 모든 방법들은 인생의 길을 잃은 방랑자들의 방황의 일부분들일 뿐,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思考方式의 삶이라고 하더라도 죽음 앞에 다가서야만 하기 때문이며, 인간 삶에 餘恨이 없는 삶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삶이니. 어찌 가치 있는 삶일 수 있겠는가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올바른 앎에 대해서 知的으로나마 이해 한다는 것은 그만큼 크나큰 이익이 따르는 것이다. 스트레스에 의해서 병드는 것이지만, 올바른 이해로써 스트레스를 한 생각 차이로써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의 뜻, 자신의 관념과 일치되지 않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거나,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에 스트레스라고 生覺하는 일이 생긴다면, 곧 자신의 마음의 形成過程에 대해서 돌이켜 보는 일과 함께 자신의 마음이 本來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는 分明한 知識이 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로 작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럴때, 이것은 본래 내 마음이 아니다, 나는 마음과 現象界를 超越한 眞我다' 라는 방식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내 마음이 어릴때부터 本來 있었던 것이 아니라, 他人들의 말에 의해서 加工된 虛構的인 마음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자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形成된 虛構的인 것이라는 事實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마음은 본래부터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構成된 虛構的인 것이며, 더 나아가 내마음은 내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加工되어진 虛構的인 것이라는 事實에 대해서 事實을 事實 그대로 認識할 수 있으므로써 마음을 平常心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마음은 내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합쳐진 虛構的인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 또한 그들의 마음이 아니라, 내마음과 같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앎에 대해서 마음에 대한 올바른 思惟라고 한다.
다만. 인간 즉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마음이 본래 없다'는 말에 대해서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며, '마음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만 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본래 없다'는 말은 낯선 말일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차이 뿐이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마음이 있다는 말과 感情의 動物이라는 말, 그리고 理性的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 느낌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 말, 말 등 虛構的인 말, 말, 말들만 들었을 뿐, 그 어디에서도 '마음이 本來 없는 것이다'는 말이나, 감정, 느낌이 本來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는 '天性'이라는 말이나, 마음이 있다는 말이나, 느낌이라는 말등의 말에 대해서 事實的이라고
生覺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그대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시절부터 他人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웠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事實的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言語에는 반댓말이 있듯이 그대가 事實的으로 認識하는 말들 또한 相對的인 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마음이 있다는 말과 마음이 없다는 말은 相對的인 말이다.
만약에 마음이 있다는 무리들과 마음이 없다는 무리들이 서로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누가 옳으며,
누가 옳지 않은가? 사실은 둘 다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어린아이에게는 '마음'이라는 '말, 말, 말,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佛經에는 '我相, 人相, 壽者相, 衆生相'이 있으면 如來를 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소리나 음성 기타
形相이 있는 모든 것들로써도 如來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金剛經의 主要 內容들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我相'이라는 말과 '人相'이라는 말은 위의 설명과 같이 어린아이시절에 '내가 있다' 말에 대한
洗腦와 함께 '내가 사람이다'는 洗腦에 의해서 지금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觀念에 이르기 까지. 他人들의 말, 말, 말에 의해서 加工된 實體가 아니라는 事實에 대해서 知的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의 말 또한 이런 방식으로써 이해가 가능한 말이며, 노자와 장자의 신비스러운 말들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능한 말이 될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노자와 장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와 예수 등의 말을 함께 설명하는 까닭은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 이런 事實에 바탕을 둔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事實的인 말들이 言術이 뛰어난
者들에 의해서 더 이상 歪曲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말을 함께 설명하는 것이다.
그대 自身의 '本來의 나'에 대한 理解는 人間 삶에 있어서 가장 큰 利得을 얻는 것이며,
祝福을 얻는 것이다. 그 利益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 나갈 것이다.
그대와 人類에게 平和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道家'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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