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바로 알고 바로 봅시다

장백산-1 2014. 9. 28. 18:42

 

 

 

 

[바로 알고 바로 봅시다]      청화 큰 스님

 

 

 

 

 

因緣  따라 잠시 만나서

 

 

제가 法會를 하면 거사님들이나 젊은 불자님들은 별로 없고 보살님들이 삼분의 이쯤 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젊은 불자님들을 위해서 한마디 해보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깊고도 오묘해서 한마디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小乘과 大乘이 있고 또 우리 衆生들이 보는 次元의 현교(顯敎)도 있고,

 

우리  衆生이 볼 수 없는 次元의 밀교(密敎)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ㆍ대승의 관계와 현ㆍ밀교의 관계를 바로 알고자 하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基礎敎育이 튼튼한 분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精進을 하신다면 잘 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佛敎를 마음 심(心)자 마루 종(宗)자를 써서 심종(心宗)이라 합니다.

物質도 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現象的인 事物들이 存在하고 있는데,

佛敎는 어째서 마음뿐이라고 하는가? 왜 마음의 宗敎라고 하는가?


 

이런 重要한 問題를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꼭 푸셔야 합니다.

모든 物質과 事物들이 嚴然히 現存해 있는데도 왜 心宗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明確한 見解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른바 般若空의 智慧가 나옵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은 事實上   마음뿐이기 때문에 心宗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思想에서 볼 때, 絶對物質은 存在하지 않습니다.

時間性도, 空間性도 存在할  수 없는 것입니다.

物質이 分明히 내 눈앞에 있고, 物質이 있다고 生覺할 때는 空間性이 있으므로

存在가 있고, 또 時間도 있을 터인데 왜 存在가 物質이 없다고 하는가?


 

그 解答은 모든 存在가 因緣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잠시 잠간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時間性과 空間性이 없다는 말입니다. 時間性과 空間性이 없기 때문에 固定된 物質이 없습니다.

因緣 따라 잠시 잠간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이 世上 모든 것이 條件附라서 因緣을 떠나서는

어느 것도 存在할 수가 없다는 事實입니다.


 

佛敎의  基礎를 다 아시는 분들에게는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우선 '自己'라고 하는 存在를 본다 하더라도 '나'는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일 뿐입니다.

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아닙니까?

五蘊이 잠시 잠간 동안 가짜로 和合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色은 物質이므로 酸素, 水素, 質素 等

各各의 元素들이 가짜로 結合어 있는 것에 불과하며, 受想行識은 우리들의 觀念活動입니다.


 

내 몸뚱이를 비롯한 一切 物質과 우리가 느끼고, 疑惑하고, 分別 是非하는 精神活動과 같은 五蘊은

本來 있는 것이 아닙니다. 五蘊이 本來 있다고 한다면《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라는 말이 거짓말이 되겠지요.


 

分析한 뒤에 空인 것이 아니라, 내 몸 構成이 즉바로 空입니다. 어떤 사람들은《반야심경》의

色이 곧 空이라고 할 때, 色이라는 것, 卽 物質을 分析하면 끝에 가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므로 

空 아닌가? 하는 式으로 分析的인 立場에서 空을 生覺합니다만,《般若心經》의 '즉공(卽空)'은

그러한 空이 아닙니다.

 


'卽空'은 色 그대로 空, 다시 말해서 物質 그대로 空이라는 事實입니다.

내 몸뚱이가 이대로 空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空입니다.

그 理由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世上 모든 것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結局은 炭素의 結晶體일 뿐입니다.

아무리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그것은 結局 元素의 結合體일 뿐입니다.

더 추궁해 들어가면 各 元素라는 것도 結局  原子核과 그 주위를 廻轉하고 있는 電子가 몇 개 있는가,

陽性子, 中性子가 몇 개 있는가에 따라서 區分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各各의 元素는  陽性子, 中性子, 電子 등의 亞原子 粒子들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法門을 할 때마다 서투른 物理學 풀이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意味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空만 알아버리면 사실 불교는 참답게 대승(大乘)으로 入門되는

것입니다. 空을 모르면 大乘이 못 되는 것입니다. 般若空의 智慧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大乘이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입니다. 般若空의 智慧가 있어야 大乘이 됩니다.

大乘이 되어야 참다운 生死 解脫을 할 수 있는 부처님 법문입니다.

 卽 方便 法門을 떠난 眞實한 本質의 法門이 됩니다. 따라서 어렵더라도 科學的으로,

또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것저것 모두를 유추해서 引用하고 遠用해 가지고

공도리(空道理)를  알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토굴생활을 무던히 했습니다.

한번은 백장암 저 위쪽 1000미터 이상 되는 고지에다 조그마한 토굴을 마련해서

한 철을 지냈습니다. 삼동이 임박해서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우 들어갔습니다.

방이라야 사방 일곱 자 정도의 협소한 공간인데도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하려면

장작이 하루에 여남은 개비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무 준비를 충분히 안 했습니다. 그래서 장작을 절약하기 위해 하루에 세 개비씩 땟습니다.

마음을 通達하지 못하면 방에서 죽을 각오로, 나오지 않으려고 지붕도 천년만년 간다는 참나무 굴피로

이었습니다. 참나무 껍질도 부족해서 촘촘히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해 비가 억수로

쏟아져  그 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어 와도 우산이 없어서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방바닥에 물이 흥건해져서 할 수 없이 나무토막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빗물을 퍼내면서 지냈습니다.

그때는 또 生食을 했습니다. 지리산 쪽이기 때문에 이곳보다 훨씬 추운 지방인지라 계곡물이 전부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생식을 하므로 따뜻한 물은 필요 없으나, 찬물마저 얼어붙어서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음을 깨서 양푼에다 넣고 불을 때서 녹인 물을 좀 마셨습니다.

생식도 콩가루나 깻가루를 섞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쌀만 불려서 그냥 먹었습니다.

찬물에다 쌀만 불려 그냥 먹었으니 消化가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도 하고 여간한 고통을 겪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無我'라고 하는 消息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미운 사람 밉고, 고운 사람 곱단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한 사람은 분명히 보고도 싶고,

나한테 짓궂게 군 사람은 또 밉단 말입니다. 내가 보란 듯이 무얼 좀 해야 하겠구나, 그런 觀念을

떨쳐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이 목숨 다 바치겠다는 각오로 들어갔지만

그런 속에서도  '나'라는 觀念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모두가 비었다'는《金剛經》도 수백 번 읽었고,《般若心經》이야 중 된 지 12년이 되었을

때이니 몇 천 번은 읽었겠지요. 그래도 제법공(諸法空) 理致가 와 닿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불자님들한테 이 世上 모든 것이 空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本來가 空이고, 마음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도 저 양반들이 지금 내 말을 알아먹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러나 여러분 세대는 지극히 총명한 세대입니다. 다행히 物理學的으로도

物質 自體가 終局에 가서는 에너지로 되어 버린다는 것쯤은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萬事가 다 空이라는 즉공(卽空)을 알 듯 말 듯 할 때입니다.



  

아함경과 반야경

 부처님은 成道  後 49년 설법에서《아함경》을 12년 동안 설법하셨습니다.

아함경은 부처님의 根本敎理입니다.

 

아함경의 대요는 善도 있고, 惡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유루지(有漏智)의 次元인 우리 중생의 常識 次元에서 說하신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까지의 가르침은 이른바 유교(有敎)라 할 수 있습니다.

 

'있다'  '없다' 하는 分別心 次元을 中心으로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本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보실 때는 그렇게 안 보입니다.

 '모두가 다 비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라고 말씀을 하셔도 중생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2천 5백 년

그때는 물리학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訓練시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工夫를 해보셔서 짐작이 되시겠습니다만, 가령 우리가 업장(業障)이 무거워 欲心이 많고

自己밖에 몰라도 몇 백 일 동안 애쓰고 기도를 모셔 보면 차근차근 自己라는 아상(我相)이 떨어집니다.

차근차근 自己라는 我相이 무뎌집니다. 그래서 공부가 익어지면 그때는 '나'라는 我相이 몽땅

빠져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 12년 동안이나 '있다' '없다'고 하는 소식을 말씀하신 後에, 마음이 이만큼 훈련되었으면

 '공(空) 道理'를 말해도 알아듣겠구나 하고 生覺하셨습니다.

實際로 業障이 가벼워지면 空의 理致를 알아듣습니다. 같은 法門도 業障이 무거운 때 듣는 것과

기도나 참선을 해서 業障이 가벼운 때 듣는 것은 差異가 있습니다. 참선도 한 철 공부할 때, 두 철

공부할 때 다르고, 같은《반야심경》풀이도 똑같은 사람이 하더라도 듣는 意識水準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12년 지난 다음에는 般若經의 空 道理를 22년 동안이나 설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부처님 설법이 가장 고구정녕(苦口??)하게 하신 설법입니다.

 

 


12因緣法을 다 배우셨지요? 아무런 자취도 없는 過去 前生의 無明心 때문에 우리 意識에는

수많은 妄想煩惱가 쌓여 있습니다. 無明이란 事物을 바르게 못 보는 마음/意識을 말합니다.

검으면 검다고 보고, 희면 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못 보는 마음이 無明心입니다.

오직 聖者만이 無明心이 없습니다. 聖者는 事物을 있는 그대로 事實 그대로 봅니다.

이른바 實相을 봅니다. 우리 衆生은 가상(假相)밖에는 못 봅니다.

 

 


따라서 過去의 無明心 때문에 행(行)이 있습니다. 우리 父母님도 無明心 때문에 陰欲의 行이 있었기에,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영(靈), 卽 식(識)도 또한 無明識 이므로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끌려갑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胎) 속에 安着하여 열달 동안 커 나왔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몸뚱이입니다만,

 過去 前生에 이와 똑같은 몸뚱이는 없었지 않습니까? 過去 前生에는 없었습니다.

한동안 살다가 교통사고를 만나서 죽든, 또는 80세에 죽든, 어떻게 죽든 結局에는 죽는 것인데, 죽은 다음

이런 몸뚱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今生에는 몇 십 년 동안 사람 모양으로 이렇게 存在합니다. 그러면

사람모습, 그것은 實存이겠습니까? 잠시 동안 今生에 存在하는 모양일 뿐  이것도 역시 實存은 아닙니다.

 

 


우리의 觀念이 衆生 次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分別을 합니다. 따라서 잘생겼다거나 못생겼다고 分別을

합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은 一秒의 몇 억 분의 일 동안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一秒의 몇 억 분의 일도 그 한순간 한순간이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을 10년이나 20년 있다가 만나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每日每日 만나서는 잘 모릅니다.

 

分明히 變化하는데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일 초 전과 일 초 후의 우리 몸뚱이가 같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自己라고 固執하는 것입니다. 일 초 前의 自己와 일 초 後의 自己, 또 일 초의 몇 억 분의 일

 

前의 自己와 그 後의 自己가 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같은 모습으로 存在한다고 錯覺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科學的입니다. 어느 한瞬間도 똑같은 나는 存在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無我입니다.

 

 


아무리 無我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나'를 構成하는 酸素가 있고 水素가 있으며,

산소나 수소를 構成하는 陽性子나 電子나 中性子가 있다고 生覺합니다.

그러나 모든 存在하는 것들은 가장 微細한 素粒子 로 쪼개지고, 素粒子도 終局에 가서는

마음의 波動인 염파(念波)만 存在하게 됩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은 마음의 波動에 불과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 모두가 다 마음의 波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宇宙 空間에 있는

어떠한 存在나 物質도, 太陽界나 銀河界나 그러한 存在마저도 모두가 다 마음의 波動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波動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마음의 波動은 좋아하고 탐내는 마음[貪心],

싫어하고 忿怒하는 마음[瞋心] , 無明心[癡心]에서 일어납니다. 無明心이란 우리의 意識이 事態를

잘못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모두가 다 眞如佛性인데 一心인 眞如일 뿐인데, 오직 비할 바 없이 깨끗한

淸淨한 空한 마음뿐인데 우리 意識이 事態를 잘못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아(我)가 생기는 것입니다.

我가 생기면 我한테 좋으면 貪心, 我한테 싫으면 瞋心이 됩니다.

따라서 我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無明心이 波動을 일으키고, 그 波動이 電子가 되고 陽性子가 되고

中性子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無明心의 그 마음이 電氣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면 이 世上 모두가 本來는 마음의 波動 뿐입니다. 마음이 波動을 일으켜서 電子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텅~빈 본바탕 자리 마음 자체는 조금도 變動이 움직임이 없습니다.

金으로 안경테를 만드나 시계 줄을 만드나 金의 純度는 조금도 變質이 없듯이 眞如佛性, 一心眞如의

자리는 이렇게 變動하고 저렇게 變動해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나 별 같은 모양이 되나, 또는 金 같은

모양이 되나  '一心眞如'라는 그 마음의 純度에는 조금도 變化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眞如佛性은 生死를 超越하여 어떠한 狀況에서나 조금도 變化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宇宙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모두가 다 어제도 오늘도 眞如佛性만으로 充滿해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般若空의 道理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텅~비어 있습니다.《반야심경》한 편만 가지고도 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意識으로 生覺하는 꿈같은 見解, 즉 우리는 지금 잠꼬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못 보는 見解를《반야심경》에서는 顚倒夢想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멀리 떠난다는 의미에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正見)

우리 젊은 불자님들이 불교운동 하는 것은 굉장히 갸륵합니다.

갸륵하지만 바른 견해 [正見]에 입각해야 합니다. 正見은 八正道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옵니다.

正見이 되어야, 바른 思考인 정사유(正思惟)가 되고, 바른 말인 정어(正語)가 되며,

바른  행동인 정업(正業)이 되고, 바른 職業인 정명(正命)이 되며,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正見이 바로 못 서면 全部가 빗나가고 맙니다.

윗단추 하나 잘못 끼우면 그 밑의 전체가 잘못 끼워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正見은 무엇인가? 般若空의 智慧가 있어야 正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도 正見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이지요.

고집멸도의 멸(滅)이란 바로 佛性입니다. 卽 眞如佛性만이 實存인 것이고,

眞如佛性 그것만이 검은 것을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無明心 때문에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교행증(敎行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교(敎)만 있고 修行이 없으면 증(證)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말법(末法)인 것입니다.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나, 그래도 부처님 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正見에

依한 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 그리고 거기에 따른 바른 修行과 바른 證明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正法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시던 때이고, 부처님과  過去  前生에 因緣이

깊은 훌륭한 道人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부처님같이 신통자재를 갖추어

타심통(他心通)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딱 알맞은  法門을 하신다고 하면 깨달은 道人이 많이 나올 터인데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이 가신 뒤에는 像法 千年이라 했습니다. 즉 證明을 못하고

마음으로 道人이 된 사람들만 조금 있을 뿐 그저 가르침만 있고 修行만 있단 말입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어떠합니까? 오늘날의 불교는 敎와 修行과 證의 세 가지 가운데 수행이나 증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行도 證도 거의 없고 敎만 있습니다. 敎도 제대로 모릅니다. 般若思想도 미처 모르면서 佛法을

안다고 말합니다. 無我의 證明은 고사하고, 無我의 道理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現代는

 분명히  末法입니다. 末法으로는 生死를 건너지 못합니다. 불교의 마지막 구제는 生死解脫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 좋지만 佛法이 佛法인 점, 즉 佛法이 佛法인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宇宙의 本質을 본다는 데 있습니다. 내 生命의 本質을 알고, 모든 중생과

더불어 우리 生命의 本質을 깨닫는 것이란 말입니다.

 

 


설사 못살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습니다. 가장 重要한 것은 사람으로 기왕 태어났으면

 내 生命의 本質을 알고, 宇宙萬物의 本바탕을 알아 모든 중생과 더불어 깨닫고, 解脫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佛法입니다.

 

 


우리가 하는 불교운동은 마땅히 正法時代로 돌이켜야 합니다.

정법시대가 안 되면 幸福은 없습니다. 우리 단체의 幸福도 없습니다. 바른 부모도 못 되고

바른 스승도 못 됩니다. 바른 정치인도 못 됩니다.

'나'라는 人間의 本質이 무엇인지, 혹은 自己 本來面目이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人間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의미도 모른단 말입니다.

또는 감투는 무엇이고 내 몸뚱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명명백백하게 般若波羅蜜을 알아야 합니다.卽,

諸法空의 道理, 五蘊皆空의 理致, 卽 모양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생각의 대상도 모두가 다 空인

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는 道理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意識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業障

 때문입니다. 無明心 때문에 그렇게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실하고

허심탄회하게  祈禱나 冥想, 혹은 參禪을 한다면 틀림없이 그때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텅~비어 옵니다. 내 몸뚱이가 오십 몇 킬로, 육십 몇 킬로라고 하지만,

무게란 本來 있지 않습니다. 저 磁氣圈에 올라가면 거의 무게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워집니다. 이 代流圈  內에서만 몇 킬로라고 무게를

따지는 것이지 本來 固有한 무게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常識 次元에서 말씀하신 유교(有敎)가 있고,

萬法이 事實은 다 텅~비었다고 말씀하신 공교(空敎)가 있으며,

萬法이 다 텅~비었다고 하여 眞實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닌, 즉 虛無한 것이

니라고 하는 眞如佛性으로 充滿해 있다고 하는 중도교(中道敎)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아서 萬法이 虛妄한 것이지, 宇宙萬物은 眞如佛性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宇宙萬物이 眞如佛性뿐이라고 파악하는 가르침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중도교(中도敎)란 有敎와 空敎의 中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宇宙萬物이라는 것은 中道라고 하는 實相, 卽 眞如佛性만이 實在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中道敎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一般常識的인 意識次元을 넘어야 합니다. 常識을 못 벗어나면 俗物입니다.

 불교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常識을 못 넘으면 그것은 俗化運動이 되고 맙니다.

불교를 속화시키면 안 됩니다. 응당 대중화를 시킨다 하더라도 속화해서는 안 됩니다.

꼭 般若思想을 基礎로 해야 합니다.

 

 


般若空思想은 모든 哲學의 基潮가 됩니다. 그것을 무(無)哲學이라고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무(無)의 自覺的 限定'이라고 합니다. 즉 모든 것이 原來 없던 것인데 因緣 따라서

現象으로 나타나 보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모습 [相 ]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 너, 밉다, 곱다,하는  

그런 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相의 實相은 本來 공(空)입니다. 즉공(卽空)입니다.

分析한 뒤에 아는 空이 아닙니다. 있는 이 自體로 空인 事實을 聖者는 명명백백하게 봅니다.

우리 중생은 명명백백히 固定된 實體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顚倒夢想입니다.

顚倒夢想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즉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打破하는 것이

般若空의 智慧가 아니겠습니까? 전도몽상을 打破하고 꼭 행(行)과 증(證)을  갖추어 正法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공부는 출가한 스님들이나 할 수 있지 재가불자가 하기란 어렵다고 生覺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렵다고 生覺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별로

못 배우고 業障이 많아서 人間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역시 過去 前生에 무던히 오계(五戒) 정도는

지켰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本來性稟의 立場에서 본다면 석가모니와 조금도 差異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毒蛇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本性稟은 석가모니와 비교하여 터럭 끝만큼의 差異도

없습니다. 모습에만 差異가 있을 뿐입니다. 남을 죽인 강도 역시 本性稟은 석가모니와 똑같습니다.

 

 


聖經에,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쯤 容恕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더 容恕하여라"라고 말합니다.

 

 


般若空의 智慧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容恕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한 번 미운 사람은 밉다고만

生覺합니다. 그러나 妄想煩惱가 滅해서 實相을 바로 보게 되면, 모두가 比할 바 없이 淸淨하고 空한 

부처님의 光明으로 빛납니다. 그런데 우리 無明의 눈으로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는 分別心이 있습니다. 따라서 罪는 밉게 보는 '나'에게 있습니다.

 

 


왜 남을 容恕 못합니까? 우리가 늘 하는 말이 동체대비(同體大悲) 아닙니까?

同體大悲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眞如佛性이 數萬 가지 모습으로 다르게 나타나 보일지라도

本質에서는, 本來性稟에서는 모두가 다 한 몸인 부처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한 몸 부처라고 生覺되기

때문에  대비(大悲), 無限한 큰 慈悲라고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人情이 아닙니다.

 

 


八正道의 正見은 宇宙의 頭頭物物草草花花를 자타시비(自他是非) 없이 一如平等한 眞如佛性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世上에 眞如佛性 아닌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正見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生覺하는

것이 正思惟입니다. 이런 見解로 남이 듣기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누구한테나 베풀어라"

"말을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해라"는 등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正見만 굳건히 갖는다면

그렇게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自己 마음의 本體를 깨닫는다면 萬가지 德이 다 갖추어 온다'고 하여

 "약명요심(若明了心) 만행구비(萬行具備)"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 잡는 그물의 코가 千코萬코 있다고 하더라도 양쪽 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든 코가 따라오듯이,

 '宇宙萬物은 모두가 다 淸淨無垢한 眞如佛性의 마음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生覺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般若空 思想을 가지고 話頭를 들거나 念佛을 하거나, 또는 呪文을 해야 참다운 念佛이고,

참다운  話頭입니다. 간혹 話頭를 疑心하는 것만이 참선이고, 화두를 疑心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生覺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달마스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중국 북송 때 임제 일파에서 한 것이고,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불교 기풍이 못 들어올 때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顚倒夢想입니다. 그야말로 법집(法執)인 것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法門은, 呪文으로 가는 門이나, 念佛로 가는 門이나,

경(經)을 보는 門이나, 다 門입니다. 심지어 복숭아꽃을 보고도 깨닫고,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데 念佛이나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相對

有限的인 相에 걸리지 않고,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正見을 갖는다면 어떠한 工夫나 다 參禪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參禪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時代에 살고 있습니다. 宗敎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眞理가 하나인데 宗敎가 하나가 안 될 수 있습니까? 基督敎의 聖經이나 알라神의《코란》이나

여러분들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보시면, 다시 말씀드리면 佛敎의  般若波羅蜜로 照明하면

모두가 다 眞理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나 출가불자나 모두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무슨 意味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수자상(壽者相)ㆍ중생상(衆生相)이 없음을

말합니다.

我相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生覺을 말하는 것이요, 人相이란 '너'라고 하는 生覺을 말합니다.

壽者相이란 時間이 짧고 길고, 또는 내 生命이 짧고 길고 하는 分別하는 生覺을 말하고,

衆生相이란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풀이며, 이것은 자연이라고 分別하는 生覺을 말합니다.

 

 

 


상(相)을 떠나면 自然히 公害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汚染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宇宙法界 모두가 다 부처님 光明으로

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重重無盡으로 오직 부처님 生命뿐입니다.

 

 


요즈음 한마음 운동, 한 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카톨릭에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정말로

우리가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을 해야 합니다.보통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 한 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天地宇宙가 곧 同體  '한 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참 쉬운 것입니다.

天地宇宙의 道理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宇宙는 부처님 本源인 宇宙 自體의 目的이 있습니다.

부처님 本源인 宇宙 自體의 目的은 모든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無量法門을 다 알게 하소서!" 등의 四弘誓願을

외우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이 宇宙의 본뜻입니다. 宇宙의 目的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처님 本源이라

합니다. 宇宙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本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佛敎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現代科學을 안 믿을 수가 없듯이, 佛敎는 眞理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佛敎를 더디게 믿을 것이고, 더러는 今生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今生에 믿고 닦아서 成佛하실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은 宇宙의 道理에 따른 것입니다. 아주 科學的이고 아주 哲學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따르면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가령 부처님 말씀을 따라 飮食을 

적게 먹으면 더없이 좋습니다. 낭비나 과소비를 하지 않고 절약하면 그 또한 그렇게 좋단 말입니다.

자기도 가볍고 생활도 좋고 남도 숭상하게 됩니다.고기도 먹는 것보다도 안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고기 안 먹는 사람이 고기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느끼한가 말입니다. 그런 것 많이 먹고서 군살 붙어

보았자 그것은 우리 生命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 모두가 다 宇宙의 理致에 따르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우리가 먹는 고기도 역시 우리의 生命과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음으로 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겠지요. 많이 먹으니까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겠지요.

내가 먹은 고기 한 점이 과거 어느 生에 내 父母님 살점일 수도 있습니다.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은 우리보다 더 業障이 무겁지 않습니까? 그런 짐승들은 過去世에 五戒를 못 지켜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業障이 무거운 그 짐승들의 細胞가 내 몸한테 온다고 生覺할 때, 人間 몸의 細胞가 汚染이

안 되겠습니까?  인간 몸의 세포가 汚染되기 때문에 그런 畜生들의 고기를  많이 먹어 놓으면 現代

文明病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信仰이라는 것은 철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서운 決斷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대중화시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식으로 믿어서는 말법의 상식 차원, 속물 차원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도 말했듯이, 世上를 움직이려면 自己를 먼저 변화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自己부터 부처님의 正見을 바로 세워 두고, 바른 修行을 하여, 證明을 해야 합니다.

증명만 해버리면 그 이후는 굳이 말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香氣가 풍깁니다.

麝香을 지니고 있으면 사향의 향내가 풍기게 됩니다. 사향을 가지고 있다면 몸에다

구태여 향을 바르고 치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겨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法을 믿고 가르침대로 修行하는 것 보고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말합니다.

부처님 이름 한 번 외고, 화두도 한 번 참구하면, 한 번 한 만큼 우리한테는 우리 生命의 香氣가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치장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後光을 보십시오. 本來

우리한테는 그런 光明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런 後光을 湮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選擇의 餘地가 없습니다. 오직 외길로 天地宇宙의 眞理인 부처님 길을 따라가는 그 길 외에

다른 選擇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選擇은 우리가 軌道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는 不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苦)의 인(因)을 지었기 때문에 苦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苦의 因을 안 지었다면 즉, 前生에 貪心과 瞋心, 그리고 無明의 癡心으로 業을 짓지 않았다면,

人間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極樂에서 永生을 구가했겠지요.

 

 

 

 


달라집시다

 

우리는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져야 합니다. 부처님  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永生의 길로 걸음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南無阿彌陀佛이나  觀世音菩薩이나 '이뭣고' 話頭나 無字 話頭나

모두가 다 成佛의 工夫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正見을 確固不動하게 마음에 두고서 해야

참선입니다. 그러면 다 참선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나 어머니를 부르나 어떻게 부르나 이름을 안 부르고

명상을 하나 그냥 호흡법을 하나 모두가 참선인 것입니다. 호흡법도 그냥 호흡만 해서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正見과 더불어서 해야 參禪이 되는 것입니다.

 

 


한사코 正見을 가지고 거기에 따르는 修行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따르는 修行은 부처님 戒行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쓰셔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旅行者의 나그네 길에서

우리를 가볍게 하고 工夫를 쉽게 하는 것입니다.

 

 


한 달에, 陰歷으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이렇게 육재일(六齋日)이 있는데 육재일 정도는

꼭 출가수행자같이 적게 먹고, 적게 쓰고, 淸淨한 生活을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이 오늘 내일

달라지고 차근차근 맑아져야 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 절도 낭비를 많이 합니다. 앞으로는 우리도 더욱더 검소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저희들 출가불자나 재가불자나 정말로 부처님 法대로 따르셔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末法을

떠나고 像法을 떠나서 正法을 따라야 합니다.正法이 아니고서는 우리나라도 절대로 훌륭한 나라가

못 됩니다. 世界平和도 절대로 안 옵니다. 眞理와 함께 할 때만 참다운 自由, 참다운 平等,

참다운 解脫이 있습니다.

 

 


부처님  敎法에 따라서 바른 修行, 바른 修行에 따라서 證明을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증명에 들어가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行  지키기가 第一 쉬운 것입니다.

辱도 하기보다는 하지 않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담배도 피우기보다는 안 피우기가 더 쉽습니다.

술도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매서운 決斷을 하십시오.

그래서 부처님 法 아닌 것은 단연코 안 한다는 覺悟로 修行을 하셔야 합니다.

 

 


 하이데거의 말과 같이 哲學은 決斷의 가르침입니다. 宗敎는 더욱 그러합니다.

 宗敎를 믿음으로써 우리의 意識이 바뀌어야 합니다. 凡夫가 바뀌어 聖者가 되게 하는 것이 宗敎입니다.

 

 


이와 같이 正法의 方向으로 佛敎를 轉換시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山僧의 말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6년 8월, 금륜회관 광주청년불자회 초청 특별법회>

 

http://cafe.daum.net/vaj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