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우주만물은 불생불멸의 존재다

장백산-1 2014. 10. 1. 01:42

 

 

 

 

 

 

불.생.불.멸 不生不滅 - 성철 스님[退翁性徹]

-  관음 기도성지 동해시 두타산 관음암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생겨나지도 않고 一切萬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恒常 나타나는 도다.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이 구절은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말씀인데 佛敎의 골수骨髓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렇게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縮小하면 '不生不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不生不滅이 佛敎의 根本原理이고, 부처님은 뭘 깨쳤느냐 하면 不生不滅의 도리를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常識的으로 生覺해 보면 世上 萬物 全切가 생자필멸[生者必滅]입니다.

 

난生者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生者는 必滅인데 어째서 모든 것이 생겨나지도 않고 滅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 아닌가? 當然히 그런 質問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世上에서 生者 必滅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이 世上 모든 것이 다 不生不滅이라고 말씀하신 것인지, 

그 理由를 分明히 提示해야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當然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道를 확철히 깨쳐서

一切가 생겨나지도 않고 一切가 滅하지도 않는 이 道理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關係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前에는 누구든지 疑心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一切 萬法이 不生不滅이라면 이 宇宙는 어떻게 되는가? 

 

 그 宇宙는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不生不滅인 이 宇宙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恒常 머물러 있는 법法의 世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法이 法의 자리에 머무나니 世間相 이대로가 常住不滅이니라.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法'이란 不生不滅의 法을 말합니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 全切가 다 不生不滅의 位置에 있어서

세간世間의 모습 이대로가 常住不滅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生滅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實地  內容에 있어서는 宇宙 全切가 不滅입니다.

不生不滅은 모든 萬法의 참모습으로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말합니다.

 

또 華嚴經에서는 不生不滅 諸法實相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限없이 限없이 연기緣起할 뿐 그 본모습은 모두 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同時에 이 全切가 다 融和하여 온 宇宙를 構成하고 아무리 千變萬化한다 해도

상주불멸[常住不滅]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事實을 바로 알면 佛敎를 바로 아는 同時에 모든 佛敎 問題가 다 解決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를 것 같으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山中에 들어와서 눈감고 앉아 參禪을 하든지

 

道를 닦아 結局에는 깨쳐야지 안 깨치고는 모를 형편이니 이것도 또 문제 아니냐,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道를 깨치기 前에는 不生不滅하는 이 道理를 確然히 알지 못하더라도

요새는 과학만능시대이니 이것을 科學的으로 좀 근사하게 풀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不生不滅하고, 科學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自古以來]로 여러 가지 哲學도, 宗敎도 많지만 

不生不滅에 對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不生不滅이라는 말은 불교의 專用이요, 特權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科學이 자꾸 發達되어서 요새는 불교의 不生不滅에 대한 特權을 科學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科學 中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原子物理學에서 

自然界는 不生不滅의 原則 위에 構成되어 있음을 實驗的으로 證明하는데 成功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 理論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A. Einstein)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 自然界는 에너지[energy]와 질량質量 두 가지로 構成되어 있는데,

 

古傳物理學에서는 에너지와  質量을 두 가지로 各各 分離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等價原理에서는 結局 에너지가 곧 質量이고, 質量이 곧 에너지이다.

 

에너지가 質量이고 質量이 에너지로 서로 같다는 말입니다.

 [E=mc²]

 

* [E]에너지, [m]質量, [c]眞空에서 빛의 速度

 

그래서 그 前에는 에너지는 에너지 保存法則, 質量은 質量不變의 法則을 가지고

 

自然現象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요새는 에너지와 질량을 分離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하며 또 하나밖에 없습니다.

卽 질량[質量]이란 것은 유형有形의 物質로서,  깊이 들어가면 物質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energy]는 무형無形의 波動運動하는 힘/氣運입니다.

 

 

有形인 質量(素粒子)와  無形인 에너지(波動)이 어떻게 서로 轉換할 수 있는가? 

 

그것은 想像도 못해보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쉬타인이 等價原理에서 에너지와 質量 두 가지가 別個가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夢想家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런 이론, 卽 에너지와 質量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하고.

 

그래도 아인쉬타인이라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學者들이 수십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質量을 에너지로 轉換하는데 成功했습니다. 그 成功의 첫 應用段階가 原子彈 水素彈입니다.

質量을 에너지로 轉換시키는 것을 核分裂이라고 하는데

核을 分裂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發生되는 에너지, 그것이 천하가 다 아는 原子彈인 것입니다.

이것은 核이 分裂하는 경우이고, 核이 融合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水素를 融合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水素彈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 前에는 에너지와 質量을 完全히 分離하여 別個의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만

科學的으로 實驗한 結果  質量이 에너지로 完全히 轉換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美國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앤더슨(C. D. Anderso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質量으로 또 質量을 에너지로 轉換하는 실험에 成功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세그레(Emilio Segre)라는, 이탈리아의 학자로서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가서 산,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形態의 各種 에너지가 全切的으로 質量으로 轉換되고,

 

또 各種 質量이 全切的으로 에너지로 轉換되는 것을 立證했습니다.

이 事實을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energy]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質量]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없어졌습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이 없어졌습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즉 물이고, 물이 즉 얼음입니다.

 

 에너지와 質量  關係도 물과 얼음 관계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質量으로 나타나고 質量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質量과 에너지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물과 얼음이 서로서로 다르게 나타날 때에 물이 없어지고[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生]이 아닙니다.

물 그대로 全切가 얼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없어진 것 아니고[不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不生],

모양만이 바뀌어서 물이 얼음으로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그대로입니다.

이와 꼭 같습니다. 質量 全切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全切가 質量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轉換의 前後를 比較해 보면 全切가 서로 轉換되어서 조금도 增減이 없습니다.

卽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不生不滅이니 義當 不增不減 아니겠습니까.

 

東洋思想을 잘 아는 日本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 質量 關係가 

 

不生不滅이요, 不增不減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西洋 사람들은 불교 용어를 잘 모르니까 이런 表現을 그대로는 못해도

그 內容에서는 꼭 같이 에너지 質量 關係가 보존保存된다고 말합니다.

 

保存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不生不滅, 不增不減의 世界를 불교에서는 法의 世界, 卽  法界라고 합니다.

恒常 주[住]해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世界,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 質量의 等價原理에서 보면

 

宇宙는 永遠토록 이대로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常住法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自然界를 構成하고 있는 根本要素인 에너지와 質量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自然界는 어떻게 되는가, 自然界 卽, 宇宙法界라는 것은 根本的으로 봐서

에너지와 質量 두 가지로 構成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質量이고, 質量이 에너지여서

아무리 轉換을 하여도 增減이 없으며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宇宙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常住不滅의 世界가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쉬타인의 等價原理가 없었으면 不生不滅이라는 것은 거짓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前에 眞理를 깨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慧眼으로 宇宙 自體를 환히 들여다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一切 萬法 全切가 그대로 不生不滅이라는 事實을 宣言하였습니다.

 

 그러나 普通 사람들은 그런 精神力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年 동안을 이리 硏究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結果,

이 自然界를 構成하고 있는 根本要素인 에너지와 質量이 둘이 아니고,

 

質量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質量인 同時에 서로 轉換하면서 增減이 없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不生不滅이라는 그 原理가 科學的으로 立證되어버렸다 이말입니다.

 

 

 

그러니 原子物理學이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理解를 못해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시 거짓말 할 그런 어른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새 그냥 불교원리를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서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 예로써 불교의 根本原理인 不生不滅의 原理를 相對性理論,

等價原理에서 입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虛荒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아니고 

科學的으로도 우리가 理解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흔히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불교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어보자면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現實的으로는 거짓말 같고 虛荒하여

꼭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接近하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佛敎의 根本原理인 不生不滅, 이 말이

相對性理論에서 出發하여 現代 原子物理學에서 科學的으로 完全히 證明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不敎原理가 現實에 適用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困亂한 것입니다.

이처럼 科學이 發達함에 따라 불교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불교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現代物理學이 佛敎에 자꾸 가깝게 接近해 오고 있는 것만은 事實입니다.

 

또 般若心經에 이런 句節이 있습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은 有形을 말하고  空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有形이 卽 無形이고 無形이 卽 有形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有形과 無形이 서로 通하겠습니까?

어떻게 虛空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虛空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反問할 것입니다.

그것도 當然한 質問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虛空이고, 虛空이 바위입니다.

 

 

어떤 物體, 예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가 보면 分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分子는 또 原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原子는 또 素粒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內容을 보면 分子-原子 - 粒子 - 素粒子, 結局 素粒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素粒子]는 어떤 것인가?

 

素粒子는 原子核 속에서 時時刻刻으로 '色卽是空 空卽是色'하고 있습니다.

自己가 스스로 衝突해서 문득 粒子가 없어졌다가 문득 粒子가 나타났다가 합니다.

人工으로도 衝突現狀을 일으킬 수 있지만 粒子의 世界에서 自然的으로 자꾸 自家衝突을 하고 있습니다.

粒子가  타날 때는 색(色)이고,  粒子가 消滅할 때는 공(空)입니다.

이리하여 粒子가 有形에서 無形으로, 無形에서 有形으로 되풀이하고(轉換) 있습니다.

 

 

 

 

그래서 空然히 말로만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아닙니다. 

實際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確實히 證明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희 '4次元 世界'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相對性理論에서 展開된 것으로  이것을 數學的으로 完全히 公式化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次元 公式을 完成해 놓고 첫 講演에서 이렇게 宣言했습니다.

 

"모든 存在는 時間과 空間을 떠났다.

 時間과 空間은 그림자 속에 숨어버리고 時間과 空間이 融合하는 時代가 온다."

 

모든 것은 時間과 空間 속에 存在하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 라고 말할 때에 '오늘'이라는 時間과

'해인사'라는 空間 속에서 이렇게 法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次元의 空間과 時間은  各各 分離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日常生活인데,

그런 分離와 對立이 消滅하고 서로 融合하는 世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時間과 空間이 完全히 融合하는 世界, 그것을 4次元 世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結局은 어떻게 되는가?

 

華嚴經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無碍法界라는 말은 양변(兩邊)을 떠나서 兩邊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融通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卽, 時間과 空間이 서로 通해서 融合해버리는 世界입니다.

이 無碍法界는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時空 融合의 世界로서

민코프스키의 數學公式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든지 '不生不滅'이라든지 '無碍法界'니 하는 이런 理論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成佛하신 後 녹야원에서 修行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맨 처음에 하셨는가 하면 '내가 中道를 바로 깨쳤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中道', 이것이 佛敎의 根本입니다.

 

中道라는 말은 모순이 融合 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融合된 世界를 中道의 世界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善]과 악[惡]이 서로 對立되어 있는데 불교의 中道法에 의하면 善惡을 떠납니다.

善惡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善도 아니고 惡도 아닌 그 中間이란 말인가? 그 말이 아닙니다.

善 惡이 서로 通해 融合해버리는 것입니다. 善이 卽 惡이고, 惡이 卽 善으로 모든 것이 서로 通합니다.

서로 通한다는 말은 아까 말한 有形이 즉 無形이고, 無形이 卽 有形이라는 式으로 通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中道法門은 一切萬物, 一切萬法이 서로서로 融和하는 現象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對立을 完全히 超越하여 全部 融和 融合해 버리는 것,

卽, 對立的인 存在로 보았던 質量과 에너지가 融和되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中道'라 하면 '中道 는 中間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中道는 中間이 아닙니다.

 

中道라 하는 말은, 모순 對立된 兩邊인 生滅을 超越하여 生滅이 서로 融和하여

 

生이 卽 滅이고, 滅이 卽 生이 되어버리는 現象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質量으로 轉換될 때 에너지는 滅하고 質量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生이 卽 滅인 것입니다.

質量이 생겼다[生]는 말은 에너지가 멸했다[滅]는 말이고,

에너지가 滅했다는 말은 質量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生滅이 完全히 서로 通해서 融合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中道라는 말을 조금은 理解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綜合해 보면

 

불교의 根本은 不生不滅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中道다.

그런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은 관념론[觀念論]인가?

觀念論은 커녕 實證的으로, 客觀的으로 完全히 立證되는 眞實이다.

卽, 아인쉬타인의 相對性理論에서 '等價原理'가 不生不滅을 分明히 立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佛敎는 참으로, 科學的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과학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中道란 모든 對立을 떠나서 對立이 融和되어 서로 合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對立 중에서도 哲學的으로 볼 것 같으면 유무[有無]가 第一  큰 對立입니다

 

'있다' '없다'하는 對立 ....

 

中道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다.

 

[非有非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有와 無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亦有亦無]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3次元의 相對的 有 無는 完全히 없어지고

 

 4次元에 가서 融合하는 有 無가 새로 生기는 겁니다. 그리하여 有 無가 서로 合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有 無가 合하는 까닭에 中道라 이름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有無合故名爲中道

 

不生不滅이라는 그 原理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生 滅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融合 안 할래야 안할 수 없고, 모든 것이 無碍自在 안 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有卽是無 無卽是有

 

그런데 不生不滅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不生不滅을 저 멀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原子物理學에서 實地로 生이 卽 滅이고, 滅이 卽 生인

 

不生不滅의 原理가 實驗的으로 成功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그런 不生不滅의 原理다, 이 말입니다.

 

 

 

이런 좋은 가르침(法)이 있지만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 現實입니다.

흔히 中道를 辨證法과 같이 말하는데,

 

헤겔(F. Hegel)의 辨證法에서는 矛盾의 對立이 時間的 間隔을 두고서 發展해 가는 過程을 말하지만,

 

佛敎에서는 矛盾의 對立이 直接 相通합니다  卽, 모든 것이 相對 對立을 떠나서 融合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卽 없는 것, 없는 것이 卽 있는 것, 是가 卽 非, 非가 卽 是가 되어

모든 是非, 모든 分別, 모든 鬪爭, 모든 相對가 完全히 사라지고, 모든 矛盾과 對立을 떠날 것 같으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렇게 되면 이것이 極樂이고, 天堂이고 絶對世界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法이 法의 자리에 머물러서 世間相 이대로가 常住不滅이다 이 말입니다.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보통 皮象的으로 볼 때 이 世間이라는 것은 全部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지만 

그  實相 ,卽 참모습은 常住不滅, 不生不滅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原理는 어디서 꾸어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宇宙 全切 이대로가 本來로 不生不滅입니다.

一切萬法이 不生不滅인 事實을 確實히 알고 이 事實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갈 것 같으면

天堂도 極樂도 必要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絶對의 世界입니다.

佛敎에서는 根本的으로 現實이 絶對라는 것을 主張합니다.

눈만  올바로 뜨고 보면 娑波世界 그대로가 極樂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絶對의 世界를 어디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自己 마음의 눈을 뜨도록 努力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太陽이 온 宇宙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絶對의 世界를 놔두고

 

'念佛하여 極樂간다'   '예수믿어 天堂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絶對의 世界입니다.

 

 그러면 境界線은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뜨면 불생불멸[不生不滅] 絶對의 世界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生滅의 世界, 相對의 世界여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 이말입니다.

 

'우리 다 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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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당|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