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가지 일에 허물이 없다 ㅡ 신심명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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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흰 종이 위에 제가 사각형을 하나 그렸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것은 큰 사각형입니까, 작은 사각형입니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그냥 사각형일 뿐이지요. 그런데 제가 그 사각형을 에워싸면서 그 사각형의 바깥에 사각형을 하나 더 그리면 그것은 대번에 ‘작은’ 사각형이 되어 버립니다. 또 제가 이번엔 그 사각형의 안쪽에 사각형을 하나 그려 넣으면 그것은 ‘큰’ 사각형이 됩니다. 그렇다면 처음 제가 그린 사각형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밖과 안의 인연에 따라 때로는 작은 것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큰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이지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일 뿐이라는 말이지요. 이 단순한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우리의 삶은 그 순간 어떤 ‘질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95년 가을 제가 처음으로 경전 강의를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시내에 있는 어떤 전통찻집에서 매주 한 번씩 모여 도덕경을 강의하면서 삶에 대하여, 마음에 대하여,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침 그 전통찻집에는 개량한복을 즐겨 입는 한 아가씨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하게 그 아가씨와 마주앉아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아가씨의 지난했던 삶의 얘기를 듣게 된 것을 계기로 저는 그 아이의 오빠가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있지 않아 고아원에 보내졌습니다.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른 채 엄마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는데, 때로 엄마가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거기서 여덟 살 때까지 지내다가 어떤 아줌마 아저씨에게 입양되어 갔는데, 딸처럼 돌봐주며 학교에도 보내준다는 약속을 하고 데려 갔지만 그 약속은 곧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고, 그 아이는 온갖 구박을 받으며 오랫동안 모진 식모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때 그 집을 도망치듯 나와서는 모대학 기숙사 식당에서 기거하며 낮 시간까지는 식당일을 하고 저녁시간에는 전통찻집에서 일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온 그 아이의 힘겨웠던 삶의 얘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은 참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그 아이가 마음으로나마 따뜻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진실한 오빠가 되어 주면서, 어떻게든 그 아이의 꽁꽁 언 마음을 녹여주고 싶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참 오랫동안 그 아이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진정어린 사랑과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렇게 마음의 문을 꼭꼭 닫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겠지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르던 어느 화창한 봄날, 전에 없이 밝은 목소리로 그 아이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요. 한 번도 제게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던 아이였기에 궁금함과 함께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걸음에 약속 장소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 밝고 화사해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습니다. “아니, 네 얼굴이 오늘 따라 유난히 더 예쁘고 행복해 보이는구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그러자 그 아이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 난 고아야.” “그래, 넌 고아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그동안 난 내가 고아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어떻게든 숨기려고만 해왔어. 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완벽하게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늘 스스로 혼자 다니거나, 친구를 사귈 때에도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꼭꼭 숨긴 채 부모가 다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어. 또 어떤 때에는 ‘내 주제에……’라는 생각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스스로 피하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고 노력했지. 그러면서도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내가 고아라는 사실이 혹시라도 들킬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가슴 졸였는지 몰라. 만약 그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눈치 채는 날에는 내 인생은 그 날로 끝장 날 거라고 생각했어. 사람들은 모두 실망하며 나를 떠날 거고, 그러면 나는 또다시 홀로 남게 될 거라는 두려움에 언제나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있잖아, 오빠. 삶은 뜻밖에도 참 단순했어. 난 고아야. 그것은 불행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며, 그냥 단지 고아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어. 어느 순간 문득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가 고아라는 사실이 비로소 받아들여졌고, 그러고 나니 내 마음은 이렇게도 평안해. 이렇게도 가벼울 수가 없어. 참 신기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내 마음은 너무나 행복해. 내 인생에서 이렇게 행복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야! 이 기쁜 마음을 오빠에게 얘기해 주고 싶어서 전화를 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 아이의 표정은 정말 감동스러웠습니다. “아, 네가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구나! 그래, 바로 그거란다! 그냥 고아일 뿐 아무것도 아닌……. 이 오빠의 마음도 너무너무 기쁘다!” 말하자면, 제가 처음 그린 사각형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그냥 사각형일 뿐이듯이, 고아라는 것이 불행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닌 그냥 고아일 뿐이었던 것을, 그 아이는 언제나 그것을 ‘작고 보잘것없고 수치스러운 사각형’으로만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보니, 즉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보니, 고아는 그냥 고아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고아라는 사실에 언제나 주눅 들고 눈치 보며 힘들어하고 불행해하던 마음의 모든 무거운 구속과 굴레가 눈 녹듯 사라지고,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 같은 것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 옴을 느끼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그 아이는 여전히 고아였고, 삶은 여전히 힘겨웠으며,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때부터 그 아이의 삶은 참 많이도 달라집니다. 자신의 안과 밖 모든 것이 그저 부정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똑같은 시간과 조건 속에서도 이상하게도 자꾸만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온갖 결심과 다짐으로 퍼올리고 퍼올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라져버리곤 하던 내면의 힘과 에너지가 애쓰지 않고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자신 안을 가득히 흐르고 있음을 느꼈으며, 불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어 남모르게 참 많이도 울었건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솟구쳐 오름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꿈과 소망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올려 보게도 되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이만 여겨졌던 ‘삶의 희망’도 가슴 속에서 다시 새록새록 꽃 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두 발로 삶과 마음길 위에 우뚝우뚝 서가게 되면서 우리는 점차 뜸하게 만나게 되었지만, 자주 보지 못하는 그 아이와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하게 될 때에는 못 본 시간의 길이만큼 자신의 삶 속에서 부쩍 자라 있는 그 아이의 얘기를 듣는 것도 제게는 큰 감동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승찬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24.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불생 만법무구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가지 일에 허물이 없다.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곧 비교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됨과 동시에 자신의 바깥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만 가지 일에 본래 허물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고아라는 것에 갇혀 언제나 절망하며 불행해하던 그 아이에게서 ‘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니, 고아라는 사실과 상황은 그대로였으나 거기에 조금도 매이거나 물들지 않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되었듯이, 사실은 가난이 가난이 아니요 부족이 부족이 아니며, 번뇌가 번뇌가 아니요 중생이 중생이 아닌 것을, 그 모든 무게와 힘겨움과 절망과 불행은 오직 ‘한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요 허물이었던 것을, 그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기에 ‘나’와 삶은 그토록이나 버겁고 힘겨운 무엇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승찬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단지 그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자신의 안과 밖의 모든 것에 본래 아무런 허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의 마음은 가벼워지고 삶은 비로소 살 만한 무엇으로 다가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고 사소한 일 속에서도 기쁨을 느끼게 되며, 힘들었던 모든 인간관계가 더 이상 힘들거나 무겁지가 않아 매일 매일을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듯 단지 그 ‘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얻거나 잃거나, 되거나 안 되거나, 많이 가지거나 적게 가지거나, 높거나 낮거나에 상관없는 항상적인 만족감과 충만감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히 적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 삶이란 본래 이렇게 충만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그 ‘한 마음’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진 채 ‘없는 허물들’만을 탓해왔던 것이지요. 25.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불생불심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다. 본래 허물이 없었으니 따로 도(道)니 법(法)이니 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어 찾거나 구하는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 뿐이니 따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삶이란 본래 이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함 속에 얼마나 깊고 오묘하며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 안에, 이 평범한 일상 속에 말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이렇게 말했지요. 森羅萬象 悉皆成佛 삼라만상 실개성불 삼라만상이 이미 다 성불해 있더라. 우리 自身이 이미 이대로 부처(佛)입니다. 고아인 그대로, 부족하고 초라한 그대로, 강박과 대인공포 때문에 매 순간 쩔쩔매는 그대로, 생로병사에 매인 이대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한 마음’을 일으켜 지금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무엇을 찾거나 求하지만 않으면, 우리 안에 本來 갖고 있던 無限하고 永遠한 것들을 남김없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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