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보설:<2. 법문(法門) :
'본래 마음'은 인식작용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본질이다.>
왜 쉬지 못 하는지· · · 원인까지도 다 알아요. 그런데 그 원인을 알아서 그 원인을 해소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서 놓여난다는 그 구조가 만약 옳은 거라면, 우리 인류는 벌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어야 맞아요.· · · 原因을 알아서 原因을 除去함으로 해서 苦痛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런 生覺은, 우리가 相對世界에서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思考方式일 뿐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고통이 지금 싫지요? 고통이 싫어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요? 그래서 설사 그 노력이 이루어졌다 해도, 그 自體가 相對的인 거요.· · · 이쪽 저쪽이란 말입니다. 계속 이쪽 저쪽이에요. 우리 世界의 構造 自體가 그렇게 相對的으로 되어 있는 거요. 그 싫어하는 내용이 뭐였건 상관없이 뭔가를 지금 싫어한다는 건 그와 반대되는 것을 희구한다는 얘깁니다. 이게 所謂 二元性이오. 그게 지금 둘로 갈라져서 사단이 난 겁니다. 생기면서부터 認識의 主體를 세우고 認識의 對相을 세우는 그런 버릇이 생긴 거요. 그렇게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마음이 둘로 갈라진 겁니다. 本來 '한 마음'은 인식의 주체니 객체니 하는 두 法이 없는 거요.
때문에 그래요. 本來의 마음이 어떤 거라고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것은 이런 것이다', '과거에 내가 알았던 그 어떤 것하고 같은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머리에 떠올라야 돼요. 그러나 本來의 마음은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그런 對相이 아닙니다. 나에 의해서 認識되어질 수 있는 그런 對相이 아니고, 나의 모든 知覺 作用을 可能하게 하는 그 本質입니다.
추구하는 것은 '본래 마음'이 아니고, 그 '본래 마음'이 두 번 세 번 굴러서 그럴싸하게 여겨지는 어떤 心像이요. 내가 그린 어떤 이미지, 理想. '본래 마음'은 우리가 추구할 수도 알 수도 없어요. 설명할 수도 없고 알아보려고 해도 소용없는, 時間 空間을 넘어선 存在입니다. 왜 그렇겠어요?· · · 우리의 生覺이 굴러서, '本來 마음'이 굴러서 시간개념이니 공간개념이니 자아개념이니 하는 게 생긴 거요. 우리 인간이 개발해낸 어떤 이론도 넘어서 있어요. 우리 인간이 구성해낸 어떤 가치 척도에도 걸리지 않아요. 가치관을 넘어서 있다 소립니다. 그건 完全히 本源的인 걸 말하는 거요. 그게 우리 '본래 마음'이오. '본래 마음'은 지혜롭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아요. 본래적인 거는 어디서 얻는 게 아니고,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이 몽땅 虛妄한 것이라는 事實을 깨달으면, 그래서 그 虛妄한 마음을 따라가지 않으면, '本來 마음'은 늘 恒常 거기에 있었던 거라는 걸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본래적인 마음은 온 누리에 두루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自己中心的으로 스스로를 孤立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나하고 너가 엄연히 다르게 보이지만, 우리의 本來 性稟, '본래 마음'은 온 누리에 두루해서 모든 이런 것과 모든 저런 것이 시공을 초월해 몽땅 한 뿌리요, 한 성품인 겁니다. 청정자성(淸淨自性), 法性, 法界, 眞理, 眞如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쓰는 여러 일상용어 중에서 본래 마음과 가장 가까운 말이 있다면, '소박한 마음' 정도의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소박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가 '이것이 소박한 마음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소박한 마음 아닌 거를 알아내 봅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 가운데 소박한 마음이 아닌 거,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훌륭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회적인 도덕성이라든가, 훌륭하다고 추구하고 있는 것, 어떤 이상을 만들어놓고 그 이상에 접근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것이 과연 이 소박한 마음에 해당하는가 안 하는가 지금 그걸 알아보는 거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내 건데 뭘 추구하겠어요? 그래서 '부처가 또 부처를 찾는다'거나, '대장부가 머리를 두고 또 머리를 찾는다'는 말이 있는 거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는 둥, 그런 비슷한 소리를 많이들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대개 이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똑똑한 정신'은 소박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 소릴 들으면 이원적으로 길들여진 여러분은 금방 '그럼 멍청한 정신이면 되겠네' 하겠지요?· · · 똑똑해도 틀리는데 멍청한 걸 어디다 쓰겠어요?
자기 현시, 자기 확인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또 신념이 많아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아주 굳어져 버린 사람, 그렇게 지식이 많고 신념이 많은 마음은 소박한 마음이 아닙니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뭔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안정되게 해주고 보다 훌륭한 내가 되기 위해서 나한테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인가에 자꾸 依持해요. 종교에 依持하건 철학에 依持하건 사상에 依持하건, 또 뭐하면 어떤 정당에 몸을 담던가, 어떤 이념을 추구한다든가 그러는데, 그런 정신은 전부다 소박한 마음이 아니오.
'본래 마음'이 돌아올 것 아니겠어요?· · · 그러나 절대로 이 경박한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해선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 · 경박한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瞬間,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두 갈래가 나기 때문이오. 지금 '나'는 경박하죠? 그럼 경박함을 없애고 경박하지 않은 '나'가 되려고 애쓸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경박한 '나'가 경박하지 않은 '나'로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 노력에다가 어떤 정당성이라든가 힘을 부여해요. 그리고는 정신 없이 내달아요. 지금 이 점이 중요합니다.· · · 우리가 어떤 意志的인 노력이나 뜻을 세워, '이건 아니다' 하고 判斷하고 결론 내려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순간 '나'와 '나 아닌 것'의 二重的인 作用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작용 속에 그 '나'가 지속되는 거요. 지금 현재의 '나'는 불만이기 때문에 이놈이 다른 것으로 돼야 하잖아요? 다른 보다 나은 그 어떤 것으로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게 계속 '나' 아닙니까?
혼란스러운 이 마음을 그와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하는 한, 그 우둔함은 계속 되는 거예요. 혼란은 계속된단 말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봐라· · · ' 그것이 성인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몹시 우둔하고 마음이 좁아터지고 인색하고 탐욕스럽다는 사실을 그냥 바라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경박하지 않은 참다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그냥 보세요, 일체 토를 달지 말고, 이름 붙이지 말고. 경박함이 됐건 우둔함이 됐건 탐욕스러움이 됐건 그게 뭐 건간에 그냥 볼 수 있는 마음, 그게 '本來 마음'이오. 이렇게 또 설명하면 '본래 마음'에 흠집을 내는 거요. '본래 마음'은 차별이 없어요. 옳고 그른 것도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어요. '본래 마음'은 허공 같아서 거기엔 아무런 중심이 없어요. 거기에는 고여 있는 것도 없고 축적된 것도 없어요. 때문에 이 '본래 마음'은 모든 것을 그냥 볼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그냥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본래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축적한 허망한 식심(識心)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뭔가를 계속 取捨選擇하고 뭔가를 취향하기 때문인 거요. 그게 전부다 '나'라는 중심 때문에 생겨난 거요. 이 '본래 마음'은 도대체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꾸 노력해서 얻으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원인을 닦아서 결과를 추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한 거요. 원인을 닦아서 결과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본래 마음'이 뭔지 모르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추구하지 않으리라' 하고 얘기하겠죠? 그러면 그 사람은 벌써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경지'를 추구하고 있어요. 벌써 때를 묻혔다고.· · · 그래서 '지혜 광명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 빛나게 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겁니다. 닦고 맑히고,· · · 그게 전부다 이 '나'를 훌륭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강화, 자기 확대의 노력이지 저 '本來 마음'하고는 상관없는 거요. 내가 저 '본래 마음'이라고 했는데 저 '본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저 '본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오. 저 '본래 마음'이라고 말하는 그 놈이 바로 그 놈이오. 어쩔 수 없이 언어나 문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요. 이 이치를 잘 이해해서 그 언어나 문자를 사용하면서도 그 언어나 문자의 굴레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어나 문자에 붙잡히지 않아야 된단 말입니다. '본래 마음'을 찾은 사람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마침내 알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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