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無緣慈悲 무연자비

장백산-1 2014. 11. 25. 18:37

 

 

 

 

    ◈ 완릉록 13. 無緣慈悲|자유로운 공간

       

 

          보현행 | | 조회 14 |추천 0 | 2014.11.25. 00:11 http://cafe.daum.net/wono1/H43v/16092 

 

 

 
  

◈ 완릉록 13. 無緣慈悲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 어떻게 慈悲를 베풀어 法을 설하십니까?"

"부처님의 자비란 因緣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말한다. 사랑함[慈]이란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見解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見解를 내지 않는 것이다. 說하시는 法은 說함도 없고 保任도 없으며, 그 法을 듣는 者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摩術師가 摩術로 만들어 놓은 人間을 상대해서 說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의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慈悲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겠느냐? 스스로 本來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원오당 한소리********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 어떻게 慈悲를 베풀어 法을 설하십니까?" 배휴의 질문 내용이 무엇일까?

自己 스스로 疑心을 만들어 自己의 生覺을 일으켰다. 그럼 한 瞬間 일어나는 本心의 作用일까? 아니다! 텅~빈 조용한 本바탕에 한바탕 煩惱인 記憶을 더듬어서 禪知識은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 불쌍한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 便安함을 얻게 하고 깨닫게 한다는

造作된 生覺을 일으킨 것이다. 왜 그럴까? 自己의 疑心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황벽스님이 이 말에 또 情을 베풀어 그대 그래 답답하신가

내가 답답함을 풀어줄께 라고 하실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자비란 因緣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한다. 사랑함[慈]이란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설하시는 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本心의 立場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本心에는 그 어떤한 疑心도 慈悲心도 없다. 뭍고 답하는 說法도 없다. 묻는데 답하는 것은 因緣이다. 質問이 있으니 答을 할뿐이다. 그래서 '부처의 자비는 因緣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한다' 큰 자비는 本心의 입장에서 하는 말씀이고, 因緣을 세워서 말하자면 卽 차제를 세워 말을 한다면 '사랑함[慈]는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시어 먼저 本心의 텅~빈 바탕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래서 因緣法이 通하지 않는 텅~빈 바탕 本心은 무정(無情)이요 無識, 무작(無作)인데 텅~빈 바탕 本心에 어찌 說法이 붙을 수 있느냐 그래서 이렇게 첨언 하신다. '부처가 설하시는 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法을 듣는 者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시어 本地風光을 드러내신다. 本地風光으로는 알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는 황벽스님은

부연하여 다시 이렇게 첨언을 하신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하여 說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慈悲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生覺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을 수 있느냐? " 자 여기서 本心을 조금이나마 기미를 느껴 보라고 참 자비를 베풀고 계신 것이다. 산새들의 노래소리와 虛空에 떠다니는 구름의 한가로움을 개울가의 시냇물의 無情曲과 自然이 들려주는 無情說法 등이 다 眞正한 說法이다. 마음을 일으켜 하는 說法은 그래서 다 方便說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마치 텅~빈 바탕 本心에 煩惱와 妄想의 바람을 일으켜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듯하는 說法을 듣고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배워서 알고 生覺을 움직여 慈悲心을 내고 하는 有爲造作으로는

우리 本心의 그림자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有爲造作이 없는 無情說法 ,卽 우리의 本心은

山河大地 三千大千世界를 두루 抱攝하여 녹아있는

虛空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 自然을 通하여 本心과 하나 하나 附合해 나가는 것이다.

 

保任이란 원래 이미 깨달아 있는 마음을 現象界의 現象에 代入하여

그 緣起의 實相, 緣起空性을 透得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 혜능대사도 마음을 깨친 후 가사를 이어받았으나

16년동안 사냥꾼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山川을 떠돌면서

마음의 作用과 德相을 自然과 하나하나 一致시켜 나갔던 것이다. 學門과 學術과 知識이 아닌 無情說法인 自然界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保林이라는 悟後 修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사님들의 행적을 더듬어 간파해 보면 다 그런 過程을 거쳐 왔다는 사실을 알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스스로 本來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說法을 하는 것은 봉사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은 것이며. 造作된 理論이나 知識이나 觀念으로 하는 說法은 하는 者도 듣는 者도 다 코끼리 다리만지기와 다름이 없어

다 지옥으로 스스로 가고 있는 것이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者는 누구에게 說法을 듣고 내가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래서 황벽스님 역시 慈悲를 묻는 배휴에게 부처님의 큰자비와 함이 없는, 因緣이 아닌 無情說法과

참 그대로의 慈悲인 무연자비(無緣慈悲)를 說하신 것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