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 완릉록 17-4 그것이 바로 菩提이니라

장백산-1 2014. 12. 7. 23:34

 

 

 

 

◈ 완릉록 17-4    그것이 바로 보리이니라완릉록 보         

     보현행 |2014.12.07. 10:32   http://cafe.daum.net/wono1/H43v/16115 

 

 

 

 

◈ 완릉록 17-4   그것이 바로 菩提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설사 널리 배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나무먹이를 먹고 풀옷을 입는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自己의 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라. 그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고 하며 모두 다 천마(天魔),
 外道, 물과 뭍의 여러 鬼神 노름을 하는 것이니, 이같이 修行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느냐?

 

 지공화상이 말하기를 '本來 몸은 自己의 마음이 짓는 것이어늘, 어찌 文字 속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지금 自己 마음을 알아서 思量 分別하는 妄想 煩惱을 쉬기만 하면 六塵/六境/六賊의 煩惱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직 寢床 하나만 두고  病들어 누워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니라.
 지금 앓아 누워서 攀緣을 모두 쉬어 妄想이 그쳐서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菩提이니라.

 

 

 

********원오당 한소리********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설사 널리 배우고 부지런히 修行하며, 나무먹이를 먹고 풀옷을 입는

苦行을 한다 하더라도 自己의 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라.]

여기서 이 뜻이란 앞단에서 말씀한
"모든 중생이 生死에 輪廻하는 것은 뜻으로 攀緣하고 분주히 造作하는 마음이 六途에서 멈추지 못하여,
마침내 갖가지 苦痛을 받게 되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이다.


 

중생이 六途에 輪廻한다 함은

바로 스스로의 마음을 造作함으로

境界에 執着하여 六途를 輪廻함으로 이 境界에 執着함을 멈추지 못하여
계속 마음을 지어감으로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하신 말씀인데

이 뜻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까, 저렇게 하면 고통이 극락으로 바뀔까, 하면서
유위적(有爲的) 修行을 통하여 고통을 극복하려는 行爲를 우리는 수행(修行)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조작(造作)이요 견해(見解)인 것인데. 일승법(一乘法)이 아닌 인연법(因緣法)을 받아들이고
無爲가 아닌 有爲的 行爲인 苦行같은 길을 修行이라고 錯覺하고,
그렇게 모든 불교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께서도 처음에는 고행을 통해서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수행이 부질없음을 아시고 냇가에서 목욕을하고 몸을 단정히 하신 후에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편안히 앉아 스스로의 마음을 관(廻光返照)하여 7일만에 깨달음을 證得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설법시 마다 고행이나 몸을 괴롭혀 하는 행위의 수행은 절대 못하게 하시고
오직 마음만을 觀하여 冥想에 들것을 經典마다 권하였든 것이다.

작금에도 우리주위에서 초근목피하고 이상하고 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수행자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알것이다.
그러나 몸을 수행시키고 아무리 단련시켜도 그것은 오직 몸의 훈련을 통한 運動이고 연마에 불과한 것이다.


 

행위적으로 하는

불교 미술, 불교 의식은 전부 세상인간들이 좋아하는 것만 모아서 하고있다.범패라고 하는 바라춤이 이제

불교대학까지 만들어 가리키고 그것이 불교의 儀式인양 큰 스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祭에 참석한 제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저잣거리에서 불러온 풍물패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범패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바라다. 피리. 깽과리. 승무다하여 정말 큰 스님들이 하는 행위인줄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어떻한 몸으로 하는 行爲는 佛敎와는 관계없는 것이며, 마음을 떠나 행한 행동이라도 하는 것은
전부 사마외도인 것이라고
황벽스님은 힘주어 말씀 하신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마음을 모르는 以上  修行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고 하며 모두 다 천마(天魔), 외도, 물과 뭍의 여러 귀신 노름을 하는 것이니,
이같이 수행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느냐?"
황벽스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들은 무엇이 생각나는가?


 

몸으로 하고 祭祀를 지내고 四物을 치는 行爲, 例佛이라며, 祝願이라며, 천도제라며,
절에서 하는 모든 行爲들을 잘 觀察해보라. 이것들이 다 삿된 수행, 천마, 외도, 뭍과 물의 귀신노름이다.'라고

하신다. 다시 한 번 잘 觀察해 보시길 바란다. 우리가 하고 있는 사찰풍경에서 부처님의 本來 뜻과 行을 찾기란

참으로  낙타를 타고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보다 더욱 어렵게 말들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사찰의 세속화 財物에 대한 欲心  형식화 圖色化  組織化  事業化 등으로 變質되어,
사찰인지 스님인지 백화점인지 장사집인지 만물잡화상인지 정말 알 수가 없게 되여만 간다.

 

 

그러니 세속 범부들이야 누굴 따라가야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누구에게 法을 물을지 불교 tv를 보라.

참 말을 할 수 없게 되였다. 이제 불교사업, 종교사업, 복지사업, 장례사업, 납골당사업 불상판매

불경판매 스님판매 불교방송 불교신문.... 등  모든 것이 事業 事業 事業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불교라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스님이란 말을 어디서 할 수
있겠는가?
귀신놀음에 날새는줄 모른다고 그래서 납승이 하는 말,
절에 가지마라.
死佛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산 부처가 죽은 부처에게 절하지 말라'라는 말은 정말 못하겠다.

혜암스님이 '선문찰요'를 지어 책머리에 올려놓은 글이다. 이로 인해 어떻게 되였는가?
102세까지 수덕사 조실로서 그렇게 정법안장을 위하여 노구를 이끌고 미국까지 다녀셨지만
만인에게 나쁜 스님 이란 말과 마구니란 소리까지 듣게 되였고,
그 제자들은  은사를 다 바꿔버렸으니..........!
혜암스님 이후에 우리곁에 禪知識이 누구시든가? 우리곁에 오신 선지식이요 참 스승인데

 

그러니 어디서 부처님의 심인(心印)이요 마음법(一乘法)이 발 붙일 곳이 있으며, 납승(衲僧)들의 말을 듣겠는가

무학대사가 무엇이라 말했는가 '개 눈에는 개만 보이고 돼지같이 생긴 인간 눈엔 돼지 밖엔 보이지 않는다고.'

生覺은 全部  自己마음의 狀態를 말하고 표현한다

形相은 사람이지만  人面獸心의 끔직한 살인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그 人間의 心性에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런 觀念으로 꽉~차 있음으로 그 人間에게는 그런 짓이 當然한 것이다

眞理 입장에서 보면 殺人을 해도 그 인간에게는 당연하고 해야 할 일이 일어 났을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일어난 것일 뿐이니까'

그러니 그 인간의 알음알이인 思考와 觀念이 얼마나 重要한 것인가!

 

 

그러다 보니 희대의 참사로 남긴 일본의 옴교의 교주를 보라 그 분은 나름 수행하고 마음을 밝힌 禪知識이였다.

깨치고 보니 人間이란 이 動物은 이 지구상에 살아있어서는 안되는 이 우주에서 제일 지독한 毒蟲이였다

그래서 신도들을 시켜 모든 인간을 다 죽여라 人間만 이 지구상에서 없으지면 평화로운 세상인 華藏世界가 열린다는

極端的 觀念으로 빠져버렸다.

그래서 지하철 및 공공장소에서 독가스로 집단살생을 감행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의 경우를 드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自己觀念의 表出이 바로 化身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이런 極端이 바로 偏見이요 마구니인 것이다. 中道 實相에 住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眞理는 끊어지지 않는다. 형식적 법맥은 끊어져도

절로 절로 그렇게 原來부터 如如하게 생겨있는 이 自體가 眞理요 부처(佛)이니까.

 

유위적 수행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나서 다시 지공화상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하신다.


"지공이 말하기를 '본래 몸은 자기의 마음이 짓는 것이어늘, 어찌 문자 속에서 구하리오?'라고 말씀하였다.
지금 自己마음을 알아서 思量 分別하는 妄想을 쉬기만 하면 六塵의 煩惱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몸이란 것이 實際하는 것이 아닌 微塵 일진데 어찌 헛된 物質을 단련하여 修行이 되겠는가.
오직 마음의 化身이 몸이라면 몸의 주인인 마음의 움직임이 바로 몸이요
형상인 것이다.
그래서
본래 몸은 자기의 마음이 짓는 것인데 언어 문자나 밖을 향해 구하겠는냐고 하신다.
그러니 모든 형상은 마음의 化現임으로 마음을 觀하고 
내 마음의 性稟을 觀하는 것이 바로

참다운 수행(回光返照)이 될 것이다.

思量 分別하는 六塵의 煩惱 亦是  本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밖으로 求해 貯藏한 내가 만든 것이므로
내 마음을 觀하여 六塵의 煩惱 妄想이 부질없는
虛想이라고 아는 瞬間 모든 것이 消滅해 버리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 외에는 아무도 六塵의 妄想 煩惱를 없애 주지를 못한다. 세상의 그 어떤 신(神)도 내 마음을 없앨 수 없다.
오직 自己 스스로인 자성불(自性佛)만이
六塵 煩惱를 消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말하는 것이다.

自繩自縛(자승자박)   無繩自縛(무승자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도 미진하여 황벽스님이 참자비를 베푸시어 유마경까지 보이시며 다짐을 받으시는 것이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직 침상 하나만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지금 앓아 누워서 반연을 모두 쉬어

妄想이 그쳐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菩提이니라.]

 

은유법으로 설해진 유마경의  '침상에 병들어 누워있다'라는 말은
우리 몸의 活動이나 움직임은 全部  分別心 煩惱와 妄想心으로 움직이고 행한다.
寢床이란 本來面目을, 病이란 無心을 일러 말씀하신 것이다.
즉, 無心한 狀態로  自己 自性에 住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무슨 修行이냐, 修行 以前의 本來모습인 것이니
이것이 萬相을 投影하는 우리의 본심(本心)이며 심지(心地)인 참 성품(眞性)이며,

바로 般若智慧인 보리(普提)이다.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