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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상도 없다, 유식의 식전변과 십팔계

장백산-1 2014. 12. 14. 17:30

 

 

 

 

나도 세상도 없다, 유식의 식전변과 십팔계  |불교방송 다시듣기

 

 

 

나도 세상도 없다, 유식의 식전변과 십팔계

 

 

 

初期佛敎에서는 내가 世上을 만나고 接觸함으로써 認識이 發生하는 過程을 十八界로 설명한다.

十八界란, 눈귀코혀몸뜻 6根이 色聲香味觸法 6境을 만날 때 6識이라는 認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눈(眼根)으로 對相(色境)을 볼 때 보아서 아는 마음인 眼識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6根도 6境도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로 因해 緣起되어 생겨나는 6識 또한 實體가 아니라고 한다.

 

卽, 우리 生覺에는 여기에 있는 나와 바깥에 있는 世上은  實體的이고 獨立的인 것이어서 내가 바깥의 對相을

認識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나도 세상도 空하고, 認識한다는 것 또한 緣起的인 虛妄한 現象일 뿐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바깥에 있는 對相을 본다고 錯覺하지만, 事實은 내 안에 보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보이는 對相도 別度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對相을 볼 때 우리 意識은 過去에 經驗한 記憶들을

재빨리 檢索한 뒤에 그와 비슷했던 記憶을 떠올려 그것과 比較 對照해서 지금 눈앞의 對相을 過去의 記憶으로

대충 묶어서 規定지어서 보는 것이다. 卽, 바깥의 對相 自體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過去 經驗情報라는 記憶의 조각들과 業의 그림자라는 網에 걸러서 머릿속으로 대충 認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내 마음 안에서 바깥 對相을 因緣으로해서 過去 經驗情報의 또 다른 記憶의 잔재를 꺼내 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눈귀코혀몸뜻(六根)으로 色聲香味觸法(六境)이라는 對相을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빛깔, 소리, 향기, , 감촉, 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內面의 진부한 記憶들을 再組合해서

再上影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내가 世上을 보는 것이 아니라, 結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을 唯識에서는 말 그대로 오직 識 뿐이라고 한다. 오직 識일 뿐이지 別度로 自我라는 實體와

世上이라는 實體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世上 모든 것은 識이 轉變하여 虛妄하게

造作된 것으로써 識이 主觀  客觀으로 轉變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識이 轉變한 것 中에 認識 主觀 卽,

보는 識의 部分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보여지는 認識의 對相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내가 저 바깥의 꽃 한 송이를 볼 때, 꽃을 보는 識은 見分이고, 보여지는 꽃 한송이는 相分이다.

이 둘이 따로 나뉘어진 意識이 아니라, 事實은 둘 다 내 마음의 作用인 認識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緣起的,相互依存的으로 成立되는 것이지, 별도로 나(見分)과 꽃(相分)이 獨立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認識은 見分과 相分 卽, 主觀과 客觀이 서로 關係를 맺음으로써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關係를 맺는다’

혹은 ‘因緣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緣’이라고 한다. 主觀의 보는 認識 部分인 見分은 ‘能히 緣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能緣'이라 말하고, 보여지는 認識의 對相은 緣해지는 對相이라는 뜻에서 ‘所緣’이라고 말한다.

 

또한 認識을 말할 때 이 이란 分別한다, 헤아린다(思量)라는 의미로 能緣의 識이 所緣의 境界를 分別해고

헤아려서 알기 때문에 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卽, 認識 主觀을 能量, 認識 對相을 所量이라고 말한다.

 

이상을 綜合해 보면, 唯識에서 말하는 識轉變說의 核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평소 안에 있는 와 밖에 있는 대상을 獨立的, 實體的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唯識에서는 그 안팎인 主觀 客觀 둘 다 識이 轉變한 것으로써 虛妄한 것이라고 말한다.

認識하는 主觀인 見分도 能緣識으로 識이 轉變한 것이고, 認識 對相인 識의 對相 卽, 所緣境 또한

識이 轉變한 것 卽, 識所變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唯識에서는 언뜻 보기에는 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듯 보이지만,

初期佛敎의 緣起, 無我, 大乘, 中觀, 空 思想을 連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나도 없고 外部에 마주하는 對相도 없는 가운데서, 내가 있다고 錯覺하고,

좋고 싫은 外部 對相이 있다고 錯覺하는 虛妄한 生覺으로부터 우리 삶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모든 대상과 사람들은 事實 그들만의 獨者性을 지닌 누군가이거나 무언가가 아니라,

事實은 내 마음 안에서 그렇게 認識된 緣起的인 텅~빈 空한 存在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 한 곳이라도 집착할

곳은 없다. 虛妄한 分別心이 헤아려서(思量) 能量과 所量이라고 分別할 뿐, 分別할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07:50~08:00) 방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