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내가 그린 내 그림에 내 人生이 드러나네

장백산-1 2015. 1. 15. 20:43

 

 

 

 

 

◈ 완릉록 20. 배휴의 헌시

    

 

 

◈ 완릉록 20. 배휴의 헌시
 

어느 날 배상공이 佛像 한 구를 대사 앞에 내밀면서 호궤(胡 )합장하며 말씀드렸다.
"청하옵건대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배휴!"
"예!"
"내 너에게 불상 이름을 다 지어 주었노라." 그러자 배상공은 곧 바로 절을 올렸다.

하루는 상공이 시(詩) 한 수를 대사께 지어올리자
대사께서 받으시더니 그대로 깔고 앉아 버리면서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상공의 시가 이러하였다.

대사께서 心印을 전하신 이후로 이마에는 둥근 구슬 몸은 칠척 장신이로다.
석장을 걸어 두신 지 십년 촉나라 물가에서 쉬시고
부배(浮杯)에서 오늘날 장( )의 물가를 건너왔네.
일천 무리의 용상대덕들은 높은 걸음걸이 뒤따르고
만리에 뻗친 향그런 꽃은 수승한 인연을 맺었도다.
스승으로 섬겨 제자 되고저 하오니 장차 法을 누구에게 附囑하시렵니까?

대사께서 대답하여 읊으셨다.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 가이 없고
입으론 붉은 연꽃을 토하여 병든 몸 기르네.
비록 한 쌍의 일 없는 손이 있으나
한가한 사람에게 일찍이
 공경히 읍(揖)한 적이 없었노라.

 

********원오당 한소리********

 

[어느 날 배상공이 불상 한 구를 대사 앞에 내밀면서 호궤(胡 )합장하며 말씀드렸다.
"청하옵건대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여기서 佛像이라는 말을 한다.

사찰에 가면 제일 중심이 바로 금당이라하여 대웅전이 있듯이 대웅전 안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항마촉지인상인 불상이 모셔져 있고

양옆으로 功德藏과 作用을 뜻하는 文殊사리보살과 普賢보살을 모시고

그 옆으로 신중단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신 무량수전이나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 관세음을 모신 관음전 나한님들만 모셔놓은 나한전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 지장과 시왕을 모신 명부전

독성을 모신 독성각 산신을 모신 산신각 용왕을 모신 용왕각

수많은 殿閣들이 모셔져 있다.

 

이것이 다무엇일까?

설명을 할려면 책 한권도 더 써야 하겠지만

이것은 전부 다 마음의 본체(法身佛), 공덕장(報身佛),작용(化身佛)인

삼신불(三身佛)形像으로 나타낸 것이다.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고 바라고 願하는 바가 천차만별이요.

所願하고 誓願함이 끝이없다.

 

그러니 부처님세계도 끝이 없다.

그래서 불상을 가져온 배휴가 불명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아직 내 마음에 主人으로 住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나를 保護해주고 힘을 주는 他神을 모시고 依持를 하고 싶다는

배휴의 자신의 마음을 佛像이라는 形像을 빌어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황벽스님이 무어야 말씀하겠는가.

이렇게 납승처럼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直說的으로 나타내신다.

 

["배휴!"
"예!"
"내 너에게 이름을 다 지어 주었노라."]
마음이 境界이고   境界가 마음이다.
배휴가 가져왔으니 이것이 바로 배휴 그대의 마음이라는 말이다.

굳이 佛名을 붙이자면 배휴佛이라 해야겠지.

그래서 배휴라고 불러 놓고 그렇게 배휴불이라고 하시면서

이름을 지어 주었노라고 하신다.

그래도

배휴가 알아듣고 맞다. 내게 아직 習氣가 남아있었구나

眞理란 形像과 名色을 떠나있는데

累億劫의 習氣가 아직 남아 있었음을 알고

[그러자 배상공은 곧 바로 절을 올렸다.]

 

알겠는가.


[하루는 상공이 시(詩) 한 수를 대사께 지어올리자
대사께서 받으시더니 그대로 깔고 앉아 버리면서 물었다.]

시를 한 수 지어 올렸다는 것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배휴의 정(情), 마음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적어 올렸다.

사람들은 다 이 情, 마음으로 산다.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고맙다 감사함을 표하면서 서로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이것이 아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간(人間)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일승(一乘)法會場이다.

一乘은 이미 인연법(因緣法)을 떠났고 무정(無情)이요 무심(無心)의 境地를

논하고 드러내어야 하거늘  특히 언어도단(言語途斷)이거늘

情과 뜻 마음이 듬북 담긴 詩를 올렸으니

 

황벽스님이 과연 그렇게 해서야  언제 主人公이 되며  無心한 境地로 갈것이냐.

이런 세간에서나 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벗어나라는 뜻으로

詩를 깔고 앉아 다시 이렇게 뭍는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알겠느냐?

하니 아직 習氣가 남아있는 그리고  社會에서 상공이라는 職責에 있는데

스스로 人間關係를 벗어남이 어렵다는 뜻으로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아는 것은 무엇이며 모른다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남의 것을 도둑질한 學文과 哲學과 生覺들로 武裝한 觀念이라는 것을

내 앞에 내세워 世上의 무엇이든 와라 내가 이 觀念으로 너를

굴복시켜 나의 또다른 識心의 먹이감으로 너를 잡아먹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을 자식으로 키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一乘에서 본다면 새로운 業을지어

生死苦海로 흘러 들어가는  因緣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안다고 하고 아는척 하는 짓이 一乘에서 보면 죽은 사람인 것이다.

지금 自己의 永遠性은 사리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식심(識心)의 境界인

觀念이 實體化 固定化되어 自己를 代身하고있다.

그러니 이렇게 배워서 아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 위패에

顯考 學生 아무개...神位

또는 顯考 법무부장관 어디 아무개 神位라고 써서

그 觀念의 자리가 自己 이름 앞에 와 그 자리가 固定化 되면

그 자리가 저승이 되는 것이다.

 

觀念이란 固定化된 思考 生覺이고 이것이 그 이상의 어떤 것도 受容하지 못하는

장벽이 되고 방어막이 되어서 聖人의 말씀이던 自己보다 더한 學文이나 知識마져도 받아 들일 수 있는 空間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 하고 아는게 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에 빈 空間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안다는 것은 전부 남에게 들은 소리이지

내가 스스로 안것은 익혀진 기능 밖엔 없다.

즉 識心에 拘碍받지 않고  나의 마음은 텅~비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텅~비어 있으니까 볼 수 있고

마음이 텅~비어 있으니까  들을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른다가 바로 다 알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모른다고 하니 조금은 낳은 편이다 형상이나 글로써 마음을 造作하는 行爲가

잘못되였다는 것을 알아차려 直心으로 듣고 바로 말하라.

글로 쓰고 形相을 만들고  造作하는 것이 마음의 病이니

그 어떤 것도 造作하지 말고 形相化 하지 않는다면 바로

報身佛과 化身佛이 사라진 텅~빈 淸淨한 法身佛인 너의 本來모습이며 本心인

自性佛이 밝게 드러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알겠는가?

 

[상공의 詩가 이러하였다.

대사께서 심인을심인을 전하신 이후로이마에는 둥근 구슬 몸은 칠척 장신이로다.
석장을 걸어 두신 지 십년 촉나라 물가에서 쉬시고
부배(浮杯)에서 오늘날 장( )의 물가를 건너왔네.
일천 무리의 용상대덕들은 높은 걸음걸이 뒤따르고
만리에 뻗친 향그런 꽃은 수승한 인연을 맺었도다.
스승으로 섬겨 제자 되고저 하오니 장차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

 

시의 내용은 황벽스님을  공경칭송하는 내용 그대로다.

마지막 한 귀절에 그 뜻이 다 들어 있다.

황벽스님에게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

이 대목에서 부촉이란 스님이 입적하시고 나면 누가 스님의 뒤를 이어

스님이 설하는 일승법이 세상에 유포되게 그 법맥을 이어 나가게 할 

제자가 누구냐고 뭍고 있다. 그러니 무어라 하시겠는가?

 

황벽스님의 법은  마조 백장으로 이어져온  일심법(一心法)인데

이것은 바로 마음이다.

그런데 이 형상도 없고 글로도 쓸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일심법이라고 말하지만

法을 떠난 무법(無法) 인데  이것을 어떻게 전한다는 말인가.

스스로 알고 펼쳐고 누릴뿐 전하고 받는 물건이 아닌데.

누가 누구에게 전하고 부촉한다고 하느냐.

그래서  이렇게 게송으로 답을 하신다.

 

 

[대사께서 대답하여 읊으셨다.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 가이 없고
입으론 붉은 연꽃을 토하여 병든 몸 기르네.
비록 한 쌍의 일 없는 손이 있으나
한가한 사람에게 일찍이
 공경히 읍(揖)한 적이 없었노라.]


 

마음마음 마음이라 이름지어 말지만은

 마음이라 하는것은 그마음이 아니로다

이름없고 형상없어 무엇이라 할것인가

識心境界 그마음을 굴려봐도 알수없네

 

동해바다 푸른물이 출렁이고 출렁인다

그언제나 출렁인다 바람인가 파도인가

파도라고 말지만은 그파도가 이아니고

바람따라 일렁여도 같이한적 한번없네

 

입으로는 설법한다 그렇게도 알지만은

입으로는 일승법을 설한적이 전혀없다

일승법은 설을해도 설한것이 하나없고

하루종일 앉았지만 일승법을 설하였네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시와 일체처가

無定說法 항일하여 온천지가 설법이라

귀있는자 들어보고 눈있는자 볼지니라

어느것이 法일거며 어느것이 法아닌가

 

그이름이 무엇이든 부르면은 사라진다

명색만을 안다지만 名色이란 헛것이다

虛空꽃이 滿發하니 虛名만이 가득하네

도둑불러 자식같다 사랑한다 하는구나

 

마음깊이 모습없는 일없는이 있었으니

이세상에 그누구도 본사람이 하나없네

안보이고 흔적없어 無明이라 하였지만

시계바늘 세개합쳐 하나되니 영시로다

 

영시라고 불러지만 열두시도 삼합이요

열두시라 부르지만 이십사시 어떠한가

자정이라 부르리까 정오라고 부르리까

다시삼합 이룬자리 영시일까 본자릴까

 

돌고돌아 제자리로 아니옴이 없건만은

그아무리 좋은산도 올라가면 내려오고

하루종일 오고가도 내침대로 돌아오네

무엇한다 바빳지만 記憶만이 쌓였구나

 

태어날때 그자리가 죽는자리 그대로고

죽는자리 그자리가 태어나는 그자리네

태어남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한生覺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자리네

 

저허공에 구름없음 하늘인줄 모르더니

흰구름이 떠있으면 하늘좋다 하는구나

虛空있다 아는것은 구름보고 알아지듯

形相없는 그主人은 生覺있어 아는구나

 

부질없는 生覺속에 三合하여 있었으니

안보임이 있음이요 보이는것 虛像일세

境界따라 나타났다 境界따라 사라지는

안보이는 主人空이 그대참나 主人이다

 

主人空은 바보같아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대어찌 世上天地 다아는척 날고뛰나

참아는게 무엇인지 깊이깊이 궁구하여

生覺境界 벗어나면 그대로가 마음이다

 

무엇있어 傳할꺼며 무엇있어 부촉할까

허허로운 心法界는 저虛空과 꼭같아서

세우면은 病이되고 안세우면 그대로다

原來자리 그대로가 眞實如常 眞如이네

 

황벽선사 심법계는 그대마음 똑같아서

더하지도 덜도않다 平常心이 道이듯이

그대마음 그대로가 三身佛이 이아닌가

이肉身이 法身이요 이마음이 부처로다

 

일거수에 일투족이 불타행과 다름없다

그대마음 그대로가 그대행적 나타내니

生覺이란 報身이요 行動함이 化身이다

그대主人 恒一하니 그언제나 함께한다

 

저허공에 구름가듯 걸림없이 살아가소

근심걱정 내만들어 힘든단말 하지말고

좋은生覺 일으키어 極樂에도 살아보고

나쁜生覺 일으키어 地獄에도 갔다오소

 

모든것은 내가지어 내스스로 받는거니

지어냄도 그대로고 지어감도 그대로다

내生覺이 내삶이요 한生覺이 人生이다

내가그린 내그림에 내人生이 드러나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자유누려  붓다처럼 살아가자! 

 


***본불본락(本佛本樂) 하옵소서! ()()()***

***화엄동산에서 원오스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