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한 수 지어 올렸다는 것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배휴의 정(情), 마음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적어
올렸다.
사람들은 다 이 情, 마음으로
산다.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고맙다 감사함을 표하면서 서로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이것이 아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함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인간(人間)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일승(一乘)法會場이다.
一乘은 이미 인연법(因緣法)을
떠났고 무정(無情)이요 무심(無心)의
境地를
논하고 드러내어야
하거늘 특히 언어도단(言語途斷)이거늘
情과 뜻 마음이 듬북 담긴 詩를
올렸으니
황벽스님이 과연 그렇게
해서야 언제 主人公이 되며 無心한 境地로
갈것이냐.
이런 세간에서나 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벗어나라는 뜻으로
詩를 깔고 앉아 다시 이렇게
뭍는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알겠느냐?
하니 아직 習氣가 남아있는
그리고 社會에서 상공이라는 職責에
있는데
스스로 人間關係를 벗어남이 어렵다는
뜻으로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모른다는 말이다.
아는 것은 무엇이며 모른다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안다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남의 것을 도둑질한 學文과
哲學과 生覺들로 武裝한 觀念이라는
것을
내 앞에 내세워 世上의
무엇이든 와라 내가 이 觀念으로 너를
굴복시켜 나의 또다른 識心의
먹이감으로 너를 잡아먹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을 자식으로 키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一乘에서 본다면 새로운
業을지어
生死苦海로 흘러
들어가는 因緣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안다고 하고 아는척 하는
짓이
一乘에서 보면 죽은 사람인
것이다.
지금 自己의
永遠性은 사리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식심(識心)의
境界인
觀念이 實體化 固定化되어 自己를
代身하고있다.
그러니 이렇게 배워서 아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 사람이 죽으면 위패에
顯考 學生
아무개...神位
또는 顯考 법무부장관 어디 아무개 神位라고
써서
그 觀念의 자리가
自己 이름 앞에 와 그 자리가 固定化
되면
그 자리가 저승이 되는 것이다.
觀念이란 固定化된 思考 生覺이고
이것이 그 이상의 어떤 것도 受容하지
못하는
장벽이 되고 방어막이
되어서 聖人의 말씀이던 自己보다 더한
學文이나
知識마져도 받아 들일 수 있는 空間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
하고 아는게 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에 빈 空間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안다는 것은 전부 남에게 들은 소리이지
내가 스스로 안것은 익혀진 기능 밖엔
없다.
즉 識心에 拘碍받지
않고 나의 마음은 텅~비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텅~비어 있으니까 볼 수
있고
마음이 텅~비어 있으니까 들을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른다가 바로 다 알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황벽스님도
모른다고 하니 조금은 낳은
편이다 형상이나 글로써 마음을 造作하는
行爲가
잘못되였다는 것을
알아차려 直心으로 듣고 바로
말하라.
글로 쓰고 形相을 만들고
造作하는 것이 마음의
病이니
그 어떤 것도 造作하지 말고 形相化 하지
않는다면 바로
報身佛과
化身佛이
사라진 텅~빈 淸淨한 法身佛인 너의
本來모습이며 本心인
自性佛이 밝게 드러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알겠는가?
[상공의 詩가
이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