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불일(不一)이라야 불이(不二)가 산다.

장백산-1 2015. 1. 29. 19:00

 

 

 

 

 

 

 

 

 

 

불일(不一)이라야  불이(不二)가 산다.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佛敎, 특히 大乘佛敎의 키워드 중의 하나는 불이(不二)라는 말이다.

不二란  ‘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부처와 衆生이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無明이 다르지 않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고,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不二의 世界觀이다. 超越的 열반관(涅槃觀)을 否定하고,

저 너머의 救援이 아닌 '지금 여기' 서 있는 자리에 救援의 可能性이 있다는 大乘佛敎의 精神이

壓縮的으로 表現되어 있는 말이다.

 


무아(無我)가 單純한 哲學的 槪念에 머물지 않고 慈悲라는 實踐 倫理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世界觀이 있어 비로소 可能해지는

것이다. 大乘의 精神이란 바로 不二的 世界觀의 實踐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불교인들이 자신의 성찰과 세상을 바라보는 입각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반드시 거기에는

不二의 철학, 不二의 세계관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크고 작은 불교 단체나 모임의 이름에도 “불이(不二)”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둘이 아니며” “다르지 않다”는 不二라는 意味가 얼마나 한국의 불교계에 普遍的 日常化가 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 한국 불교의 난맥상의 한 원인은 바로 이 不二라는 槪念의

誤用, 濫用에 있다.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임말이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不二)”라는 말을 할 때에는 “같지 않다(不一)”라는 말이 前提되어 있는 것이다.

‘衆生과 부처가 하나’이며 ‘無明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當然히 그 衆生과 부처가 다르며,

無明과 깨달음이 嚴格히 區別되어야 할 것을 前提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와 區別되는 나의 ‘衆生性’ (不一)이 철저히 認識될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不二의

存在論的 世界館이 可能한 것이다.

 

 

 

 

衆生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努力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當然한 말이지만 지금 한국의 많은 佛子들이 쉽게 看過하고 있는 것이 바로 衆生과 부처가

다르며, 無明과 깨달음이 다르며, 성(聖)과 속(俗)이 다르다는 ‘불일(不一)’의 精神이다.

‘煩惱 卽 菩提’라는 것 또한 깨달음을 어떤 超越的인 데서 찾지 말고, 救援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인데도 世間的, 生物學的 欲望의 煩惱를 그대로 發散하면서 不二의 가르침을 實踐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錯覺을 넘어 사기요 자기기만이다.

不二는 깨달음의 境地요, 부처의 境地이다. 이 境地를 중생의 境地로 錯覺하는 것이요, 그 錯覺의

根底에는 精神的 나태함과 방종을 修行의 境地로 호도하는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현대 한국 불교계에서 問題가 되고 있는 出家者들의 비윤리적 파계 행위도 이러한 착각 혹은

의식적 호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불교 전통에서는 7세기 원효와 근대 한국 불교의 경허 등이

보여주는 破戒 行爲를 불교적 깨달음과 世間的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 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를 도리어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한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佛敎的 깨달음의 本質的 問題, 이를테면

마음의 自由는 行爲의 自由를 保障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왈가왈부할 순 없지만, 重要한 것은 원효나 경허의 파계 행위 경우를

자신의 행위의 방종이나 정신적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禪의 精神에서 모방은 곧 정신적 죽음이 아니던가? 계율을 방편이고, 비유하여 뗏목이라고

하지만 뗏목을 버리는 것은 江을 건넌 다음이다. 뗏목을 버려야 한다고 江을 건너기도 前에 뗏목을

버린다면 허우적거리다 익사하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또한 진정한 무상계(無相戒)란 형식적

율법주의의 폐기이지 마음의 淸淨을 폐기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불일(不一)은 다(多)의 世界로서 區別의 世界요, 言語와 理性의 世界이며 現實의 世界이다.

한편 불이(不二)의 世界는 일(一)의 世界로서 差別과 言語 以前의 世界요, 理性 너머의 世界이다.

따라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 이전, 이성과 이성 너머를 다 肯定하며

包括하고자 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불교가 종교이면서 철학이요,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그 根據가 바로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世界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佛敎가 그 다른 어떤 宗敎보다 現代 社會에 더 적절한 가르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言語와 理性의 世界인 불일(不一)을 前提한 불이(不二)의 世界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일(不一)이 前提되지 않는 불이(不二)의 世界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고 정신적 전체주의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성(理性)과 언어의 사용을 부정하고,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宗敎가 理性을 마비시키고 폭력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强調할 때라고

하는 것은 서양 중세의 역사 속에서 흔히 보아온 바다. 불교의 경우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修行의 嚴格性과 必要性이 없어지게 될 뿐 아니라 現實 世界에 대한 理性的

判斷의 重要함이 없어지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현대 한국 불교에서 본다.

 

 

 

선가(禪家)의 어록(語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불이(不二)의 世界이지만, 우리는 그 깨달음의

世界 以前의 치열한 불일(不一)의 世界가 前提되어 있음을 看過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善知識들은 중생과 부처가 本來 하나라는 確信이 철저했던 만큼 부처가 못 되는 자신의 現實도

철저히 認識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 철저한 現實 認識의 基盤 위에 철저한 자기 부정과 엄격한

수행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깨달음은 “다반사(茶飯事)”요, “아침에

세수하다 코 만지기”라는 不二的 表現의 레토릭에 속아 부처와 우리가 다르다는 불일(不一)의

現實을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不二의 오용과 남용의 폐해는 비단 수행의 나태함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짜와 가짜, 이를테면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 혹은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부처님과 무당집의 귀신이 구별이 되지 않고, 만행(萬行)이 만행(漫行)과 구별되지 않고,

멍청함(昏沈)을 무심(無心)의 境地로 錯覺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불교의 한 모습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한국 불교의 난맥상은 비단 이러한 몇몇 ‘특별한 경우’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입시철이 되면 모든 절에서 合格 祈禱를 하고 수험 당일에는 대규모 祈禱會를 열어 시루떡을 갖다

놓고 내 아들 내 딸을 合格시켜 달라고 기도를 한다. 수험생 부모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方便이라고

하지만 眞正한 方便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정 한국 불교가 중생에게 方便을 베푼다면 우리의

아들딸들이 이상 이런 無意米한 競爭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보다 중요한 삶의 價値가

입시 경쟁에서 이기는 일만이 아님을 깨우쳐 주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불교가 여타 종교와 다르고 부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부처님은 하나님처럼

“全知全能” 하지 않고 世俗의 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속과 인간의

일이 움직이는 理致가 어떤 絶對者의 權能과 도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自身의 行爲에 달려 있다는

것이 佛敎의 出發點이 아닌가?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선가(禪家)의 레토릭은 自身 外에 어떠한

절대적, 초월적 권위도 부정하는 철저한 “人間主義”의 宣言이 아니었던가? 현대 한국의 불교인들은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자의 처분과 권능을 기다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흔히 비판하지만,

그러면서 닮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人類를 神으로부터 解放시키고, 外在的 神을 內面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는 데 가장 큰 功獻을

한 것이 바로 불교였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게 달려 있지 어떤 다른 ‘힘’의 작용이 아니라는

을 일깨워 준 것이다. 고전적 힌두이즘이라 할 브라흐마니즘의 제식주의와 다신교적 인격신의

전통을 否定하고, 行爲의 道德的 因果律과 緣起의 法則이라는 새로운 觀點을 提供한 것이 바로

불교였으며, 또한 서양 근대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理性의 發見이란 것도 바로 불교의

인간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

 

 

 

神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나 實存이 本質에 앞선다고 宣言한 사르트르나 모두 絶對神의 存在를

想定하지 않는 불교의 人間主義에서 影響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의 발견이 곧

그들에게는 헤브라이즘적 神의 束縛에서 解放되는 한 契機가 되었던 것이다. 神을 표방하지 않는

불교의 인간주의에서 서양인들은 곧 人間 理性의 無限한 可能性을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近代

이후의 기독교 신학이 불교에서 많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받고 있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西洋人들의 이러한 佛敎觀이 일정하게 제한된 관점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을 서양 전통의 理性과 동일시함으로써 마음을 인간 이성 내의 영역으로 局限시켜 버린 느낌이

있다. 하지만 佛敎 傳統에서의 마음이란 人間 理性을 包含하되 理性 너머의 것 또한 包含하고 있다.

이렇듯 근대 서양에서의 불교 이해가 일정한 限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근대정신을 이루는

한 축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동양이 서양의 근대정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불교로부터의

가르침을 읽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불교가 20세기 초의 近代化를 뒷받침하는 動力이 될 수 없었던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역사적 상황이 있다. 하지만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지금에도

한국 불교가 여전히 전통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데에는 우리 불교인들 스스로를 자책하는 이외에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현대 한국 불교의 난맥상의 한 이유가 바로 불일(不一)이 前提되지 않은 불이(不二)라는 槪念의

오용과 남용에 있다고 본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區別하지 않고,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을

區別치 않고, 나아가 아무거나 方便이라 한다든지 엄격한 수행의 중요성을 우습게 여기는 그

태도의 裏面에는 불이(不二)에 대한 잘못된 理解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色卽是空”의 眞正한 意味는 다음에 잇따르는 “空卽是色”에 의해 비로소 完成된다. 왜냐하면 現實의

삶이 無意味한 것으로 무화(無化)되지 않는 것은, 現實的 삶이 공(空)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色卽是空) 공(空) 또한 構體的 삶을 通해서만 具現된다는 것(空卽是色)이 바로 智慧 完成의 意味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불일(不一)이 前提가 될 때 비로소 完成된다.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불일(不一)이라는 現實態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자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진지한 불자라면 누구나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계율을 지키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문제 삼고자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불자들이 삶의 現場에서 나날이

經驗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불교적 解答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다. 불교 교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意志가 없는 것도 아닌데 삶의 구체적 現場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에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적”인 해결인가를 잘 모르겠다는 데서 오는 어려움을 말한다.

 

 

“모르겠다”라는 正直함이 解決의 始作이다.

불일(不一)이라는 現實에 대한 치열한 自覺이 없는 불이(不二)는

공화(空華)와 같은 환영(幻影)일 뿐이기 때문이다. ■

 

 

 

출처 http://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