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生死涅槃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장백산-1 2015. 2. 10. 15:14

 

 

법성게 강설 16~17 [1]

법희 (ach****)             주소복사 조회 40

14.06.12 13:38

 

                                                          

 

 

 

제16구 生死涅槃常共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항상 함께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
빈 마음으로 생사의 모습을 지켜볼 때,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연기관계(緣起關系)에서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일 뿐.
실체가 없는 생사를 보게됩니다.
곧 생사가 여래법신(如來法身)이며 화엄(華嚴)의 세계입니다.
빈 마음으로 여실(如實)히 지켜보기
수행(修行)이란 행(行)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행이란 습관적으로 현상을 동일한 모습으로 인식하게 하는 힘으로

이에 의해서 시비선악 등의 의지가 발생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은 언제나 이 행의 요소가 동반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마음은 비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빈 마음으로 사물을 여실히 보는 수행을

염처수행(念處修行)이라고 합니다. 모든 션해를 방하착(放下着)하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되는 그대로를

지켜보면서 삶의 진싱을 아는 수행입니다.

 

 

이 게송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집입니다. 모든 衆生과 事物 사람을 如悉히 지켜보면

生成과 消滅이 根本바탕입니다. 생성과 소멸을 如悉히 안다는 것이 별것 아닌 듯하지만 대단히 重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부처님 時代는 삶의 裏面에 삶의 기체(基體)로서 계급간의

差別을 決定하는 永遠한 存在가 있다고 하는 상주론(常住論)과 因果의 理致를 否定하는 잘못된 見解인

단멸론(斷滅論)의 양대 가르침이 풍미하고 있던 때입니다.

 

 

이런 生覺을 전제하고 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은 지금 여기서의 因果關係가 아니기 때문에 現象的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生覺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면 因果關係에서 삶과 죽음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꿰뚫고 存在하는 差別된 永遠한 存在도 없고, 因果를 떠나 우연히 存在하는 삶과 죽음도 아닙니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永遠한 것도 아니고 태어남이 있기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는 因果關係의 同時的 現象으로 常住論과 斷滅論의 사유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바른 견해라고 하며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생성과 소멸의 기체를 설정한다든다 인과를 부정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이런 見解는 단지 生覺이 만들어 내는 虛構로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온갖 삶의 모습은 단지 緣起關係에서 生成과 消滅일 뿐입니다. 緣起關係에서 條件의 結合에 따라

生成과 消滅의 모습만 있는 것이 지금 여기의 우리이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 執着할 理由가 전혀 없습니다.

 

 

行의 執着에 의해서 生과 死가 不滿足스러울 뿐입니다. 불만족스러운 모습은 生死의 본 모습이 아니라

執着하는 作用인 行의 마음作用에 依해서 잘못 認識된 結果입니다. 그래서 앞서 苦의 發生이 生死에 있지 않고

生死를 色칠하는 業의 活動인 衆生의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生死가 不滿足으로 다가 올 때는 우리들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執着하는 自身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世界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이 때는 生死가 生과 死로 別個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生과 死로 나누어 生을 貪하거나 싫어하며 死를 貪하거나 싫어하게 되는데, 이것은 生死의

眞實한 모습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의 作用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狀態를 如悉히 지켜보아 執着하는 마음 作用인 이 지멸(止滅)될 때 念處修行의 맑고

고요한 마음이 되며 이때는 生死를 歪曲하여 常住論이나 斷滅論과 같은 잘못된 見解를 갖지 않게 됩니다.

 

이 때 生과 死로 나누었던 것이 잘못된 見解임을 알고 生死가 나눌 수 없는 한 삶임을 알게 됩니다.

生이 死를 그대로 담게 되고 死가 生을 그대로 담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生은 死를 原因으로 하고

死는 生을 原因으로 해서 生死가 함께 굴러갈 때 비로소 우리가 있게 되니, 生이 불생생(不生生)이며, 死가 불사사

(不死死)입니다. 여기에서 불생불사(不生不死)가 우리의 眞實한 모습이며 圓融한 일상(一相)임을 보게 됩니다.

 

이울러 맑고 고요한 마음, 텅~빈 마음으로 生死의 모습을 지켜보게 될 때 執着으로 이루어진 變치 않는

業인 行의 作用이 그침과 아울러 끊암없이 變하는 無常의 自己 本來 흐름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無常이 그 極에 이르러 오히려 고요한 부동(不動)의 微妙한 곳임을 보게 되면서 無常과 不動의 끊임 없는

交流, 連續과 不連續이 함께하는 것이 삶의 眞實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동(動)에서 부동(不動)을,

不動에서 動을 自由롭게 넘나들어 動과 不動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中道實相의 面目을 알게됩니다.

 

 

이 中道實相에 비추어 自我란 動으로서 同一하거나 不動으로서 同一한 實體를 갖지 않고

因緣 條件에 따라 제 모습을 갖기 때문에, 行에 依한 習慣的 執着에 依해서 同一한 實體로 認識되고 있는

自我가 없음을 確實히 體得하게 됩니다.

 

生死를 지켜 보는 여실수행(如實修行)인 염처수행(念處修行)으로 無常 無我의 自己 本來面目을 보게 되고

그 瞬間 모든 중생과 사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無常의 動으로서 不動을, 無我의 텅~빈 모습으로서 낱낱을

이루는 法界 인드라網의 相關關係를 體驗하게 됩니다.

 

生死 속에서 텅~빈 마음으로 法界 인드라網을 如悉히 알게 되어 無常無我의 흐름을 볼 때

生死의 모습 그대로 涅槃寂靜이 됩니다. 이것을 圓成實性이라고 합니다.

 

生死의 모습은 이것이 생(生)하므로 저것이 生하고 이것이 사(死)하므로 저것이 死하는 緣起實相인데,

이것을 生과 死  個別로 나누어 그 自體로서 生과 死를 設定할 때 遍計所執性의 世界가 나누어 그 自體로서

生과 死를 遍計所執性의 세계가 있게 되고 그 결과 인생은 괴롭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비록 遍計所執性의 意識世界라 할지라도 그것은 虛妄한 錯覺하는 마음 作用인 行의 執着에 依한 것일 뿐

그 根本은 無常無我입니다. 이제 수행에 의해서 무상무아를 보게 되는 瞬間 行의 止滅이 이루어지고 모든

執着이 사라집니다. 이 執着이 苦의 根源이므로 行이 止滅되는 瞬間, 苦가 消滅하고 涅槃의 맑고 고요하며

온갖 삶을 서로서로 있게 하는 따뜻한 慈悲의 氣運이 넘쳐나는 世界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보면 生死란 遍計所執性에 議한 苦의 世界도 아니고 涅槃寂靜에 依한 낙(樂)의 世界도 아니고,

緣起關係에서의 中道實相일 뿐입니다. 따라서 열반적정도 그 自體로서 實體를 갖는 것이 아니라

行의 執着과 止滅이라는 意識狀態의 變化와 마음 비움의 轉換만 있을 뿐입니다.

 

 

生死 그 自體도 단지 緣起關係로, 生死라는 固定된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遍計所執性으로 因한

生과 死의 分別과 거기에 따른 慾心과 성냄의 對相인 生死도 단지 行의 執着뿐, 實體가 없기 때문에

生死와 涅槃은 아무런 差異도 없습니다. 生死가 中道緣起實相으로 如來法身이며 華嚴의 世界입니다.

生死가 비로자나佛의 모습이니 빈 마음으로 삶을 지켜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것입니다.

 

온 몸에 힘을 대상의 나눔이 사라지는 순간,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스스로가 법계 실상의 비로자나 부처님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제17구 理事冥然無分別

 

이(理)와 사(事)가
하나되어 분별이 없으니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認識 主觀으로 限定된 듯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對相이 되고,
對相이 對相인 데서 보면 認識 對相으로 限定된 듯하지만 이 對相이 그대로 一切 萬相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對相을 對相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關係를 명연(冥然) 곧 差別을 꿰뚫고 混然一切로 하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원융(圓融)한 한모습이니

온 宇宙 그대로가 비로자나佛의 世界인 것을 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이(理)라고도 하며 또한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華嚴에서 三界가 단지 마음[三界唯心]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對相을 떠난 거울만으로 存在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生覺해서는 안 됩니다. 對相이 마음의 얼굴이라 하여 對相과 마음 두 거울이 마주 보고 서로 비춘다[兩鏡雙照]

라고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과 對相이 마음이라고 하는 하나된 장(場)에서

마음과 對相일 때의 마음이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지, 對相을 떠나 홀로 存在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제 마음의 얼굴을 알 수 있습니다.

'갑'이 보이면 '갑'이 마음의 얼굴이요, '을'이 보이면 '을'이 마음의 얼굴입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모든 모습으로 나툰 마음의 얼굴이 또한 그대로 對相의 얼굴인 줄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마음이고 對相은 對相이니, 마음과 對相이 因緣의 場에서 다 하이나 마음이 있으므로

對相이 있고, 對相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다는 根本緣起의 法則이 여기서도 그대로 適用되기 때문입니다.

 

 

이 原理가 理인데, 이 理가 成立되는 理由도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對相도 對相이 아닌,

곧 마음으로 獨立된 實體가 없고 對相으로 獨立된 實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마음이 아닌 데서 마음이며, 對相도 對相이 아닌 데서 對相임을

如實히 아는 것이 스스로를 아는 앎입니다.

 

 

 

그래서 옛스님들께서는 마음 밖에서 眞理를 찾는 경우를 外道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이면서 同時에 

一切 萬相으로 나툰 것을 華嚴의 法界緣起라고 했으며 마음마음이 겹쳐진 世界를 重重無盡法界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認識 主觀으로 限定된 듯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對相이 되고,

對相이 對相인 데서 보면 認識 對相으로 限定된 듯하지만 이 對相이 그대로 一切萬相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對相을, 對相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關係를 명연(冥然), 곧 差別을 꿰뚫고

混然一體로 하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對相은 또한 그대로가 眞如空性 스스로의 自己나툼이니 空性인 듯하면서 마음으로 對相으로 나투고,

마음인 듯 對相인 듯하지만 그대로가 空性을 나투고 있으니 空性과 그 나툼의 關係를 하나되어 分別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理)와 사(事)로 區分하고는 있습니다만, 理 그대로 事이고 事 그대로 理인 하나인 狀態이기 때문에

生死 하나뿐인 生과 死의 경우처럼 설명을 위해서 부득이 理와 死로 둘로 나눈 줄을 알아야 겠습니다.

 

 

이것은 言語가 갖는 限界를 극복하기 위한 方便으로, 언어표현이되 언어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實踐의 세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實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實踐하지 않는 앎이란 앎이 아닙니다. 물론 知識과 智慧로

나누기도 합니다만 實踐이 담보되지 않으면 知識이든 智慧는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智慧一致란 쉽지 않기 때문에 理致를 아는 것은 바로 되지만 그것을 그대로 行하는 데는

차근차근 익혀야 한다[理卽頓悟 事非頓徐]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緣起實相의 理法界에서 보면 理와 事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낱낱 現象의 나툼인 사(事) 그대로가 緣起實相의 이(理)이기 때문입니다.

곧 理가 있고 事가 있는 것도 아니며 事가 있고 理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理와 事는 圓融한 한 모습이며

事를 貫通하고 있는 理인 공(空)에 依해서 사사(事事)가 다시 圓融한 한모습이 됩니다.

 

 

이 事事에 圓融한 삶이 삼매(三昧)의 삶이며, 無量한 如來의 生命이 衆生과 事物마다에 그대로 나툰 것입니다.

世上 온갖 모습이 그대로 法身佛의 나툼이기 때문에 事物과 事物, 衆生과 衆生의 圓融한 모습이 아니라

法身佛과 法身佛의 圓融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修行者가 菩提心을 낼 때 그 發菩提心은 修行者의 衆生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法身佛과 法身佛의 智慧光明인 佛性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修行하는 마음 그대로 佛性으로,

佛性이 修行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한 마음 한 衆生 한 事物 그대로가 佛性이지,

마음 衆生 事物 그 안쪽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佛性이 아닙니다.

 

때문에 처음 菩提心을 낼 때 그것이 그대로 穩全한 佛性인 줄을 確實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를 아는 것을 信心이라 합니다. 이 信心 그대로 穩全한 佛性이며 이 佛性은 온 衆生들의 生明의 빛을 그대로

나툰 것이기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낸 수행자는 一切衆生을 다 濟度하겠다는 願力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菩提心과 大願力으로 나서는 修行의 첫발이 法身佛의 世上를 이루는 原因이자 結果가 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大願力이란 모든 衆生이 스스로의 生命體이면서 宇宙法界가 한 生命으로 關係 맺고 있음을 如悉히 아는 데서

出發합니다. 여기서 앎이란 實踐을 뜻하기 때문에 發心 修行者란 菩提心에 대한 確實한 믿음과 大願力의 實踐이

恒常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