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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보시-상// 富의 剩餘가 가져올 苦痛 덜어 낼 方案은 ‘버리는 것’

장백산-1 2015. 3. 1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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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보시-상
富의 剩餘가 가져올 苦痛 덜어 낼 方案은 ‘버리는 것’
2015년 03월 16일 (월) 15:10:14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중국 청해성에 속해 있는 시닝의 타얼寺는 티베트 佛敎 改革의 主役이고 달라이라마 제도를 만들었다고 하는 총카파를 기념하며 만들어진 寺院이다. 총카파의 탄생지에 만들었다는 대금와전(大金瓦殿)은 지붕의 기와를 전부 金으로 칠을 했다고 하여 더 유명한데, 안내자에게 들으니 기와를 칠하는 데 금 850kg이 들었다고 한다. 거의 1톤에 가까운 金을, 室內의 佛像이나 殿을 裝飾하는 데 쓴 게 아니라 비바람에 일 년 내내 露出된 기와에 칠해놓았다는 말에 다들 당혹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뿐만 아니라 절 안에 있는 수많은 ‘걸게그림’과 벽화는 寶石과 寶石가루들을 써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티베트에 가서 보니, 다른 절들도 양상은 비슷했다. 無所有를 강조하고, 아름다운 形相이 아니라 形相 없음 속에서 如來를 보라고 가르치는 佛敎 寺院이 왜 이처럼 당혹스러운 裝飾을 했던 것일까?

타얼寺의 황금기와 장식은  과도한 숭배로 비춰지지만
남을 害하는데 사용될 富를  미리 소모하는 의미가 담겨


이 물음에 불교와 절이 墮落해서라고 답하는 것이나, ‘敎主’에 대한 과도한 숭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그 ‘장식’은 이런 대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과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총카파의 상을 순금으로 만들었어도 될 거대한 양의 금을 하필이면 기어코 풍화되어 없어질 지붕에 발라놓은 것은 그런 통념으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도하고 소모적인 장식의 이유에 나름대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원시사회의 ‘비합리적’ 선물제도 덕분이었다. 北美인디언인 치누크族의 말로 ‘먹여주다’ ‘消費하다’를 뜻하는 ‘포틀래치(potlach)’란 말은 인디언社會나 다른 많은 ‘原始社會’에 존재하는 競爭的인 膳物게임을 指稱한다.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 선물해야 ‘이기는’ 게임.

 

이는 선물의 형태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게임이라고 할 것이다. “난 이 정도도 남들에게 줄 수 있어!” 남에게 주는 것뿐 아니라 보라는 듯 담요나 집을 태워버리고 귀중한 물건을 바닷물 속에 처박아버리기도 한다. 이까짓 거 다 없애버려도 충분할 만큼 자신이 능력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포틀래치가 벌어지면 엄청난 양의 재물이 파괴되고 소모된다. 하이다족에선 이를 ‘부를 죽이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하며, 틀링깃족이나 침시아족 등 많은 부족들이 이에 대해 ‘재산을 죽이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富와 財産을 最大한 膳物하고 破壞하는 者가 最高의 名譽를 얻는다. 이런 이가 대개 추장이 된다.

모든 데서 利害關係만을 보는 어떤 인류학자는 이를 명예나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되기 위한 ‘책략’이나 ‘투자’로 해석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추장이 되었을 땐, 정치적 권위를 얻는 대신 경제적 부를 모두 상실한 상태가 된다. 反對로 경제적 부를 모으고 아끼려는 자는 절대로 정치적 리더가 되지 못한다. 그는 ‘인색한 자’라는 가장 모욕적인 평을 얻고 이웃으로부터 비난받고 소외된다. 한때 캐나다 정부에선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던 이 비합리적 선물게임의 기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잘 알겠지만 政治的 리더가 經濟的 富마저 갖고 있으면, 그 富를 利用해 사람들을 사거나 끌어들여 자신의 政治的 地位를 유지하고 보호하려 할 것이며, 政治的 地位를 利用해 經濟的 富를 늘리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權力이 誕生하게 된다. 反面 인디언들처럼 政治的 地位를 얻으려면 經濟的 富를 完全히 抛棄해야 하고, 經濟的 富에 愛着이 있으면 政治的 地位에 接近할 수 없게 하는 경우, 지도자의 지위는 부족민의 信賴를 잃는 瞬間 持續할 수 없는 것이 된다. 政治的 地位를 利用해 富를 모으는 것도 不可能하다. 포틀래치는 부가 정치적 지위를 보호하고 정치적 지위가 부를 확대하는 循環을 끊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선물을 통해 각자의 능력과 관대함을 시험하고, 경제적 부와 정치적 지위가 結合되는 것을 막아주는 裝置다.

포틀래치가 ‘재산을 죽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富의 蓄積 自體를 저지하고 定期的으로 財産을 消耗해버리는 ‘순수소모’ 자체에 있다. 먹고 사는 데 必要한 것 以上의 富가 蓄積되기 시작하면, 그 富는 무엇에 使用하게 될까? 남에게 빌려주어 利子를 얻거나 남을 雇用하여 自己에게 필요한 일을 하도록 하는 데 사용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蓄積된 富의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고, 결국 富者와 貧者의 隔差가 커지며 階級對立이 생겨날 것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定期的으로 필요 이상의 富를 소모해서 ‘죽여 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蓄積’이 當然視된 資本主義 社會에선 理解하기 힘든 일일 게다.

타얼寺에서 거대한 양의 金을 풍화되어 없어질 지붕의 기와에 칠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그대로 蓄積되어 버린다면, 남을 힘들게 할 목적으로 사용될 게 분명한 富를 소모해버리기 위해, 절에서 布施를 받아 마멸의 장소인 지붕을 裝飾하는 데 사용한 게 아니었을까?

 

裝飾만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바타유는 정확히 이런 관점에서 티베트사회를 분석한 적이 있다(‘저주의 몫’). 그에 따르면 가령 1917년 1년간 라싸 정부의 총 세입은 약 72만 파운드였는데, 이중 군사비로 쓰인 게 15만 파운드, 행정비용이 50만 파운드였고, 나머지7만 파운드는 종교행사비용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정부의 지출과 無關하게 寺院에서 승려들이 消費한 금액은 100만 파운드가 넘었다고 한다. 政府豫算 전체보다 많은 돈을 寺院에서 쓴 것이다. 이런 식의 소모를 통해 富가 蓄積되어 ‘成長’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티베트의 寺院에서 사용한 돈이 단지 소모적 장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려진 아이나 依持할 곳 없는 老人을 부양하고, 일찍 出家하는 이들을 모아 먹여 살리는 등의 ‘布施’를 逆으로 大衆들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데 비추어 보면 ‘쓸모없는’ 장식에 부를 이렇게 소모해버리는 것은 아무리 인디언 얘기를 끌어들인다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가난한’ 나라 티베트에서 말이다.

그런데 剩餘의 富를 소모하지 않고 蓄積하여 다른 데 사용했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이런 소모가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타유도 이를 위해 티베트社會와 이슬람社會를 對比하여 분석한다. 外部의 侵入이 있어도 軍隊를 만들지 않거나 最小 규모로만 유지한 티베트와 달리 異敎徒와의 성전(聖戰)이 중요했던 이슬람社會는 모든 쓸데없는 소모나 낭비를 저지하여 富를 蓄積했고 그렇게 蓄積된 富는 軍事力을 增强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宗敎生活마저 軍事的 必要性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빚었다고 한다. 요컨대 “이슬람이 戰爭을 위해, 近代 社會가 産業發展을 위해 剩餘[積 富]의 全部를 蓄積한 反面, [티베트, 몽골의] 라마교는 剩餘를 冥想의 世界를 위해, 世界 속에서 人間의 自由로운 놀이를 위해 바쳤던 것이다.”(152쪽)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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