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장백산-1 2015. 3. 18. 13:15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스님의 말씀으로 유명有名해 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法語가 있는데

 

이는 성철스님이 처음 한 말이 아니고 中國 宋代에 慧明 등이 편찬한 佛敎 書籍인

『오등회원五燈會元』의 「청원유신靑原惟信」章에서 청원유신 禪師가 남긴 말씀입니다.

 

原文 內用은 이렇습니다.

 

老僧  三十年前  未參禪時         (노승 삼십년전 미참선시)

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수)

 

汲至後來  親見善知識  有個入處   (급지후래 친견선지식 유개입처)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

 

而今得個  休歇處                 (이금득개 휴헐처)

依前 見山只是山                  (의전 견산지시산)

見水只是水                         (견수지시수)

 

노승이 30년 前 미처 참선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後에 여러 善知識을 친견해서 깨친 바가 있은 다음에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음이 쉴 곳을 얻은 지금에는

다시 예전의 산을 보니 여전히 그 산일뿐이고

물을 봐도 여전히 그 물일뿐이더라.

 

말을 마친 後 청원유신 선사는 이렇게 물었다.

 

 大衆  這三般見解  是同是別  許與親見老僧

 대중  저삼반견해  시동시별  허여친견노승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見解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를 親見하는 것을 허락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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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과 물에 느낌(受)과 생각(想), 分別妄想을 덧칠한 상태로 보는 것이다.

 

예컨대 산을 보면서 호랑이를 떠올려 두려워하기도 하고

물을 보면서 어릴 적에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過去 記憶을 떠올려서 무서워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산과, 있는 그대로의 물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想受滅定에 들어가서 想受가 滅하면 산도 물도 없다.

산이 아니거나 물이 아닌 것이 아니고 아예 사라지고 없다.

느낌(受)과 생각(想), 分別妄想이 사라져서 一切가 虛無空滅임을 보는 것이다.

 

산은 여전히 그 산일뿐이요, 물도 여전히 그 물일뿐이다

想受滅定으로 無分別智를 體驗한 以後의 無分別後得智이다.

산은 있는 그대로의 산이요, 물도 있는 그대로의 물이다.

 

對相에 매달려서 느낌과 생각으로 分別하고 妄想을 지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現前하는 如來如去를 보는 것이다.

 

산과 물의 過去나 未來를 겹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如來如去함(-ing)을 보는 것이다. 바로 卽見如來인 것이다.

머물러 있는 산만 볼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산을 깊이 볼 줄 알아야 한다.

無情物인 산이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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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의 見山是山 見水是水는

相對界, 卽 世俗諦의 見解로서 分別智에 속하며 理事有碍 法界이다.

 

두 번째의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는

絶對界, 卽 眞理諦의 見解로서 無分別智에 속하며 理事無碍 法界이다.

 

세 번째의 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는

不二界, 卽, 眞俗 不二諦의 見解로서 無分別後得智에 속하며 理事不二 法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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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分別後得智 (무분별후득지)란?

 

1. 無分別智에 이른 뒤에 얻는 智慧라는 뜻.

 

2. 모든 分別이 끊어진 境地에 이른 後에 다시 差別 現象을 있는 그대로 確然히 아는 智慧.

 

3. 모든 煩惱와 妄想이 끊어진 깨달음에 이른 後에 다시 온갖 差別을 明明白白하게 아는 智慧.

 

위의 글은 無分別後得智에 對한 說明이지만 매우 重要한 內容이 몇 가지 빠져있다.

 

無分別後得智에서 無分別 또는 無分別智는 바로 想受滅定의 體驗을 말하며

그런 體驗 以後라야 만이 올바른 앎과 智慧를 얻을 수 있다는 意味가 後得智이다.

 

또 無分別과 無分別智는 느낌과 생각이 滅해서 사라진 그 自體를 말하는 것으로

無分別  無妄想을 省略하여 쓴 말이다. 말 그대로 分別 妄想이 滅해서 없어진(無) 상태의 智이다.

 

예컨대 天地分別을 못하고 헤매일 때의 그런 無分別이 아니다.

正常的인 分別이 없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또는 分別을 意識的으로 回避한다는 意味의 無分別도 아니다.

그리고 잠을 자는 狀態라서 分別을 못하는 것과도 相關이 없다.

 

反對로 心識은 惺惺하게 깨어 있으면서도 一切의 分別 妄想이 사라진

寂寂한 寂滅의 現前을 體驗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無分別智라고 한다.

 

想受滅定에 들었을 때 卽刻的으로 現前하는 心識과

卽刻的으로 滅한 想受를 아는 智를 無分別지라고 한다.

 

無分別後得智는 無分別의 狀態 즉 想受滅定을 體驗하고

깨어난 以後에 깊이 窮究하고 따져서 얻은 智慧를 말한다.

아!  느낌(受)과 생각(想)이라는 것이 내가 짓지 않으면 없는(虛無空滅) 것이구나.

그동안 헛되고(虛), 없고(無), 空하고, 滅한 허깨비 같은 分別(受) 妄想(想)에 執着하여

부질없고 어처구니없는 行을 하여 텅~빈 알음알이(識)로 더럽혔구나 !!! 하고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허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受想을 除外한 色과 行 識은 常存不變하는 自性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疑問을 가져야 한다.

 

色과 行 識 역시 緣起에 依存하여 成住壞空하고 生住異滅하므로

그 實相도 역시 虛無空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眞我 라거나 참나 라는 말이

전혀 妥當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眞짜 我아라고 하는 것은 雪上加霜이며

四相에 하나를 더하여 五相을 만드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眞我나 참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眞如나 本性>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整理를 하자면

無分別智와 想受滅定을 體驗하지 못한 狀態의 智는 分別智 이고,

 

想受滅定에 들어가서 想受滅定을 體驗하는 바로 그 瞬間의 智는 無分別智이며

 

想受滅定의 寂滅한 狀態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알아차리는 智는

無分別後得智 또는 後得智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分別智는 느낌(受)과 생각(想)으로 對相을 思量 分別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分別 妄想의 智, 또는 業識의 智이며

 

無分別智는 느낌과 생각이 사라져서 一切의 分別 妄想이 없는 虛無空滅한 상태의 智이다.

 

無分別後得智는 無分別智를 體驗한 以後에 얻게 되는 智이며

있는 그대로 알고(如實知), 있는 그대로 보는(如實見) 智이며

眞과 俗이 不二인 가운데서 眞과 俗을 分明하게 分別 할 줄 아는 智이다.

 

 

石 通 (석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