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無我 - 하////수많은 ‘나’가 사라지고 태어나는 변이의 과정

장백산-1 2015. 3. 17. 12:36

 

 

 

 

 

> 뉴스 > 연재 | 철학자 이진경 불교를 말하다
9. 無我 - 하
수많은 ‘나’가 사라지고 태어나는 변이의 과정
2015년 03월 09일 (월) 15:54:12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自我’라고 하든 ‘性格’이라고 하든, 一定한 思考패턴이나 制限된 行動패턴을 形成하는 데는 나름의 理由가 있다. 우리는 낯선 空間에 들어가면 어떻게 行動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매우 많은 注意를 기울인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적절한 對處 방식(이를 ‘行動圖式’이라고 한다)을 찾게 되면, 적은 에너지를 들여 便하게 行動하게 된다. 이런 行動圖式들이 모여 ‘나’의 一定한 行動패턴을 形成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나 狀況에 對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행동패턴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매번 힘들게 다시 生覺해야 하고, 恒常 마음이 긴장된 注意狀態에서 살아야 한다. 問題는 이런 思考나 行動 패턴에 매여 버리게 되면, 새로운 狀況에서 選擇할 수 있는 思考나 行動의 輻이 그 패턴 안에 制約된다는 점이다.

無限한 삶의 可能性이 ‘나’라고 불리는 性格이나 思考 行動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條件에 따라  만들어진 潛定的인 것
어떤 것도 나가 아니기에 모든 나를 肯定하게 돼


‘自我’를 確固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形成된 腦의 뉴런들의 패턴들 안에서 生覺하고 行動한다는 걸 뜻한다. 만나던 方式으로만 사람들과 만나고, 習慣化되거나 비슷한 行動만을 하며, 이미 알고있던 대로만 生覺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려운 일, 귀찮고 힘든 일, 새로운 일을 가능하면 피하게 된다. 이는 腦를 비롯해 자신이 갖고 있는 無限한 可能性의 能力을 最小限으로만 사용하는 方法이다. 그것이 갖는 유연성과 가변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덕분에 힘과 에너지 소모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쓰지 않는 힘은 그저 불어나는 살이나 완고해지는 고집 말곤 줄 데가 없어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反面 자아의 경계가 유연하고 새로운 狀況에 열려 있다면, 뇌와 다른 身體的 精神的 能力을 最大限으로 사용하게 된다. 새로운 狀況에 對處하기 위해 새로운 뉴런網들을 만들 것이다. 에너지 소모는 많겠지만, 그렇게 사용된 에너지는 새로운 能力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自我가 强한 사람은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남의 立場에서 生覺하지 않으며 理解하기 어려운 것은 工夫할 필요가 없다고 生覺하고 失敗나 不和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으로 世上 모든 일을 分別하고 判斷한다. 거기에 안맞는 것에 대해선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世上이 모두 自己 生覺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셈이다. 그러나 實際론 그리 될 리 없으니, 이들의 삶은 힘들고 피곤할 것이다. 이들 옆에 있는 이, 이들을 만나야 하는 이들도 힘들고 피곤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많은 경우 ‘權位的’이다. 자신이 아는 거나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자신이 生覺하는 바에 남들이 의당 따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나이와 無關하게 ‘老人’이 되기 쉽다. 끊임없이 새로운 生覺이나 經驗을 追究하고 그것을 通해 自身의 思考能力을 擴張하고 行動의 유연성을 늘려가려는 게 젊음의 特徵이라면, 젊다는 것은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뉴런이 連結網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새로이 生成된다 함은, 나이 많은 젊음이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반면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믿고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狹小한 視野에 갇힌 채 단단하게 硬直되어 가는 이라면,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이미 충분히 ‘늙은’ 것이다. 50歲 정도가 되어야 自我가 安定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저 유연하고 열린 젊음의 思考나 行動을 잃고 굳어진 自我 안에 갇혀가는 時期가 대략 그 時期라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自我’가 强하다는 것은 나에게나 남에게도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남에게는 폐가 되고 나에게는 안타까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다.

無我란 ‘本來의 自我’나 ‘不變의 自我’, 혹은 ‘참된 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음을 뜻한다. 無我그것은 지금의 ‘나’는 特定한 關係(緣起的 條件) 속에서 만들어진 潛定的인 것이며, 그런 ‘나’의 同一性과 確固함에 대한 믿음이란 虛構的인 것임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나’의 同一性에 대한 믿음이 虛構的이라 해도 그것을 버리는 건 쉽지 않으며, 그것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도 無我를 말한다면, 그건 대체 무슨 意味에서일까?

自我란 언제 어떻게 形成된 것이든 단단해지는 瞬間 나를 가두는 壁이 된다. 無我란 그런 壁을 反復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反復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無我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事件이며, 그런 事件을 永遠히 反復하는 것이다. 그런 式으로 끝없는 變移의 過程을 기꺼이 수긍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넘어서려고 選擇하는 것 역시 ‘나의’ 選擇인 限, 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나의 죽음이 아니라 擴張에 불과한 거 아닌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게 다가오는 삶은 많은 경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온다. 나의 죽음을 同伴하는 나의 選擇이란 ‘外部’라고 불러 마땅한 그 뜻하지 않은 것과 내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뜻하지 않은 것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옴을 受肯하는 것이다.

이렇게 發生하는 죽음을 블랑쇼는 ‘非人稱的 죽음’이라고 명명한다. 가령 詩人들이 詩를 쓴다는 것은, 詩가 그에게 다가가는 事件이고, 그렇게 다가간 詩를 詩人이 적는 것이다. 그렇게 詩가 다가갈 때, 詩人의 生覺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비워지지 않으면 卽, 그의 ‘自我’가 죽지 않으면, 다가갔던 詩는 自我의 熱氣 앞에서 길바닥에 녹는 눈처럼 지저분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詩가 쓰여진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詩가 詩人에게 다가갔을 때, 그의 안에 있던 ‘누군가’, 詩人이 ‘나’라고 불렀을 누군가가 죽는 것이고, 누군가가 그렇게 죽으며 그 비워진 자리에 詩가 들어가는 것이고, 詩人의 손을 움직여 글로 쓰게 하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詩는 내게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현기증은 내 몸으로 찾아온 낯선 몸의 시간 같은 것이었다.”(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서문)

‘누군가’란 나, 너, 그이로 特定할 수 없는 者이기에 ‘非人稱’ 代名詞다. 그래서 그런 式으로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것을 블랑쇼는 ‘非人稱的 죽음’이라고 부른다. 내게 다가온 것 앞에서 나를 채우고 있던 ‘누군가’(非人稱 대명사)가 죽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채우고 있던 것이기에 ‘나’라고 알고 있던 것이지만, 실은 나를 채우고 있던 ‘어떤 것’이고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로 代替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죽으며 비워진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른 이가 誕生한다. 非人稱的 죽음과 同時에 오는 이 誕生을 ‘非人稱的 誕生’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詩人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非人稱的 죽음과 誕生을 反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詩人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 뿐일까. 내 삶의 궤적을 크게 비트는 사랑 앞에서 그렇듯, 우리의 삶이란 모두 뜻하지 않은 것과 만나는 事件의 連續 아닌가. 다른 것은, 詩人과 달리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의 ‘나’의 궤적을 固守하기 위해 그 모든 事件들을 밀쳐내며 간다는 점이다. 없었으면 좋았을 ‘事故’라고 저 옆에 치워두며 간다는 점이다. 無我란 詩人들처럼 내게 다가오는 어떤 事件들 앞에서 發生하는 非人稱的 죽음과 誕生을 反復하여 肯定하고 受容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非人稱的 죽음과 誕生이 反復되는 事件의 永遠한 反復임을, 기쁜 肯定의 精神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自我의 죽음’은 無數히 많은 多樣한 ‘나’들의 誕生이고, 그런 ‘나’들을 거쳐가는 變移의 過程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많은 ‘나’들을 살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비우는 것이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서 수많은 ‘나’들을 사는 것이다. 보르헤스가?죽지 않는 人間?에서 다음과 같이 쓸 때, 그는 無我를 正確하게 理解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卽, 나는 죽을 것이다.” 無我를 洞察한 ‘나’란 어떤 ‘나’도 ‘나’라고 부를만한 固定된 實體가 아님을 알기에 그 모든 ‘나’들이 ‘나’임을 受肯하는 나다. 그래서 無我는 그때마다의 無數한 ‘나’들, 無常한 ‘나’들의 肯定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도 ‘마음’이 아니기에 그 모든 마음을 肯定하는 <金剛經>의 逆說的 論法을 빌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나’도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라고 한다.”

(諸我皆爲我, 是名爲我)

수많은 ‘나’들을 사는 것이 可能한 것은, 다시 腦 얘기를 빌어서 하자면, ‘自我’로 凝集된 패턴화된 뉴런들의 連結網만으로 우리의 腦가 닫혀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行動의 패턴들 안에 우리의 身體가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自我 形成 以前의 아기의 腦가 千兆 個라는 最大値의 시냅스로 連結되어 있다는 것은, 보르헤스 式으로 말해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을 可能하게 해주는 最大値의 潛在性을 모든 아기들이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無我란 能力의 最大値를 뜻하는 潛在性을 向해 우리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그 無限한 可能性인 潛在的 能力을 通해 수많은 다른 ‘나’들로 바꾸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潛在性을 通해 最大値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갓 태어난 아이도 6識을 갖추고 있습니까?”라는 學人의 물음에 조주 스님은 답한다.

“急流 위에서 공을 친다.”

그 학인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투자스님에게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는다. 투자스님의 대답:

“한瞬間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腦의 潛在性을 보는 것조차 여전히 腦 안에 갇혀 思考하는 것이고, 腦의 能力 안에서 사는 것이다. 腦 以前의 身體는 腦 以上의 潛在性을 갖고 始作할 것이다. 그렇다면 無我의 暫在性은 腦가 生기기 以前, 수정란으로 거슬러 올라가 마땅하다. 그러나 수정란에 굳이 멈출 이유가 있을까? 수정란으로 現行하기 以前의 潛在性으로, 수많은 수정란들로 열린 潛在性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혜능스님이 던진 유명한 물음은 無我의 問題를 거기까지 밀고 가려는 게 아니었을까?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前의 本來面目이란 대체 무엇인가?(父母未生前 誰是本來面)”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