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변화는 곧 변화가 아니다

장백산-1 2015. 7. 18. 00:44

 

 

 

변화는 곧 변화가 아니다           

 

 

 

사람들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自身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지요.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變化가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어떤

方向으로 變化해야 할지 本人도 모르면서 어쨌든 變化를 꿈꾸고, 야심차게 變化하리라 마음을 먹곤 합니다.

끊임없이 變化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이지요.

 

이런 變化를 위한 노력 없이  變化하지 않는 者는 時代에 뒤떨어진다는 것이 지금 이 時代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警告가 아닙니까. 世上은 찰나찰나 끊임없이 變합니다. 이렇게 휙휙 變化해 가는 世上에서 나만 變하지

않고 있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답답함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어떤 方式으로, 具體的으로

어떻게 變化해야 할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어떻게 됫든, 일단 變하고 봐야 한다는 變化 强迫症에 시달리

듯 합니다.

 

그러나 잠시 돌이켜 살펴볼까요?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이 世上의 本質은 諸行無常입니다. 도장 찍듯이

確實眞理의 法印 가운데 첫 번째 가르침이 諸行無常, 卽 이 世上 모든 것, 宇宙森羅萬象萬物은 한瞬間도

쉼없이 끊임없이 變化한다는 事實입니다.

 

諸行無常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렇게 애써 變化하려고 노력하지 않더라도, 나를 包含한 世上은 언제나 每瞬

끊임없이 變化하는 중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 모습 이대로의 存在의 實相이 찰나도 머무는 瞬間

없이 끊임없이 變化하고 있지 않습니까.

 

眞實이 이러니 우리가 애써 變化하려고 努力할 必要는 없습니다. 恒常 이미 變化 中인 삶의 眞實을 고스란

受容하고 許容하면서 삶의 흐름에 나를 살짝 얹어 놓으면 될 뿐이지요. 그러면 自然스럽게 저절로 眞理

世界인 宇宙法界가 우리가 自然스럽게 저절로 어떻게 變化해야 할지를 每瞬間 案內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宇宙法界의 案內에 따라서 宇宙的인 變化의 물결을 함께 타고 흐르면 됩니다. 여기에는 ‘努力’이나,

‘忍耐’  ‘극기’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事實은 眞理, 깨달음란 이런 것입니다. 眞理, 깨달음은 억지로 努力하고 修行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世上 모든 것, 宇宙森羅萬象萬物인 우리라는 存在 自體가 이미 眞理 깨달음 그 自體인데, 무엇

하러 眞理를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겠어요. 이미 방에 있는 사람이 방 안에 들어가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理致입니다. 이미 들어 와 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眞理, 깨달음은 단순하며 쉽고, 애써서 힘쓰지 않더라도 이 世上 모든 것은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진

眞理 그 自體로서 존재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애써 뭔가를 만들고, 變化를 도모하면서 긁어 부스럼을 기어이

만드는데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것일까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每瞬間 變化라는 眞理 안에서 그 變化의 흐름을 타고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宇宙 全切 모든 存在는

끊임없이 찰라도 쉼없이 恒常 움직이면서 變化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과 變化 하나 하나는 全部가

다 眞實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現實도 眞實이고, 몸이 아프고 病이 나는 것 또한 眞實이며,

苦痛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또한 眞實입니다. 이 世上 그 모든 것, 宇宙森羅萬象萬物은 變化라는 게임,

諸行無常이라는 게임의 一部인 것입니다. 모든 게임은 극적이고 반전이 있으며 일정부분 풀리지 않는 과제

동반하지요. 우리 삶이 꼬이는 듯 보이고, 힘들어 보이는 것 또한 變化라는 이 眞實 게임의 一部分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變化하는 듯 보이는 이 世上 이 모든 것들이 事實은 眞理 自體로 完全합니다. 우리가 

일은 變化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그저 宇宙法界의 變化의 흐름을 타고 受容하며 便安한 마음으로

함께 흘러가면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랬을 때 諸行無常 卽, 變化하는 宇宙萬物, 이 世上 모든 것들 그 自體에 永遠히 움직이지 않고 變化하지

않는  ‘이것’  또한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存在의 根源, '이것' 에서는 變化가 곧 

變化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