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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것들을 붙잡아 집착한 결과

장백산-1 2015. 9. 4. 16:23

 

 

지나가는 것들을 붙잡아 집착한 결과

 

 


 

우리는 지금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生覺인 我相에 얽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삶에 구속을 당해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인 我相에 얽매이지 않았을 때는 어땠을까요?

 

이 宇宙法界 즉 眞理의 世界, 本來 根本, 나라는 存在의 根源 마음자리, 텅~빈 그 바탕자리는

어떤 特性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완벽하고, 고요하고, 텅~비어있는 그 어떤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本來面目 자리 또한 無我라는 관점에서 中道的으로 이해한다면, 있거나 없다는

어느 한 쪽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자리지만 이해가 쉽도록 方便을 써서 설명을 드려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世上 모든 存在의 根源, 本來面目 자리는 미세한 티끌 먼지나 흔적도 없이 텅~비어

맑고 깨끗한 본바탕이지요. 方便으로 하나의 텅~빈 圓을 想像하면 存在의 根源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을까 싶네요. 텅~빈 이 본바탕은 항상 깨끗하고 맑고 청정합니다. 모든 存在의 根源, 本質,

본바탕인 텅~빈 본바탕 자리를 인간이 볼 땐 더러워 보여서 그렇지 사실 그 자리는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지지 않은 청정한 아주 깨끗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이 맑고 깨끗한 텅~빈 본바탕 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정한 텅~빈 본바탕 위를 삶이라는 것이 등장 했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내 인생이

라는 것이 텅~빈 본바탕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가고, 학창시절에는 친구도 텅~빈 본바탕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텅~빈 본바탕 자리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또 수많은 사건 사고 일들이 텅~빈 본바탕 자리에 나타났다가 스쳐 흘러가 사라져버립니다.

 

우리가 일반도로나, 고속도로에 가만히 정지해 있으면 무수한 자동차들이 그냥 휙휙 지나가듯이

그렇게 텅~빈 본바탕을 수많은 사람 사건 사고 일 상황들 즉, 삶 현실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한

순간도 쉼없이 그냥 휙휙 지나쳐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텅~빈 본바탕을 온갖 마음 생각들도 스쳐

지나가고, 인간의 느낌 감정, 욕망 욕구, 의도 의지, 인식 지각들도 스쳐지나가고 수많은 에너지들이

스쳐지나 흘갑니다.

 

맑고 깨끗한 텅~빈 본바탕을 지나가는 것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텅~빈 본바탕 위를

그냥 어떤 흔적도 남김없이 스쳐지나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人間이 어떤 일을 벌이기 시작했느냐 하면,

맑고 깨끗한 텅~빈 본바탕 자리를 스쳐지나가는 것들 중에 유별나게 눈에 띠는 게 있더란 말입니다.

내 생각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어요. 그러면 인간은 그것에 意識의 초점을 집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스쳐지나가야 될 것이 갑자기 나의 關心을 받게 됩니다. 내 意識이 그것에 딱 머물게

되는 거예요. 내 마음이 그것에 執着을 하는 거지요. 쉽게 말해 執着, 我執, 我相을 그냥 스쳐지나가야

것에 介入시킨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라는 의식에너지 즉, 아상 아집 집착이라는 에너지 덩어리

들이 계속해서 자꾸자꾸 에너지 덩치를 키우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여러분들은 사실은 본래 텅~빈 그 본바탕이 본래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意識은 我相이 좋아하는 것을 執着하는 에너지정보체이기도 하지만, 또 나머지 대부분 것들에 대해서는

그저 아무 執着 없이 그냥 그저 흘러가도록 지켜보는 에너지정보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主人公

으로서 주체적인 삶도 일부분 살고 있고, 붙잡고 집착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삶도 일부분 살고 있습니다.

생각 마음 의식이 외부로 투영된 결과인 몽환포영 같은 허구적인 이 세상, 현실, 삶을 그냥 스쳐 흘려보내

기도 하고, 허망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닌 이 삶, 세상, 현실을 집착해서 붙잡아두고 있기도 하잖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我相 즉, 내가 좋다고 執着해서 붙잡아 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던 對相들

즉, 세상, 삶, 현실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스쳐 흘러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일이

생길까요? 예, 그 답은 自由입니다. 우리들의 삶, 세상, 현실이 自由로워집니다. 내 것으로 붙잡아 둘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저 그냥 맑고 깨끗한 텅~빈 본바탕 그 모든 삶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그냥 바라보는 者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삶, 세상, 현실을 이처럼 그저 스쳐지나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삶, 현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의 고요함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스쳐 흘려보내는 방법,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집착을 하는 부분 보다는 안 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선택적으로 내가 關心이 있는 것들만 협소하게 집착을 하고 살지, 관심 없는 것까지

모두 집착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自身의 內面에 執着하지 않는 機能이 이미 있습니다.

 

삶, 세상, 현실에서 우리가 붙잡아 집착하는 것이 많을까요? 아니면 집착하지 않고 그저 스쳐 흘러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많을까요? 사실은 집착하는 것 보다 그냥 흘려보내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맛고 좋아하는 소수의 것들 몇몇 가지 집착해서 좋아할 뿐이지, 나머지 대부분의 것들은

특별히 집착하지 않고 그냥 스쳐지나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사는 것들입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내가 특별하게 좋아서 집착하는 몇몇 가지 것들, 즉 我相과 我執이 내 삶의 中心이

되어 내 삶 전체를 이끌고 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지요. 거짓 나, 가짜 나인 我相이 아닌 진짜

나, 우주법계, 본연 본래의 청정한 텅~빈 본바탕 본래면목이 가짜 나인 아상을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짜 나인 아상이 가짜 내 삶을 이끌고 가는 게 아니라, 진짜 나인 텅~빈 본바탕,

더 깊은 차원의 본래의 진짜 내가 가짜 나인 아상을 이끌고 가도록 진짜 나에게 모든 것을 턱하니

맡겨버리는 겁니다. 즉, 아상인 가짜 나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텅~빈 본바탕, 본래면목,

우주법계, 진짜 나가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믿고 맡기고 허용하고 내버려두는 겁니다.

 

아상인 가짜 내가 인위적으로 무엇을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나인 우주법계가 실행

하는 눈부시고 찬란한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가짜 나를 활짝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가짜 내가

실행하는 삶, 세상, 현실이 아니라, 진짜 나, 텅~빈 본바탕이 실행되도록 믿고 내버려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 진짜 나, 텅~빈 본바탕에게 모든 것을 믿고 내맡겼을 때, 진리의 일 즉, 진리의 세상이

펼쳐집니다. 아주 根源的으로 가짜 나의 의식, 아상을 돕는 삶, 일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진짜 나, 텅~빈 본바탕을 믿고 내맡기게 되면 가짜 내가 먼저 붙잡아 집착하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냥 진짜 나, 텅~빈 본바탕 자리,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거기에서 흘러가는 것들을 흘러가

도록 내버려 두게 되는 것이지요. 흘러가는 것이 진리의 세계의 일이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諸行無常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삶, 세상, 현실을 가짜 나의 것으로 붙잡지 않고,

믿고 맡기게 됐을 때 자연적으로 저절로 가짜 나와 이 세상, 삶, 현실에 대한 집착이 놓입니다.

집착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의 삶, 현실, 이 세상 모든 것은 스쳐지나 흘러가고 있는데, 스쳐지나가는

것을 가짜 내가 내 것으로 붙잡아서 집착하고 묶어두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붙잡아 집착하고 묶어 둬

놓고는 가짜 내 옆에 수많이 막 쌓여있는 것들, 그것들을 가지고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본래 텅~빈 본바탕인 진짜 나가 가짜인 나들에게 속아서 구속

을 당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정말 진짜 나인가 내것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가짜 내가 끊임없이 파동하면서 흘러가는 에너지들을 붙잡아놓고 그것들을 진짜 나라고 집착하고 있었

는데, 그것들이 실제로 진짜 내가 맞는 것인지를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해서 진짜 나, 진정한 내가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진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꾸만 묻게 되면 어쨌든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지 답을 얻어야 되잖아요.

내가 누구인지를 물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답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자연스레 답을 찾게 됩니다.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봐야 되거든요. 봐야 답이 나오잖아요.

 

‘이 뭐꼬?’ 라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에 답을 내려면, 봐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눈여겨 보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편견 없이 봐야 합니다. 기존의 편견, 선입견 어린 시선으로 나라는

존재를 보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간화선의 화두입니다.

 

화두, 이뭐꼬,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물음을 자꾸

던졌을 때, 그 답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나라는 존재를 지켜보게 되고, 그 결과 ‘아!  나라고 하는 존재

이것이 흘러가는 파동하는 에너지정보체, 의식체일 뿐이고,  가짜 나 즉 아상이 붙잡아 놓은 幻影이었

구나’라는 自覺이 생겨서 우주법계 즉, 진리의 세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

내가 진짜 나 자신을 보게되는 觀하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話頭 공부, 觀하라는 공부, 執着을 버리라는 공부, 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라는 공부 이

모두가,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물리적 정신적인 이 세상 모든 現象,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허용하고 받

아들이고, 거부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공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