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녹취] 제4분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1부| 법상스님 영상법문 녹취록
법우 | 2015.09.11. 02:00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323
네, 금강경 강의 하겠습니다. 오늘은 금강경과 마음공부 69쪽 부분인데요.
지난번에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에 대해 대략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槪念은
그 당시 인도 힌두교와 바라문교의 ‘아트만’ 思想, 즉 우리가 죽더라도 다음 生으로 이어지는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的인 主體인 自我가 있다라고 여기는 그 아트만 思想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그런 아트만(我相)은 없다. 우리가 죽더라도 다음 生으로 이어지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다음 生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無我라는 思想을 새롭게 설함으로써 我相을 타파하는 얘길 하셨고
또, 人相은 독자부라는 부파불교의 한 부파에서 푸드갈라라고 하는 輪廻하는 主體를 想定했기 때문에
人相 그것 또한 부파불교의 윤회를 상정하는 것 또한 타파하기 위해서 말씀 하셨다고 했구요.
衆生相은 불교내적으로 보살과 중생으로 분리하는 二元的인 差別心, 分別心,
중생과 생명 있는 존재와 생명 없는 존재로 분리하는 二元論的인 分別심 差別心 같은
그런 생각들을 가지지 말라 하는 차원에서 중생상을 설했고
壽者相은 자이나교에서 순수영혼, 지바라고 하는 生과 死를 超越하는
영원한 참 생명을 象徵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아니다 라고 설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 그 당시 印度에 다양한 부파, 다양한 思想들에서 온갖 相들을 내세웠던 것이죠.
四相 그것이 그 당시 공통적인 相이었던 겁니다. 四相뿐 아니라 九相이라고도 하는
여러 가지 영원한 '나'가 있다고 여기는 相을 모두 다 打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核心은 뭐냐 하면 四相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핵심은 뭐냐 하면
‘固定되고 不變하는 自我라는 實體는 없다’라는 겁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것 말고 또 다른 여러 가지 相이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相은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 할 때는 따로따로 하나씩 하나씩 떼어 놓고 이해하려고
막 애 쓸 필요 없이 그 당시 부처님께서 그 당시의 四相體係 특히나 AD BC 1C 전후에
부파불교와 바라문교 다양한 종교 사상가들이 있었을 그 당시에 다양한 어떤 思想體係에서 저마다의
方法으로 저마다의 用語로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的인 自我(아상)을 내세웠기 때문에
어떠한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 나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은 없다’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바로 이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는 것이 고정되고 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이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되고
물론 작년에 많이 설명을 해드렸지만 간단하게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면
自我라는 개념을 "業報는 있되, 作者는 없다." 라고 말씀을 드리는데요.
業을 짓는 行爲, 즉, 생각/마음, 말, 행동을 할 때 業이 발생됩니다.
그리고 그 業에 따른 果報가 있죠. 분명히 業과 그 業에 따르는 果報는 있습니다.
그런데 業을 지은 사람이 果報를 받을 때도 똑 같은 그 사람이 똑같이 받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거죠. 제가 이런 표현을 들었었죠? 지금 제가 어떤 나쁜 한가지 業을 지었다
그런데 제가 다른 生에 다른 나라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새로 태어난 그 사람이 다른 果報를 받는다
그 果報를 받는 사람과 前生에 業을 지은 저와는 같은 사람입니까? 완전히 同一體는 아니죠?
완전히 同一한 業에너지體가 아닙니다. 제가 다음 생에 미국에서 여자로 태어났다
그러면 그 미국에 있는 여자와 지금의 저와 제 전생이 아프리카의 원주민이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과 지금의 저와 미국의 여자는 동일 인물은 아닌 겁니다.
業을 지은 사람이 100% 그대로 지은 業에 대한 果報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業을 지은 사람과 그 業에 대한 果報를 받는 사람이 동일한 인물은 아니죠.
그러면 다른 겁니까?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에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에요.
즉, 業과 業에 따른 果報의 흐름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과 흐름은 있지만
業을 지은 者와 그 業에 따른 果報를 받는 者의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業을 짓는 자도 因緣에 따라서 잠시 잠깐 宇宙의 수많은 因緣들이 모여서
나라고 하는 存在(現象)을 形成하였고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잠시 그런 業을 지었을 뿐이고
우주의 수많은 業들이 모여서 나를 形成하는 건데 그 業들이 바뀌면 그런 業들/因緣들로 形成된
지금 여기의 나라는 존재도 당연히 바뀌지 않습니까? 생을 달리해서 바뀔 수도 있고, 열살 때 아이가
나이 오십 육십 칠십이 되었을 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죠. 성격도 바뀌고 가난했던 사람이
부자로 바뀌게 될 수도 있고, 인물도 외모도 바뀌고 다 바뀔 수가 있죠. 이처럼 우주만물,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變化하면서 흐르는 過程속에 있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아트만 사상(我相)에 의한다면, 業을 지은 者도 짓는 자라는 固定된 實體가 있어서
전생의 아프리카 원주민이나 지금의 저나 미국에서 태어난 여자나 동일한 아트만으로 같은 겁니다.
동일합니다. 동일한 실체를 규정하는 어떤 고정불변하는 독립된 自我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음 생에 내가 전생에는 너였고 다음 생에는 너였어 이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輪廻라는 槪念은 내가 나라고 내세울만 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輪廻를 하는 게 아니라 宇宙法界의 循環인 윤회하는 흐름의 과정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의 여러분은 지금 輪廻線上에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 空間에 존재하는 여러분들은
각각이 개체성을 지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여러분일 뿐이지, 過去 前生에 단 한 사람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없었고, 未來에도 단 한 사람도 지금 여기에
있는 여러분과 이렇게 똑같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무엇이 變해도 變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정불변하는 실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그냥 그렇게 變해가면서 흐르는
과정, 循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無我라는 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게 되면 충격을 받습니다.
‘야, 나는...
내가 어떻게든 부자가 되려고, 내가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잘나 보이려고
어떻게든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 보려고 기를 쓰고 노력을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 내가 없단 말이야?’
이 '나' 라는 것은 物質的인 側面으로 본다면 잠깐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운동을 하고
이렇게 살아서 나의 몸이 이렇게 유지가 되었어. 그런데 내 이 肉身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내가 아닌 여러분의 몸으로 바뀔 수도 있죠. 정확히 바뀌진 않겠지만...
제가 사과를 먹고 밥을 먹고 뭐 먹고 뭐 먹었어요. 먹은 이 것들이 똥으로 싸든 아니면 땀 오줌으로
배출이 되든 몸 밖으로 나간단 말이에요. 변으로 나간 것이 거름이 되어서 흙이 되고, 흙이 된 것이
다시 또 거름이 되고, 또 다른 쌀이 되고 과일이 되고, 그 과일 쌀을 다른 사람이 먹는단 말이죠.
이렇게 이 肉身이라는 物質은 계속해서 循環하는 겁니다. 니 몸에도 갔다가 내 몸에도 갔다가
옛날 2500년 전의 부처님의 몸이었던 것이 지금 나의 몸이 될 수도 있고
지금 불어오는 바람 한 자락이 사실은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내 뱉은 날숨이
지금 나에게 들어오는 것일 수도 있고 物質은 그렇게 끊임없이 끊임없이 循環한다.
物質만 循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도 마찬가지로 순환한다..
여러분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애매하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그 사람의 실체가 고정되고 불변하게 미리 딱 정해져 있어서
저 사람 좋은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 하면 고정된 실체가 없어요.
‘모르겠어’
분명히 좋은 사람이 있기도 있잖아요 저 사람은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좀 애매한 사람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좋은 거 같은데 성격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나쁘다고 하기도 그렇고 애매모호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에요.
고정되고 불변하게 딱 정해진 좋고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性格도 끊임없이 變化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격도 바뀝니다.
色(육신/물질)도 바뀌고 受 想 行 識, 느낌 감정, 생각 지각, 욕망 의도 의지 형성, 의식 마음 인식도
계속해서 바뀌는 과정 속에 있는 잠시 잠깐의 因緣假合의 現象(존재), 인과 연이 임시적으로 합쳐져서
만들어진 假有如幻의 存在(現象, 夢幻泡影)일 뿐이다
잠시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몽환포영 같은 존재가 나라고 하는 존재일 뿐인데 그런 몽환포영 같은
임시적인 존재가 夢幻泡影 같은 이 世上 모든 것들 뭐에 執着을 하겠습니까?
나라는 것도 없는 無我여서 나에게도 執着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나라는 것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임시적으로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존재일 뿐이다.
몸을 예로 들어봤을 때 우리 몸은 백조개의 細胞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백조개의 세포가 있고, 혀에만 구천개의 세포가 있는데 맛을 느끼는 세포가 있다고 그러는데요.
백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동차가 만육천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우주선도 오백만개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인간의 몸은 백조개로 이루어졌는데
일초에 삼백만 개의 세포가 生成과 消滅을 계속 반복한다고 합니다.
우리몸 백조개 세포가운데 삼백만 개가 일초에 태어났다 죽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現象은 이 細胞 차원에서 그런 것이고 이렇게 일초에 삼백만 개 세포가 生成消滅하면서
七年이 되면 백조개 세포가 全部 다 뒤바뀐다. 세포의 차원에서만 봐도 칠년 전의 여러분의 몸과
지금의 여러분의 몸은 완전히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몸으로만 본다면 전혀 다른 존재에요.
몸만 그러느냐 意識/마음/생각도 마찬가지겠죠. 連結性이 있는 무언가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전혀 다른 別個인데도 불구하고 그 때도 나 지금도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因果應報的인 連結性이 있기 때문이지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細胞들을 보면 이 세포를 쪼개고 쪼개서 分子를 분자를 쪼개고 쪼개서 原子를 원자를 또 쪼개면
亞原子 粒子 차원인 陽性子(proton) 中性子(neutron) 電子(electron)으로 나눠지는데
微粒子(素粒子)의 차원으로 더 나눠진다고 그럽니다.
미립자의 생멸, 미립자가 태어나고 죽는데 걸리는 시간이 10의 마이너스 23승 秒라고 그럽니다.
뭔 얘긴지 잘 모르시겠죠? 뭔 얘기냐 하면 얼마나 찰라냐 하면 얼마나 잠깐이었냐 하면
미립자의 10의 마이너스 23승 秒와 일秒의 比를 따진다면
인간의 일초가 소립자 세계의 삼백조년과 똑같다는 얘깁니다.
삼백조년은 지구 역사의 육십만배가 되는 엄청나게 긴 시간인 거에요.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쪼개고 쪼갠 微粒子의 生成消滅하는 時間이
그만큼 일초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끝도 없이 쪼개는 만큼의 어떤 찰라보다도
찰라인 더 심한 찰라에요. 찰라지간에 미립자 차원의 물질은 생성과 소멸을 계속 반복한다.
지금 여러분의 미립자의 몸과 지금 다음 순간 여러분의 미립자의 몸은 전혀 다른 미립자가
앉아 계시는 거에요. 아까 대웅전에 앉아 계신 분들과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분은 전혀 다른
미립자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미립자가 앉아 계시는 겁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끊임없이 찰라지간도 없이 내 몸에서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고 있는 끊임없이 변화 과정에 있는 찰나적인 존재가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죠.
無我이죠. 그렇기 때문에 固定된 自我라고 할만 게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地水火風이라는 에너지를 잠시 가져다 임시적으로 쓰다가 때가 되면
다시 지수화풍으로 돌려주는 과정, 지수화풍 이것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과정입니다.
지수화풍이라는 에너지의 순환이 막히면 몸에도 病이 오고 血管이 막혀서 病이 오고 하듯이
끊이없이 순환하는 과정 속에 있는 지수화풍을 온 우주법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共有하죠.
식물도 곤충도 곰팡이도 박테리아 바이러스도 화장실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조차 사람과
지수화풍을 共有하고 있다, 당장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대변이 우리 몸에서 나온거잖습니까?
그 대변도 우리와 함께 지수화풍을 共有하고 있는 거 거든요.
어떤 부인이 아이를 부처님께 드릴 테니,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아리따운 여인을 보고 똥주머니가 아무리 예쁜들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이렇게 얘기해 가지고 그 여인이 화가 나서 나중에 원한을 사고 그랬어요.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지수화풍이 그대로 나를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空氣가 오염되는 것은 곧 나의 呼吸이 오염 되는 거고, 물이 오염되는 것은 내 몸이
70% 이상이 물이니까 혈액이 침과 오줌과 이 모든 체액들이 오염 되는 것이죠. 내가 함부로 휴지를
버리고 땅을 오염시키는 것은 내가 내 몸을 오염시켜버리는 것과 같은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을 청정히
하고 청결히 하고 타인들을 잘 돌보고 타인들이 배 고플 때 맛 있는 걸 사주는 건 내가 언젠가 배 고플
때 내가 받는 것과 다른 게 아니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곧 내 몸을 가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不二) 因果應報로써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이 우주의 몸과 나의 몸이 다르지 않게 循環하는 과정인 것일 뿐이지
끊이없이 순환하는 가운데 잠시 잠깐 임시적으로 인연화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잎을 피우고 가을에 단풍이 지면서 열매를 맺었던 그 나무들이 겨울이 되면서
잎이 다 사라지고 떨어지고 초목들이 다 우거져 있던 이 길로 올라가 봤더니 여름 같은 때는 다닐 수가
없거든요 길 없는 곳으로 너무 우거져서, 겨울에는 다니기가 쉽죠. 그 우거졌던 것들이 다 사라져서
그것들이 있었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것처럼 우리 肉身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수화풍도 마찬가지다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것, 오온 즉 色受想行識(몸, 느낌 감정, 생각 지각,
욕구 욕망 의도 의지 형성, 의식 마음 인식)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초목과 마찬가지다.
동일한 것을 보고 어제는 괴로움을 느꼈는데 오늘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동일한 상황이 나에게 기쁨을 줄 수도 있고 슬픔을 줄 수도 있어요
相이라는 生覺 마음도 마찬가지죠. 우리들의 생각 마음도 끊임없이 변하고 바뀝니다.
TV에서 보는 내용들을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들을 내가 끊임 없이 가져다
나의 意識 마음 생각들을 形成하게 됩니다. 내가 TV의 어떤 프로를 보고 기쁨을 느끼고 따뜻함을
느꼈다. TV프로의 일부분에서. 그래서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TV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무엇이든
해야 되는 것이에요.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감명 깊게 본 책이나 TV나 감명 깊었다는 건 그만큼 집중
했다는 거잖아요. 集中해서 본 것은 더 강력한 힘으로 나라는 것, 생각 마음 의식을 형성합니다.
좋은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은 따뜻해 질 수 밖에 없어요. 폭력적인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은 저절로
폭력적으로 바뀔 수 밖에 없어요. 부모님이 폭력적이면 자식은 분명히 폭력을 씁니다.
부모님이 욕을 하면요. 자식은 분명히 욕을 합니다.
그 자식이 자신도 모르게 욕이라는 習이 저절로 自己化 되는 거에요. 그 자식은 부모인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나타난 그런 존재입니다. 자식이 잘못한 것을 보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이 잘못한 것을 딱 봤을 때 아 이 자식의 모습 바로 이게 내 모습이구나 라고 봐야합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하는데 나쁜 짓을 하는 자식의 그 모습이 그게 바로 내 모습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그 자식놈만을 뭐라고 한단 말이에요. 자식의 그런 모습의 種子가 나에게서 나온 것 인줄 모르고
그래서 애들은 부모에게 대들잖아요. 대드는 애들이 아름다운 애들입니다.
부모님한테 대들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찌 보면 가슴 아픈 일이에요.
아빠와 나와 엄마와 나와 비슷한 관계다. 平等한 관계다. 수직관계가 아니라는 얘기에요.
나는 어머님께 아버님께 어떤 말이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대드느냐 하면
이거 하지마 그럼 아빠도 옛날에 그렇게 했잖아요. 엄마도 그렇게 하신 적 있잖아요.
맞는데 부모인 우리는 그것을 인정을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런 모습에서 이 아이가 보고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잘 알수가 없으니까
자식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나에게 온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잘 살아야 해 나는 막 살아도 라는 말을 하지만 그럴 수가 없거든요.
이치 자체가 그럴 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부모가 하는 대로 자식은 듣고 보고 배우기 때문에
주변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그대로 보고 배우기 때문에 자식의 受想行識, 느낌 감정, 생각 지각,
욕망 욕구 의도 의지, 인식 의식 마음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바뀌죠.
識 意識 作用, 世上을 바라보는 思考의 틀도 계속해서 바뀌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 마음 의식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운 거에요.
삶은 괴로운거야 하고 생각을 하면 삶이라는 세상은 괴로운 것으로 바뀌는 겁니다.
마음 공부를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거야.
정신작용(생각 마음 의식)도 물질(몸)도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그러면 自我가 없다고 했는데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고 無我라고 했는데
나라는 그게 없다고 해놓고 四相을 九相을 다 打破하라고 해놓고
大乘佛敎에서는 왜 '참나'를 찾으라고 하고, 佛性을 찾으라고 하고, 主人公을 찾으라 하고,
本來面目을 찾아야 한다고 얘기하느냐? 궁금하시죠?
初期佛敎에서는 大乘에서 말하는 이런 참나, 불성, 주인공, 본래면목 얘기 안 합니다.
물론 완전히 안 하는 건 아니에요. 自性淸淨心이 客塵 煩惱 妄想 같은 거에 汚染되어 있을 뿐이다.
自性淸淨心 이것이 대승불교로 오면 확장되고 극대화 됩니다.
초기불교에서 참나, 불성, 주인공, 본래면목 얘기를 자주 안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트만 思想에 모든 사람들이 사로잡혀서 아트만을 實體化 시켜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는데 거기에다 참나, 불성, 주인공, 본래면목이니 그런 얘기 卽,
方便을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아트만 思想 그걸 깨주는 것이 절대절명의
부처님의 目標였기 때문에 我相 그걸 타파해줘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특히나 인도에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그런 無我의 方式으로 緣起의 理致를
설명하진 않았겠죠. 않았을수도 있었겠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었겠죠.
緣起法은 無我로 설명될 수도 있고 無分別로 설명될 수 있고 慈悲로 설명될 수 있고
다양한 次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緣起法이 無我로 설명된 理由가 당시 印度 사람들은 自我라는 實體的인 自我觀念에 執着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어느 정도 타파되고 나서 大乘에서 이제 참나, 佛性, 主人公, 本來面目 이런 걸 얘기합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스님들을 완전히 불교도 아니다.
완전히 까 버립니다. 초기불교만 완전히 초기불교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요.
초기불교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은 정종스님 법문에 대해서 과감하게 욕을 하구요.
정종스님이란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아함경도 니까야도 안봤느냐
정종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主人公을 찾아라 本來面目을 찾아라 하시니까.
看話禪이라는 게 本來
여러분 뭐가 맞습니까? 여러분도 잘 모르시겠죠. 스님들도 막 싸우는 판이데
제가 工夫를 해 보니까요. 제가 얘기 하는 것도 이것이 다 맞을 수는 없을 겁니다.
初期佛敎에서는 그 당시 時代的인 狀況 때문에 그 당시 유행하던 아트만 思想을
打破해야 한다는 얘기를 곁가지로 좀 살살 했어요.
그런데 大乘佛敎로 넘어오면서 아트만 思想을 타파해야 한다는 그런 얘기들이
主人公, 本來面目, 如來藏, 佛性 이런 方便의 표현들로 나타나게 되구요.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도 어떻게 이해해야 된다고 설명하셨냐면요
모든 부처님 가르침은요. 中道的으로 理解 했을 때 中道的인 理解 속에서 方便이 許容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쉽게 잘 안되실텐데 뭔 얘기냐 하면요.
제가 아까 말했습니다. 輪廻를 했을 때 제가 다음 生에 美國에서 女子로 태어났다.
그러면 그 존재와 지금의 나와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우리는 이해를 했었죠.
같다라고 하면 틀린 겁니다. 틀렸다 해도 틀린 겁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죠, 그죠?
이렇게 이해하는 이게 중도적인 이해입니다. 같다라고 해도 안되고 틀리다 라고 해도 안 되는
방식으로 중도적으로 우리가 보는 거에요. 그런 상황에 대해서, 윤회에 대해서.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기 볼펜이 하나 있는데 긴가 짧은가?
전봇대 옆에선 짧고 이쑤시개 옆에선 길죠. 이 볼펜 얘는 길거나 짧다고 얘기할 수 없는 겁니다.
인연 따라 중도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거죠. 중도적으로 얘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거죠.
여러분 아들이 잘 생겼습니까? 못 생겼습니까? 중도적으로 잘났을 수도 있고 못났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 성격이 좋으냐 나쁘냐? 중도적으로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크다 작다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어요.중도적으로 이해 했을 때 分別하지 않게 되죠.
아 저런 사람도 있겠구나 저런 사람은 어떤 저런 성향인 것이구나.하고
중도적으로 이해를 했을 때 우리는 누구를 과도하게 미워하거나과도하게 執着하게 되지 않게 돼요.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될 뿐이지 과도하게 싫어하거나 과도하게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中道的으로 理解를 해야 되는데
초기불교에만 매몰되서 빠져 있는 사람은 완전 초기불교주의자가 되어서
대승불교 스님들은 다 邪法을 행하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을 정도고
대승불교를 하는 사람들은 초기불교의 수행에 대해서는 그거는 最上乘의 수행이 아니다.
그거 가지고 깨달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방법인데 그게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단 말이죠. 지금은 거꾸로 초기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승불교를 막
욕하고 이러는 일이 생긴단 말이죠. 이 초기불교, 갑자기 요즘에 초기불교주의자 제가 자꾸 초기
불교주의자라고 얘기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함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法을 설하신 것 그것을 모아 놓은 것을 모아놨는데 그것을 漢文으로 번역한 걸 아함경이라고 그럽
니다. 빨리어로 번역이 되어서 南方으로 전파된 것을 니까야라고 해요.
아함경과 니까야는 내용이 거의 흡사하고 중복됩니다.
그런데 이 니까야가 조금 더 원전에 가깝습니다. 원전에 가깝고 조금 더 생생하게 부처님 당시를
볼 수 있고 하다 보니까 이 니까야가 아주 중요했는데 우리나라에 번역이 안되어 있었어요.
니까야 자체도 발견한지가 얼마 안됐고 英國人들이 印度를 지배했을 때 그때 發見한 겁니다.
그래서 英國으로 가져와서 니까야는 英語로 제일 먼저 번역이 됐어요.
그 다음에 60년대 70년대 때 일본어로 번역이 되어서 일본이 지금 일본 불교가 불교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이유가 그겁니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학보다요 미국이나 유럽 영국의 불교학이 훨씬 더 발전
했어요 불교학은. 영어로는 벌써 니까야 번역이 다 됐으니까요.
韓國語로는 언제 번역됐을까요? 最近에 최근 몇 년 사이에 번역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니까야를 발견하고 나서는 맨날 아함경만 보고 대승불교 경전만 보던 사람들이
이러한 생생한 原音이 있었구나 하고 놀라웠던 거죠. 그리고 또 요즘에 붐이 일어나는 게
미얀마나 이런데 가서 위빠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거기는 다 니까야 위주로 공부를 하니까
그러니까 니까야 지상주의에 빠진 사람들도 생겼다.
그런데 이 니까야만 보게 되었을 때는 大乘佛敎에서 얘기하는 自性淸淨心 그런 것은 없다 라고
탁 단정지어 버려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自性淸淨心 이것을 中道的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에 초기 불교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없다고 하면 대승 불교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佛性이 없다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佛性이 있다고 한 理由는
方便으로 중도적으로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고 중도적으로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들이 음식을 먹을 때 누가 음식을 사줬어요. 맛있어 하고 물어보면 맛있다고 하죠, 그죠?
사줬는데 맛있는데 맛있다고 해줘야 그 사람도 좋아할 거 아니겠어요? 먹으면서 맛있어 하고
물어보는데 이건 맛있지도 않고 맛없지도 않고, 당신이 잘했다고 칭찬해 달라고 하는데
그건 잘한 것도 아니고 못한 것도 아니오. 뭐 이런 식으로만 얘기한다면 우리가 삶을 살 수가 없죠.
人生을 살려면 方便으로써 中道的으로 理解해야 하는 것은 알아요.중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
알지만 現實에 應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것처럼 佛性을 中道的으로 理解 해야 되는 거는 알지만, 衆生에겐 方便을 써서
佛性에 너무 집착해 있는 사람은 ‘그런 건 없어’ 하고 깨줘야 합니다.
佛性에 대한 집착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불성이 없다고 하니까
내가 그럼 정말 眞理를 깨칠 필요도 없고 편안한 거구나 이렇게 빠진 사람한테는
‘佛性이라는 게 있어’ 라고 工夫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줘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거죠.
그런 方便的인 觀點 속에서 佛性을 理解했을 때 佛性을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중도적인 이해의 관점을 내려놓고 일반 설법할 때는 설법 할 때 마다
그 얘기를 할 수 없죠. 불성에 대해 얘기한단 말이죠. 주인공에 대해 얘기한단 말이죠.
하다 못해 혜민스님이나 정목 스님이나 월호 스님이나 유명한 스님들 이런 스님들도 법문 할 때
다 佛性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자신의 마음의 本性을 찾으라고도 얘기하고
우리나라 스님들이 다 그렇게 얘기하죠. 큰스님들도 그렇고
그런데 일부 편향적으로 치우쳐 있는 초기불교 하는 사람은 정목 스님도 혜민 스님도 초기불교를
공부하지 않은 정말 어리석은 스님인 것처럼 막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고
그래서 그 내막을 가만히 봤더니만 그겁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아트만 卽, 自我라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我相이 없다고 했는데 왜, 佛性을 얘기하느냐? 불성을 얘기하는 자체가 외도다, 사탄이다.
이렇게까지 몰고 가는 거에요.
그분들께서 초기불교 대승불교 공부를 안 해가지고 이 얘기를 몰라서 美國에서 佛敎를
가르치는 敎授님인데 몰라서 그렇게 佛性 얘기를 했겠습니까? 方便이 必要한 거에요.
그러면 이걸 완전히 方便이라고 할 수 있겠냐?
예를 들어 宇宙法界 全切가 나도 너도 모든 것이 전부 다 佛性이고 佛性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0.000001%도 티끌 먼지도 말할 것 없이 모두가 다 佛性이에요.
그럼 佛性이라고 얘기를 굳이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佛性이 있고 佛性 아닌 게 있을 때 佛性을 드러내야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宇宙 全切가 全部 다 佛性이면 佛性을 할 필요가 없죠.
우리가 佛性이라고 말할 때는 佛性이라는 그 用語에 執着하면 안됩니다.
佛性이라는 게 어떻게 생겼을까? 리를 굴리면 안됩니다.
相을 타파하는 것 佛性에 대한 相을 타파하는 것
불성은 이럴 것이야 저럴 것이야 이렇게 生覺으로 헤아리고
妄想으로 相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次元에서 佛性을 이해하고 접근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왜 불성이 없습니까?
왜 참나가 없습니까? 있죠. 그런데 또 있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 이렇게 불성에 대해서 중도적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돼요. 금강경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 불성을 중도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구나.라고 알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아주 重要한 部分이에요.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불교를 앞으로 공부해 나가시는 데 있어서
그래서 이것을 그럼 佛性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렇게 표현하기가 아주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뭐라고 표현 했느냐? 妙하게 있다. 그랬습니다.
妙하게 있다. 妙하게 움직였어요. 妙하게 소리가 들리죠, 이럴 때.
진공묘유 (眞空妙有)라고 들어 보셨죠? 본래 참되게 봤을 때는 空한데
텅~비어서 아무 것도 없이 空한데 참으로 봤을 때는 空한데 妙하게 있어요.
妙有란 말이죠. 묘유(妙有) 妙하게 있다.중도적으로 있다는 소리 입니다.
여러분이라는 존재도 原來는 空한데 妙하게 있습니다.
妙하게 있다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緣起的으로 있다는 겁니다.
고정불변하는 독립된 실체로 있는 게 아니라 연기적으로 있는 거 중도적으로 있는 거에요.
이 사람이 착하냐 못됐느냐? 물어봤을 때 本來는 空한 겁니다.
그런데 妙有로써 착해 별로야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다는 거죠. 方便으로써 妙有라는 것까지
그 世界까지 우리가 무시하면 세상을 살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 世上 이걸 眞空妙有라고
한단 말이죠. 중도적인 이해를 할 때는 이렇게 妙라는 표현을 씁니다. 妙, 그야말로 妙하잖아요.
있긴 있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佛性도 마찬가지로 중도적으로 이해 해야 합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건 아니잖아요. 중도적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眞空妙有로써 있다 없다 치우치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 다음 장에 제4분 妙行無住分이 나오는데 여기에 妙行無住
無住, 머무는 바가 없는 妙行 妙한 行 즉, 이렇게 앞에 우리가 공부했던 것처럼
我相이라는 것도 그렇고 佛性이라는 것도 그렇고 自我라는 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을 實體的인 自我가 있다고 生覺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체적인 자아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그렇다고 없다 있다라고 완강히 나눌 수는 없다.
妙하게 있다라고 알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妙하게 行할 수가 있습니다.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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