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강길웅 신부님의 심우도 해설

장백산-1 2015. 9. 9. 23:18

강길웅 신부님의 심우도 해설.. 영성항기방

조인숙(아가다) |2012. http://cafe.daum.net/kcou/SmZh/4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의 의미

사찰에 가면 법당의에 그려진 벽화에서 심우도를 볼 수 있는데, 사찰을 찾을 때 이 심우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탐방의 의미를 더욱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소(牛)는 道家에서는 유유자적, 儒家에서는 義를 상징했지만 佛家에서는
‘人間의 本來 자리’를 의미한다.

수행으로 人間의 本性을 깨달아 가는 過程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소
즉 마음은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 佛子와 친숙하다.
대부분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본성)를 비유한 상징들이 들어 있다.

禪師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高麗 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號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 ‘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卍海 한용운 선사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을 심우장
(尋牛莊)이라 했다.
‘佛性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牛)는 人間의 眞面目,
본래모습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심우도는 중국 송나라 때 보명(普明)스님의 심우도와 확암스님의 십우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까지 두종류의 그림이 함께 했으나 최근에는 확암스님의 십우도가 주로 그려지고 있다.

 

<강길웅 신부님의 심우도 해설>

 

신부님 : 부처님은 먼 피안의 세계에 있지 않아요. 각각 사람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本性(부처)를 
바라보면 成佛하는 거죠. 
그래서 깨닫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 안에 있는 本性을 찾아 本性을 바라봐야 되요,


여기서는 마음(본성)을 소(牛)로 묘사한 것입니다.
동자가 깨닫기 위해서 소(본성)을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림이
열장이라 해서 십우도(十牛圖), 또는 소를 찾는 그림이라 해서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합니다.


 

 

 

1. 심우(尋牛)
처음 발심(發心)한 수행자가 아직은 禪이 무엇이고 本性(본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본성
찾겠다는 열의로 마음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신부님 : 동자가 고삐를 들고 소(本性/마음)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요.

마음(본성, 소)가 어디 있는지?... 아무 대책이 안 섭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하다 보니까 

 

 

 

 

2. 견적(見跡)
견적은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本性(소, 마음)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됨을 상징한다.


신부님 : 잡초 사이로 소(본성, 마음)의 발자국, 흔적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동자는 어렴풋이 본성, 마음이 무언지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정진하다 보니 드디어 마음 한 쪽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소꼬리를 바라보게 되는 거지요.


우리로 치면 이래요.

어느 날 대책이 안서는 十字架(십자가)가 들이 닥칩니다. 
쉽게 말하면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내가 떠 맡게 되요. 대책이 안서요. 어떻게 모셔야할 지를...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시어머니를 모시다 보니까 이게 내 팔자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견우(見牛)


本性(소, 본래마음)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신부님 : 하도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를 간절히 하다 보니 하느님 뜻이 어렴풋이 보이는 겁니다.

 

 

 

4. 득우(得牛)

 

이 경지를 선종(禪宗)에서는 見性이라고 하며,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금강석을 땅 속에서 

찾아낸 것에 비유한다. 이때의 소(본성, 본마음)은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직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는 거친 마음(心)의 상태임을 상징한다.


       신부님 : 네 번째는 드디어 마음(소, 본성)을 붙잡게 됩니다. 바라보게 되는 거지요.

소(본마음, 본성)은 아직 길들여 지지 않았어요.
몸 가는 데 마음 안 오고, 마음 가는 데 몸이 안 오고...

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몸이고...

몸과 마음 이게 일치가 잘 안 되죠.


사실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오로도

‘마음은 善을 하고 싶은 데 몸은 자꾸 惡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듯이

마음과 몸이 갈등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도 성체조배를 한다... 묵주기도를 한다... 하지만,

머리는 사우나로 갔다... 미장원에 갔다... 입으로는 기도를 하는 데 이러잖아요?!

바로 요런 상황입니다.


십자가로 치면 이런 거예요.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하느님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다른 동서도 있는데...”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이럴 때는 소(마음, 본성)이 길들여 지지 않았으니까 코뚜레를 꿰어 가지고 

채찍으로 때려야 되요. 즉, 고행과 나눔이 필요한 거예요. 더 고생을 해야 되는 거지요.

 

 

 

 

5. 목우(牧牛)


삼독심(三毒心)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선종에서는 이 過程을 가장 重要視한다.
이때의 소(마음)은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 검은색이 차츰 흰색으로 변해 간다.

 신부님 : 다섯 번째는 드디어 소(마음)이 길들여집니다. 동자가 잠을 자도 소는 도망가지 않아요.

즉,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가 반만 하얗습니다.

이것은 三毒心이 아직 다 안 빠져서 그래요.

세 가지 毒이란, 貪(탐), 瞋(진), 癡(치)를 말합니다.

탐(貪)은 탐욕으로 慾心, 진(瞋)은 분노 성질 부리고 화내는 마음, 치(癡)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깨닫기는 했는데 아직 삼독심 거기에 얽매여 있어요.


우리로 말하면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하느님 뜻이라는 사실은 알았어요.

그래서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성지순례도 가고...어디 좀 갈려고 하면 

때때로 “심란하다.”  바로 그 뜻입니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동자가 소(마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며 本來 마음의 故鄕으로 돌아오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이때의 소(마음)은 전체가 완전한 흰색을 띠고 있다.

소(마음)과 동자가 하나가 되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며,

구멍 없는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는

깊은 마음자리,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없는 소리를 의미한다.


           신부님 :
여섯 번째.
동자가 소를 타고 집으로 갑니다. 이제는 욕심,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완전히 초탈한 상태입니다. 소를 타고 집으로 아주 멋있게 개선장군처럼
                   가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여기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꺼꾸로 십자가가 나를 짊어지고 가요. 이 말을 잘 음미해 보세요.

십자가가 어떻게 나를 짊어지고 가나.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니까

여기 가서 불평하고, 저기 가서 불평하고...

“못 살겠어. 정말 아주 냄새 나는 시어머니 땜에...” 마구 이러니까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속으로 그럽니다.

“저 여자 팔자가 사나워서 그래.”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래.” 등등...

이렇게 말들을 해요.
그런데 이 며누리가 천주교에 입교를 하더만,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네요.

어디를 가서도 시어머니 자랑 하고...  아~ 이러니, 사람들이 이번엔 뭐라 그래요?


“아무개 엄마는 하늘이 낸 여자야.”  “아무개 엄마는 천사 같애.”
십자가가인 똥 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이번엔 며느리를 태우고 가는 거예요.

 

 

 

 

7.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아 끌고 온 소는 온데 간데 없고 자신만 홀로 남은 상태를 말한다.

結局 소(마음)은 本性, 본래마음을 찾기 위한 方便이었고, 이제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 方便이었던 소(마음)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행복의 나라에 도착했으면

타고 강을 건넌 뗏목(소, 마음, 방편)은 다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신부님 : 일곱 번 째. 소를 타고 집에 갔더니 소가 없어졌요. 소(마음)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소(마음)
이 건 하나의 방편이었어. 무슨 方便?  하느님의 집(천국)에 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소는 본래 없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내 기도나, 내 수행이나,
                        내 의지만으로는 하느님 아버지 집에 못 들어 가요.
못 들어가 안 돼!  어떤 도구가 있어야 돼. 
                            방편이 있어야 돼. 그 방편, 그 도구 그게 뭐야?  십자가! 십자가입니다.

즉 불청객(갈등, 고통 등등)이 찾아 와야만, 그것 때문에 하느님 집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일단, 주, 하느님 아버지 집에 들어가면 십자가는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아! 이 십자가, 방편이 나를 하느님 집으로 인도 했구나.’ 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마음)도 자신도 모두 잊어버린 상태를 圓相(동그라미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客觀이었던 소(마음)를 잊었으면 主觀인 동자 자신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주관과 객관이 分離되기 以前의 본래마음의 상태, 本性의 상태를 象徵한다.

이와 같은 의식 수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일컫는다.

 

신부님 : 여덟 번째는 나도 없어요. 내가 완전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소금이라면 물에 다 녹아서 소금물 하나가 되어 버리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은 거예요. 緣起 또는 空의 성품을 깨달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因緣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거예요. 없는 거요.
여러분들도 어머니 아버지가 만나기 前에 여러분들은 어디 있었어요? 없었어요.

우리가 죽으면 내 몸에서 바람이 빠져나갑니다. 물도 빠져나가요.

온기도 다 빠져나가고, 내 몸이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풀도 되고 나무도 되요.


그럼 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곳이 어디냐?

물질적으로 보면 내가 돌아가서 바람도 되고,

물도 되고, 흙도 되고, 나무도 되고, 풀도 되요.

 

 

 

 

9. 반본환원(返本還源)
주관과 객관의 분별 구별이 없는, 즉 있는 그대로 비치는 自然의 모습을 표현한다.

'산은 산, 물은 물' 自然 그대로의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경지이다.

신부님 : 아홉 번 째. 이것은 나도 없는 겁니다.

나무도 불타면 없어지잖아요. 돌도 닳으면 없어지고...

이 사실을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事物의 眞面目, 본래면목, 본바탕을 보게 돼요.

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것이 바람이죠, 물이죠, 땅이죠, 풀이죠, 나무죠.

알고 보니 ‘이 宇宙 自然은 내 몸과 하나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리고 이 우주는... 자연은... 내 집과 같다. 내 몸과 같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요.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중생 교화를 위하여 석장을 짚고 다시 세상 속으
로 나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부님 : 반본환원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세상 속 저잣거리로 나가요. 술집에도 가고, 고기집에도 가서

욕심 부리는 사람, 성질 부리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있으면 가르쳐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피정의 집에 와서 강론도 듣고, 절에 와서 설법도 들었으니,(웃음)

집에 갔을 때, 누군가가 십자가인 똥 오줌 싸는 시어머니 때문에

화 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나 기도만으로는 결코 하느님 아버지 집에 못 들어갑니다.
그것(십자가, 고통 괴로움, 똥 오줌 싸는 시어머니)가 와야만 그것을 도우며 그것을 방편 삼아서

하느님 아버지 집에 들어가게 돼서 하느님과 만나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일러 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