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내가 소(本性)를 길들일 수는 없다

장백산-1 2015. 9. 9. 22:19

 

 

내가 소(本性)를 길들일 수는 없다 / 길없는 길  

2015.09.09. 08:29 복사 http://blog.naver.com/mongza04/220476022681

 

<심우도(尋牛圖)>는 불교 禪宗에서 本性을 깨닫는 過程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소개한 그림입니다.

선수행의 단계를 소와 동자를 출현시켜 10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어서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합니다.


동자가 깨달음의 마음을 내고 소(本性)를 찾아 떠납니다. 우연히 소의 발자국을 보고 그 자취를 따라가서

소를 보고 소를 붙잡습니다. 野生의 소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동자는 채찍과 고삐로 소를 길들인 후, 소 등에 올라타고 유유자적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채찍과 고삐도 놓아버리고 소도 사라지고 동자도 사라져 텅~빈 空間만 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自然그대로의 狀態로 還源하며, 이후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깨달음을 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迷惑에서 벗어나는 꿈 같은 人生의 旅程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과 간단한 詩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공부 하는 이들에게 대략 마음공부의 內的 變化의 旅程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이 그림이

많은 이들의 공부 여정에 훌륭한 안내가 되고 있습니다만, 자칫 誤解의 소지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견우(見牛) 즉, 소를 본다는 것은 本性을 체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소를 붙들어서(得牛)

소를 잘 길들여 나가는 것(牧牛)는 分別 없는 本性에 익숙해진다는 뜻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동자가 소를 길들인다'는 것은 誤解될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구나에게 깃들어 있는 本來 이미 完全한 本性을 쉽게 깨닫지 못하는 主된 理由가 '나'라는 것과

世上이라는 對相이 分離되어 있다는 幻想에서 始作되기 때문에 '동자(나)가 소를 본다', '동자(나)가

소를 잡는다', '동자(나)가 소를 길들인다'는 것은 오히려 '나'라고 여기는 錯覺, 卽 我相, 自我意識을

한층 더 强化시키는 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本性을 보고 얻고  길들인다는 立場에서 체험 이후의 공부를 해나간다면 적지않은 混亂과

장벽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本性을 보고 얻고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時節 因緣이 되어 本性이

저절로 드러나 밝아지고 이 過程에서 '나'라는 自我意識이 消滅되는 過程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本性을 체험하고 나서 겪게 되는 混亂이 이 '나'라는 것이 공부를 主導하려는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흔히 本性에 대한 체험을 한 後 이것을 챙기려 드는 마음의 習慣性을 보입니다. 어렵게

얻은 것이니 잃지 않으려고 이 자리, 이것에 執着하지요. 이 자리, 여기에 있으면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아 便安하기에 이 맛이 좋습니다. 물론 이 공부의 맛을 보아 더 힘을 얻고 나아가는 임시적인 쉼이

라면 나쁘진 않습니다. 그러나 時間이 지나다 보면 여러가지 因緣을 만납니다. 그럴 때 便安함에

貪着하여 散亂한 境界를 避하려 하고 산란한 境界를 만날 때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는 意圖的인

造作을 自己도 모르게 試圖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를 길들이는 悟後 保任이라는 錯覺을 하게도 되지요.


그러나 原來 妄想煩惱는 내가 世上을 統制하려는 意圖에서 비롯되었습니다. 世上의 因緣은 나의

意志와 나의 뜻과 전혀 相關없이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내가 젊음을 유지

하고 싶다고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지 않다고 죽어지지 않는것도 아니고 행복하게만 살고

싶다고 그렇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心理는 世上과 分離된 나라는 存在가 自己를 유지하려는

手段입니다. 나의 安衛, 나의 安全을 위해 世上과 끊임없이 鬪爭하고 긴장합니다. 일시적으로 나의

便安함과 나의 幸福을 맛보았더라도 이것을 유지하려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마치 호수에서 우아하게 노니는 백조가 水面 아래서는 쉼없이 발로 물을 젓고 있는 것처럼. 解脫은

바로 이러한 根源的인 不安한 心理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마조스님에게 제자 백장 스님이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의 참뜻입니까?"

마조스님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대가 목숨을 내려놓을 곳이다."

 

根源的 解脫은 世上과 分離 分別된 '나'라는 것이 本來 存在하지 않음을 깨닫는데서 비롯됩니다.

나의 虛像이 萬天下에 드러나야 나의 안위를 위한 투쟁이 멈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

공부에서 조차 자칫 나의 안위로 向하는 잘못된 方向性을 구축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便安해지기 위한 工夫가 아니며, 내가 幸福해지기 위한 工夫가 아닙니다. 이것은

限界가 있는 便安이며 幸福입니다. 不便과 不幸이 어느 때든 侵犯할 수 있는 분리 분별로 인한

便安과 幸福이어서 마음놓고 온전히 편안하게 쉬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本性은 나의 幸福도 不幸도 넘어섰습니다. 나의 便安과 不便도 넘어섰습니다.나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니 나를 돌아보지 않을 일입니다. 내가 本性 속에 녹아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소(本性)에 익숙해

지고 내가 소에 길들여져서 結局에는 소도 나라는 것도 사라져 이 꿈같은 人生 旅程이 本來  始作도 하기

前에, 꿈같은 人生의 旅程 속에서도 한결같이 그 꿈같은 인생 여정을 배후에서 떠받치고 있었던 텅~빈

본바탕, 본성, 圓相 그대로 임을 깨달을 뿐입니다.    

 

이 世上은 分離 分別된 存在들을 認定하는 分別心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變하고 變하여 덧없지만,

本性의 눈으로 본다면 이 世上 모든 것이 멈춤없는 生動性으로 한결같다고 方便삼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라는 것도 投影된 것이고 世上 모든 것이 물결처럼 드러난 것이어서 물결로 드러난 내가 물을

統制하고 길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라는 것이 그림자와 같고 물결과 같음을 깨달아 그동안 나라는

물결이 물이라는 本性을 깨달아서, 그 本性을 統制하려고 했던 어리석은 錯覺에서 벗어날 뿐입니다.

幸福이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들이고, 不幸이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들입니다.

혹은 행복이 찾아와도 놓아버리고, 불행이 찾아와도 놓아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는 행복에서도 깨어나고 불행에서도 깨어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本性은 나의 幸福도 不幸도 아니며, 나의 幸福과 不幸과 相關도 없지만,

本性은 幸福과 不幸 그 自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自體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나의 안위에 相關된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음이 바로 소(本性)에 길들여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소와

나가 따로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 本性을 체험했을 때는 心的으로 따로인듯한 本性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이것은 나라는 것이 여전히 따로 있는 듯한 分別의 習慣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어느 순간 소(本性)가 따로 없었다는 깨어남이 있으면서 나라고 하는 것도 自然스럽게 따로 存在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의 旅程이 꿈이었음을, 깨달을 것이 본래 없었음을 보게

되어 동자가 깨달음의 마음을 내기도 前에 本來 本性은 이미 完全했고, 그 後 깨달음의 旅程을 떠나있는

동안에도 아무 일이 없었으며, 모든 꿈에서 깨어났어도 그런 일이 없음을 여실히 볼 뿐입니다.

꿈은 계속되지만 그저 꿈 그대로 깸임을, 分別된 世界 그대로 分別되지 않은 世界임을

스스로가 납득할 뿐입니다.


[출처] 내가 소를 길들일 수는 없다|작성자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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