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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불교는 거짓이다”

장백산-1 2015. 9. 10. 00:38

 

 

 

우희종 “불교는 거짓이다” | 소식알림방

道門 최일수 | 2015.08.06. 11:04

 

우희종 “불교는 거짓이다”

청담동 벙커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강의 
 
2015년 08월 06일 (목) 05:30:36 조현성 기자 cetana@gmail.com  
 
 


우희종 교수는 5일 서울 청담동 벙커에서 ‘개불성-개에게도 佛性이 있는가’ 주제로 강연했다. 강의는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청담동 벙커에서 진행된다. 다음은 3회차인 이날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벙커에서는 우 교수 외에도 매주 월요일 최강욱 변호사와 이정렬 전 판사의 '쫄지마 형사절차', 매주 화요일 김윤태 교수(고려대)의 '사상가를 통해서 본 복지국가', 매주 금요일 바리톤 박경종 교수의 '불금가수' 등 강의가 있다. 매주 목요일은 전국구 공개방송을 한다. (02)515-3159 

 

佛敎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다.

무엇이 불교인가? 부처님이 일생 동안 설한 가르침을 불교라고 말한다. 불교는 “너의 本來 자리를 찾아라!”라고 하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다. 이는 本來의 自身에게 눈떠 살아가라는 각성제 먹기 운동과 같다. 事實의 世界(사바세계)로부터 眞實의 世界(극락정토)를 認識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까? 三法印(無常, 無我, 苦)은 存在의 實相을 알려준다. 네가 붙잡으려는 것은 다 똥이라는 것, 緣起實相을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이 世上 萬有의 法則을 말한다.

方法으로 부처는 四聖諦와 八正道를 설했다.

 

초기불교는 個人 修行을 통한 아라한을 목표로 삼았다. 초기불교는 欲望의 消滅을 重視했지만 大乘佛敎는 다르다. 大乘佛敎는 自他不二 修行을 통한 菩薩을 人間相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欲望의 肯定을 뜻한다.

 

똥꼬집을 버려라

지난 시간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야기했다. 달걀을 두고 피카소와 달리는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이다. 둘이 서로 자기가 바라본 달걀이 옳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자기가 보는 것이 全部이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똥고집이다. 부처님은 끝없이 自身의 똥고집을 버리라고 했다.

 

大悟覺性은 깨달음을 통해서 깨어있음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불교는 성철 스님의 깨달음에 멈춰서 맴돌고 있다. 그러다보니 조계종이나 신도들이 방황하고 있다.

覺性이 빠진 그저 깨달음만 외치는 형국이다.

 

‘如是我聞여시아문’인데 客觀的일 수 있나?

오늘은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불교가 무엇인지는 經典에 나온다. 불교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여시아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시아문’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말이다.

 

주관과 객관을 놓고 볼 때, ‘나’라는 주관이 들어가 있는데 객관이란 과연 가능한가. 反對로 객관이 곧 전체인가? 미붓아카데미에서 ‘一微塵中含十方’을 이야기하면서 주관이 모이면 객관이 된다는 危險한 주장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낱낱의 主觀이 모인다고 해도 여전히 主觀일 뿐이다. 언제부터 客觀的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客觀이란 可能한 것인가.

 

본보기로 성장기 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경전도 그런 것 같다.

客觀은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主觀의 擴張, 主觀의 多數가 客觀이다.


  

   
 

멍청하고 폭력적인 質問

사람들은 왜 合理的 選擇을 하지 않는가? 이는 經濟學 認知心理學 進化心理學 등에서 던지고 있는 멍청하고도 폭력적인 質問이다. 生命體는 生命 現象을 나타내는 物體이다. 身體的‧精神的 個體 固有性을 말한다.

個體固有性은 我相이다. 各各의 生命體는 그 누구도 代身할 수 없는 存在이다. 생태계는 각 생명체의 다양한 어우러짐을 말한다. 生命은 眞理이고 길이고 佛性과 모든 存在의 根源을 말한다. 폴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生命은 모든 存在 그 自體, 모든 存在의 기적을 뜻한다.

 

사람들이 왜 합리적 선택을 안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면 무엇이 삶의 合理性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合理的 選擇을 한다. 단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을 뿐이다. 모든 生命은 基本的으로 生命體의 固有함을 갖고 있기에 個人의 選擇은 그 自體로 온전하고 合理的이다.

 

眞實 아닌 事實로 構成된 世上

우리가 익숙한 것들은 이해할 수 있는 객관 표현적인, 너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것들, 지구가 둥글다와 민청련 사건 등 과학적‧사법적 사실은 어디까지 眞實일까? 眞實이 아닌 事實로 構成된 世上이다. 生命을 하나의 틀로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몰이성적인 전체주의적 사고이다.

 

불교는 말을 떠나야 하기에 言語에 대한 理解와 맞닿아 있다. 소쉬르는 “모든 것은 하나로 이해될 수 없다”고 했다. 불교도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소쉬르는 言語의 要素를 랑그와 파롤로 區分했다. 파롤은 상황 속에서 각 개인이 실제로 말하거나 문장으로 쓰는 具體的 말이다. 랑그는 파롤의 背後에 존재하며 파롤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文法 規則과 共通槪念을 뜻한다. 파롤은 개인화된 관점이지만, 랑그는 그 아래의 공통된 구조이다.

 

소쉬르는 파롤을 언어학 연구대상에서 제외했다. 랑그만을 연구 대상으로 했다. 파롤은 지나치게 개별적이고 규칙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宗敎는 毒화살과 같아

불교에서는 삶의 主人됨을 强調한다. 지금 바로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現場을 강조하는 불교는 個體化된 生命을 말하고, 그들의 삶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言語와 實際에 있다는 共通된 意識을 解體했다. 불교는 構造主義的인 出發點은 갖고 있지만 結局 그 構造를 解體시킨다. 그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접근과 밀접하다.

 

불교는 經典을 떠나 思惟 속으로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강하게 말한다면 如是我聞으로 始作되는 모든 經典은 뻥이다. 經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다.

이런 觀點에서 본다면 宗敎는 毒화살과 같다. 비유컨대 삶이 죽음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은 좋아하지만 왜 죽음은 싫어하는지 알아?” 죽음이 답했다. “너는 달콤한 것이지만 나는 直面하기 괴로운 眞實이기 때문이지.”

 

宗敎는 모두 뻥이다.

가르침과 宗敎의 形態는 區分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체제 안에 담긴 儀禮 儀式 등 裝置에 눈을 뺏기고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불교 안의 불교를 봐야한다.

불교 안에 있는 부처님의 뜻을 찾아야한다. 불교가 경전에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法華經> 비유처럼 불난 집에 아이들이 있는데, 불났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온다. 아이들을 나오게 하는 장난감과 같은 것이 佛敎이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게 佛敎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世上은 뻥이고 눈속임이다. 世上의 모든 形相과 價値 制度 文化 등은 一時的 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世上이 바로 삶의 現場이다.

 

세상의 불교는 경전을 들고 있는 승려의 몫이다. 불교가 곧 승려의 몫일지도 모르지만 經典의 가르침은 사부대중의 몫이다. 승려들은 사교입선까지만 말하지만 尋牛圖가 뜻하듯 사선입속까지 와야 한다.

 

사랑을 본보기로 들어본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사랑‧쾌락으로 포장된 生殖을 위한 熱情에 지나지 않는다. 20대는 생식활동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려면 눈속임의 熱情이 사라져야 한다. 世上은 다양한 虛像으로 이뤄져 있다. 이 世上에는 속고 사는 者,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者,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者가 있다. 이 가운데 제일 찌질한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바로 修行者들이다.

부처님 말씀은 별 것 없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것이다.

 

如是我聞의 佛敎는 거짓

불교가 뭐냐고 할 때, 경전이 어떻고 한다. 불교란 경전마다 나오는 “여시아문”과 <능가경>의 “49년 동안 한자도 말하지 않았다”로 대비된다. 들었다는 사람은 있는데, 말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벽암록> 등에 많은 公案이 있지만 이것 하나만 生覺해도 된다. 나는 들었다는데 왜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事實과 眞實을 들여다보고 如實한 觀點을 가지라는 것이 佛敎이다. 緣起的 實相, 三法印 그것을 위한 八正道가 있지만, 우리가 接하는 佛敎는 如是我聞이다.

 

성철 스님의 涅槃頌을 본보기로 든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恨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요즘 큰스님들의 열반송은 적당히 베낀 것 많다. 성철 스님만큼은 열반송을 직접 쓴 것 같다. 수많은 說法, 正法이라는 말하는 것도 實은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內容이다. 붉은 빛과 푸른 산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의 世界를 노래한 것이다. 불교를 경전으로 이해하고, 경전을 소유한 승려들의 것으로 여긴다면, 수많은 죄업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바람이 없는데 波濤가 일어

<선문염송> ‘운문끽구자’에는 “부처님이 태어날 때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했다. 내가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아이를 몽둥이로 때려잡아 개밥으로나 던져주고 世上을 태평케 했겠다”라고 한다. 운문의 이 말은 부처님 뜻을 잘 理解한 것이다. 달을 가리킨 손가락, 거짓을 꿰뚫어 강조한 것이다.

 

<선가귀감>에도 無風起浪이라고 했다. 바람이 없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불교(종교)는 개밥으로나 던져줘야 할 것이다.

 

<유마경>에서 유마는 침묵했고,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不識은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단순히 안다와 모른다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달마의 ‘알지 못한다’는 안다와 모른다는 認識의 世界를 벗어난 答이다. “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고 해서 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對相이 오직 認識이라고 했다.

    

 

종교로서의 佛敎는 개밥

불교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宗敎로서 佛敎를 말한다면 스스로 개밥을 먹는 것과 같다.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 ‘狗者無佛性’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은근히 개와 연관이 많이 된다.

 

唯識에서는 우리 마음은 8가지 作用이 있다고 했다. 眼耳鼻舌身意 6識과 第7말나識, 第8아뢰야識이 있다. 우리의 自性은 妄想으로 이뤄진 遍計所執性(妄有)과 因緣이 만나 일어나는 依他起性(假有)과 眞如인 佛性자리를 뜻하는 圓成實性(實有)으로 구분했다.

 

“마음은 虛空에 그림을 그리는 그림쟁이와 같다. 世上에 못 그릴 것도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 임진왜란이 있었다는 한마디로 끝난다. 그 아픔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집중하는 것이 중요

<금강경> 에드워드 콘즈의 영역본 가운데 “…mindfully fixing his attention in front of him.”이라는 구절이 있다. 부처님이 앉고서 그의 눈 앞에 마음을 다해서 주의력을  集中했다는 구절인데 韓國의 <금강경>에는 빠져 있다. 이는 앞서 서술된 탁발했던 행위에 집중했다는 것이고, 지금 여기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部分이 우리에게 事實과 眞實의 틈새를 바라보는 것을 알려주고, 개밥과 진짜 밥을 區分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항상 무엇을 하건, 사람들에게 왜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自己 삶에 每 瞬間 集中하는 것이 自身의 삶에 能動的인 主人이 되는 것이다.

 

알면서 속아주는 여유

불교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자 미망일 뿐이다. 그것은 오직 당신을 속이기 위한 미사여구의 속삭임이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여유는 당신의 몫이다. 왜? 平和롭고 充滿한 삶을 위해서.

 

주금강이라 불리는 덕산 선사가 떡 파는 노파를 만나면서 어느 마음에 점심을 찍겠느냐고 했다. 덕산이 답을 못해서 떡을 먹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떡을 얻어먹을 수 있겠나? 답은 2주 후에 설명하겠다.

 

승려들이 우리에게 빨대를 꼽고 돈 벌기 위한 수단에 속아서는 안 된다. 속아서 財産도 주고, 女子들은 몸도 상한다. 깨어있어야 속지 않는다. 小乘에서는 속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大乘에 와서는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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