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법칙 제 5화 : 깨달음 : 자기로부터의 혁명(革命

장백산-1 2015. 9. 28. 15:24

 

마음의 법칙 - 제 5화 : 깨달음 : 자기로부터의 혁명(革命) 
 

선  심 (禪心)  大圓禪師
누리 삼킨 참 나를 낙화(落花)로 자각(自覺)
떨어지는 물소리로 웃고 가는 길
돌에서도 꽃에서도 님이 맞는다.  


인도의 성자 크리쉬나무르티가 쓴 책 중에서 "자기(自己)로부터의 혁명(革命)"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훌륭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世上은,  인간의 道德은 땅에

떨어지고  黃金이 萬能이 되고 個個人은 自身의 참 모습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말법(末法)의

時代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苦痛과 암울한 현세(現世)의 原因은 바로 自己自身의 根本을 忘覺하고

사는 중생의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世上을 淨化하고 個人의 尊嚴性을 回復하여

이 땅을 佛國土,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만들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自己로부터의 革命'이 이루어질 때 이 世上을 樂園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을 어떻게 몰아내겠습니까?

 

불로 태워서도 안돼고 태풍으로도 어둠은 몰아낼 수 없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려도 어둠은 꼼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黃金, 돈을 山처럼 쌓아서 주면 어둠이 사라질까요?
어떤 방법을 써도  어둠을 단 한발짝도 몰아낼 수 없습니다.
世上의 어둠은 오로지 '밝은 빛'으로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 젖어있는 無知의 어둠은 어떻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의 지혜(智慧)가 아니면 중생의無知의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로 깨달음의 智慧를 밝히는 일은 사람으로 태어난 自己自身이 이뤄내야 할

사명(使命)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밝은 智慧로 이 世上과 自己自身의 삶의  目的을  完成하는 것이

곧 '자기로부터의 혁명'입니다. 성불(成佛)은  원래부터 이미 완벽한 자기존재,

완전하게 완성된 자기자신을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망념지장엄장해탈문(不忘念知莊嚴藏解脫門)은 人間이 오를 수 있는 最高의 境地라 하는데

이 境地가 바로 本來 이미 가장 完璧하고 完成된 자기자신의 경지요 곧 成佛의 경지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完成한다는 이 모순된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명칭은  애시당초부터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이니 成佛이니 하는 말도 있을 수 없는 잠꼬대가 아니겠습니까?
本來부터 이미 모든 存在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比盧遮那佛)일 뿐인데 말입니다.
모든 存在는 한 띠끌의  業에도  물들지 않은 太陽과 같이 밝고, 
虛空과 같이 無限하고, 바람과 같이 自由自在로운 存在입니다.
그래서 太初에 물듦이 없는  모든 존재의 이 자성(自性)은 永遠한 生命이고,

최고의 幸福이며, 끊임없이 끝이 없는 즐거움(極樂)을 누리며 사는 存在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과 여러분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요. 

생명이 안전합니까?  늘 행복합니까? 즐거움은 계속될 수 있을까요? 
現實, 삶은 녹녹치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意志와는 無關하게 生命은 병마(病魔)의 苦痛에 신음하고,
幸福을 담보하기 위한 生命保險을 들어도 여전히 安心할 수 없습니다.
즐겁다는 것 또한  影畵 속 얘기같아서 내일은 期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의 사람들은 어쩌다 이렇게 不安하고 초조한 삶을 사는 것일까요?
오늘의 主題는 '깨달음 : 自己로부터의  革命' 입니다.
自己로부터의 革命을 이루는 길을 부처님은 3,000년 前에 提示해 주셨습니다.
皇帝의 자리가 보장된 王子의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처자의 따뜻한 품도 버렸습니다. 王宮의 饗樂과 財物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홀홀 單身 苦行의 숲으로 들어 갔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하기 어려운 무서운  決團을 하신 理由가 무엇일까요?
存在의 根源에 對한 철저한 자기성찰(自己省察)이 있었기에 可能한 일입니다.
그 결단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苦痛이 本來 있을 수 없는
꿈속의 허깨비와 같은 것임을 自覺했기 때문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을 다 抛棄하고
다 버릴지라도 '참나'를 깨닫는 이 使命과 맞바꿀 만큼의 價値있는 일이 없다는 
絶對의 確信을 實行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당장 산속으로 들어가란 얘기는 아닙니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서 있는 그곳을 極樂으로

누리며 살라는 " 무혈(無血)의 혁명(革命)" 卽, 自己로부터의 革命을 宣言한 것입니다.
꿈속에서 허깨비놀음을 하고 살면서 그것이 꿈속 일임을 모르고 사는 世上  사람들에게,
꿈에서 깨어나라는 演劇을 이 사바세계에서 한 번 펼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八萬四千의 法門과  연기법(緣起法)과  팔정도(八正道)를 說하셔서 
本來부터 이미 神聖한 自性을  사람들이 回復할 수 있도록 길을  提示해 주셨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과 成佛은, 모든 存在의 尊嚴性을 선포하고 
존엄한 존재의 회복을 외치는 活火山같은 외침입니다. 佛敎는 이러한 깨달음으로

本來부터 이미 完璧하고 完成되어 있는 自己自身을 確認하라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길에는 여러 가지 方法이 있지만 중국, 한국의 불교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참선화두법 (參禪話頭法)'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淸淨한 自性의 實다움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보통 '견성(見性)'이라고 부릅니다.
見性은, 根本을 여읜 마음이 本來 淸淨한 그 마음의 실상(實相 : 실다움)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本來 淸淨한 自身의 性稟을 分明하게 깨닫고나서 햇볕에 봄눈 녹이 듯, 
數億劫의 업장(業障)을 消滅하는 것을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보림수행과정을 거치면서 마지막 한 티끌의 業이 다 없어져서 
오로지 存在의 淸淨한  智慧光明이 찬란히 빛나는  境地를 '성불(成佛)'이라고 말합니다.
成佛의 境地는 過去 現在 未來라는  時間과 空間의 制約이 없습니다.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즉 아홉 세상 열 세상이 '하나'인 道理는 성불지(成佛地)에서 누리는 境地를 말합니다.
成佛地 거기에는 안과 밖이란 境界가 서지 못합니다.

 

이렇게 안과 밖이 없는 成佛地의 境地에서 서로 마주보고, 對話하고 行動하는데는
서로서로가 아무 걸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能力을 뜻과 같이 다 쓸 수 있습니다.
손오공의 여의주(如意珠)는 분명한 부처의 능력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묘유(妙有)의 世界'라 하고, 그래서 不忘念地莊嚴藏解脫門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발 앞에 정말 不可思議한 일이 瞬間瞬間 每日每日 쉼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만 그런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韓國의 大乘佛敎에서는 主로 참선(參禪)을 통해서 깨닫는 공부를 합니다.
선(禪)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무엇이 선(禪)입니까?
自己存在의 根源을 깨달아서, 卽 見性하여 부처의 삶을 누리며 사는 境地가 禪입니다.
그러니 참선(參禪)은, 중생의 세상으로 떨어진 자성(自性)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修行을 말합니다. 
 

 

參禪은 本來부터 이미 完璧하게 完成된 自己自身(本來成佛)을 確認하기 위한 깨달음의 過程입니다.
窮極의 目標는 깨달아 부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선을 통한 견성법을 공부할 때는 반드시 스승

으로부터 화두(話頭)를 받아서 참구합니다.
 

 

話頭란 깨달음을 이루고자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暗號와 같은 것입니다.
군대의 암호(화랑하면 담배로 대답하듯)는 같은 편임을 확인하는 信號이자 約束입니다.
서로  그 뜻을 알고 있다면 마음으로 이미 通했다는 것이지요.
話頭는  言語나 文字를 通해서 傳해지지만  언어나 문자를 超越한  말입니다. 마치 달을 보여줄 때 

손가락 끝을 떠나야만 달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話頭란 간절히 의심(疑心)하는  마음입니다. 마음(心)을 간절하게 疑心하라는 것입니다.

 

참나를 깨닫는데 스스로 내 마음을 간절히 의심(疑心)하라니 異常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疑心하라는 것일까요?
나는 무엇인가? 生老病死라는 苦痛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結局 어디로 가는가? "
이렇게 알 수 없는  存在의 根源을 疑心하는 것이 바로 話頭參究입니다.
무턱대고 이걸까 저걸까 分別하는 수수께끼 놀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주(趙州)선사에게 한 스님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주선사는  " 무(無)!"라고 대답했습니다.
개에게도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한 마디로 개에게는 마음(心/佛性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분명 "유정무정(有情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무릇 生命있는 것 뿐만 아니라 초목와석(草木瓦石)도 다 마음이 있다 ' 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조주선사는 佛法을 아주 잘못 말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않습니까?
하지만 조주선사가 잘못 말했을리가 없지요. (조주선사는 과거 사라수왕불의 後身입니다)
"無"라고 말함으로써  묻는 그 스님에게 커다란 疑心덩어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했던

스님은  "無!"라고 한 그 말이 가슴의 못이 되어서 "왜 佛性이 없다."고 했을까 하는 疑心을
자나깨나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조주선사가  "無!"라고 한 의중(意中)은 무엇일까요? 
그 뜻은 묻는 스님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달을 보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이제 그 스님의 몫입니다. 禪師가 툭 던진 말을  듣고 그 말이나

문자에만  매여 떨어져서 無를 生覺하고 헤아리면 헛수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禪師의 意中이 무엇인가를 깊게 窮究해서, 알 수 없는 疑心으로 꽉 찰 때

밥 먹을 때나 걷고 일할 때나 쉴 때나 하루 24時間 오직 "無?"라는 한 生覺만이 全部가 되어버립니다.
그  疑心덩어리가 太山만해지고 숨 쉴수 조차 없는 답답한 막다른 골목에 이르르면,
이제 疑心하는 그놈도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텅~빈 虛空처럼 疑心했던 마음만 덩그라니 남습니다.

虛空은 스스로의 앎이 없지만 疑心하는 그 놈이 바로 참나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스승이 "無!"라고 한 그 뜻이 確然히 드러나면 話頭는 打破됩니다. 
이러한 화두타파를 바로 '견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수행자들은 스승에게서 화두를 한 번 받으면 10년, 20년씩 참구하면서
그 화두가 타파되어 견성에 이르도록 퇴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방법이 전통적인 화두참선법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現代人들에게도  이러한  傳統的인 화두참구법이 效果가 있을까요?
화두 하나를 들고 10년, 20년씩  참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세대는 그렇게 忍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화두를 주면 자살(?)할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의 하루하루는 精神없이 빨리 돌아갑니다.
온갖 情報와 知識이 넘쳐나는 첨단의 時代여서 보고 듣는 洪水에 휩쓸려 삽니다.
땡감이 홍시가 될 때를 기다리기 보다는  금방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안에 홍시를 만들어 먹는

習慣에 길들어져 있어서 화두 하나만 붙들고 10년을 버틸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랜 時間을 忍耐할 사람들의 근기(根機)가 不足합니다.

 

그래서 강물에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流浪하는 修行者가 많은 時代입니다. 
오늘날, 훨씬 많은 수행자가 화두참선을 한다고 하지만 견성도인(見性道人)이 나오지 않는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의 理由는 바른 가르침을 줄 눈밝은 선지식(善知識)이 많지 않습니다.

 

화두는 어디를 向해서 참구해야 할까요?
화두참구의 원리는  경계에 물든 마음을 逆으로 거슬어 올라 境界를 여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밖의 어떤 對上을 向해서 화두를 참구한다면 그것은 始作부터 틀린 것입니다.
'疑心하는 그 마음을 눈밖에 1미터 앞에다 두고 참구하라'  (모 선사의 지도법)는 것은 
온갖 境界위에서 참나를 찾으라는 것이어서 깨닫기가 요원합니다.
화두는 內面을 돌이켜서 보는 놈을 보고  듣는 놈을 보는 내관수행(內觀修行)이 되어야만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참구가 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는  바른 眼目을 가진 스승의 지도를
반듯이 받아야 합니다. 
 

 

제자의 상태를 거울 속 들여다 보듯 볼줄 아는 스승이 볼 때, 제자가 지금  하늘 땅이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바로 그 경지를 짚어주면  화두는 열리는 것입니다. 內面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절정

의 길목에서 스승이  "바로 이것이 本來 너의 상주불멸(常住不滅)한  마음이다." 라고 바로 짚어 준다면,
화두는 스승의 지도와 나의 노력으로 해결 되는 것입니다.

 

이 山僧이 精進하고 있는 국제정맥선원(國際正脈禪院)은, 바로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 한 뜻으로

하는 화두참구법으로 견성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원선사(大圓禪師)의 독창적인 화두지도법으로

 200여명이 넘는 수행자가 참나의 경지를 體得하고 보림정진(保任精進)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21세기 최첨단의 견성법입니다. (최첨단을 좋아하는 수행자들이 많기에)

 

自己로부터의 革命은 가장 위대한 無血의 革命입니다.
총칼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이 地球를 樂園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깨달음의 길에 모든 사람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存在의 本質을 깨닫는 것이 永遠한 幸福의 열쇠를 쥐는 지름길입니다.
그 첫걸음을  여러분이 시작하십시요.

 

혜원합장. 동국대 선학과 교수/혜원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