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識 - 中, ‘識’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思考能力 가져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
植物들 또한 여러 가지 識을 갖는다는 事實은 植物의 ‘認識能力’이나 ‘判斷能力’에 대해, 結局 ‘思考能力’에
대해 쉽게 부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動物적인 기원 속에서 生覺하는 能力이란 判斷하는 能力에서 起因하는
것이고, 判斷한다는 能力은 무엇보다 對相을 受容하는 눈이나 귀, 코 등의 識에 對해 적절한 反應의 方式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植物뿐일까? 아메바나 박테리아 같은 이른바 ‘원생생물’ 또한 나름의 識을 갖고 있으
며 認識能力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게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自己
나름의 識, 認識能力을 갖고 있는 것이다.
感覺器管이 없는 動物 植物도 人間보다 뛰어난 認識能力 갖춰
思考能力은 다양한 識들이 綜合되는 過程이라는 점에서
意識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아
認識이나 知識을 다룰 때, 西洋哲學은 모두 人間의 認識을 다루었고, 이는 意識을 中心으로 統合된 하나의
‘精神’이나 ‘靈魂’이 갖는 思惟能力을 다루는 것을 뜻했다. 눈과 귀 등의 感覺器管을 通한 知覺은 그러한
認識의 一部를 이루는 것으로만 다루어졌다. 意識을 特權化하는 이런 生覺은 主로 그것을 通해 認識하고
思惟하는 特定 動物(人間!)을 特權的 잣대로 삼는 것이다. 이는 意識的인 思考能力의 有無나 程度에 따라
生命體들 사이에 優劣과 高低의 位階를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認識’이란 槪念은 ‘人間中心主義’의 또
다른 共謀者였던 셈이다.
識의 槪念은 6根 各各의 認識能力이나 그것이 얻은 識의 獨者性을 思惟할 수 있게 함으로써, 人間中心主義
를 벗어나서 認識의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 나아가 人間 아닌 生命體의 ‘認識能力’이나 그것으로 얻
은 ‘識’에 대해 思惟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흔히 말하는 6識은 可能한 識의 種類 全切가 아니다. 人間이 갖
고 있기에 人間이 알 수 있는 種類의 識들일 뿐이다. 六識과 다른 種類의 識이 있을 수 있음을 누가 否定할
수 있을까? 6識 안에서도 그렇다. 가령 눈으로 얻는 眼識에 人間이 아는 것과 다른 種類의 眼識이 있을 수
있음을 思惟할 수 있다.
人間의 눈이 知覺할 수 있는 빛이란 400나노미터~700나노미터의 波長을 갖는 可視光線뿐이다. 이는 人間
이 갖고 있는 光受容體가 갖는 受容 範圍에 起因한다. 反面 방울뱀이나 보아뱀은 이보다 더 긴 波長을 갖는
赤外線을 볼 수 있고, 개미나 박쥐, 벌, 새 등은 400나노미터보다 더 짧은 波長의 빛인 紫外線을 볼 수 있다.
紫外線을 보는 벌이나 새의 눈에 비친 제비꽃은 人間 눈에 비친 것과 같은 ‘識’일까? 그럴 리 없다. 빨간색을
知覺하는 光受容體가 없는 눈에 비친 장미꽃이 그걸 갖고 있는 눈에 비친 장미꽃과 같을 리 없듯이. 人間의
눈에는 보잘 것 없고 소박하거나 초라하게 보이는 암컷 새들이 그 종의 수컷 새들에게는 매우 다르게 보일
거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필경 매우 매력적인 모습일 것이 틀림없다. 같은 새라고 하지만,
같은 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眼識이라 하지만 아주 다른 眼識들이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흔히 分別하듯이, 이 眼識들에 대해 누가 더 좋은 眼識을 가졌는지를 굳이 區別해 본다면 어떨까?
當然히 人間보다 더 넓은 범위의 빛을 포착하는 動物의 眼識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개의 光
受容體를 갖는 人間에 비해, 애기장대 풀처럼 11개의 光受容體를 갖는 植物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애기장대 풀이 人間보다 더 좋은 認識能歷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대개는 同意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좋은 眼識이 있음이 좋은 認識能力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고 하긴 어려우니까. 그렇다면 人間들이 흔히
말하듯, 좋은 ‘意識’을 갖고 있음이 좋은 認識能力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까?
탁월한 視覺的 感覺(眼識)을 가진 화가와 탁월한 계산능력을 가진 상인, 혹은 탁월한 논리적 추론능력을 가진
철학자 중 누가 더 탁월한 사고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열과 위계를 매기려 한다면, 바보짓이
될 것이다. 다른 사고능력들을 가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11개의 광수용체로 얻는 탁월한 안식을 가진 식물과
거기서 많이 딸리지만 의식이 발달한 인간 중 누가 더 우월한 인식능력을 가졌는가를 따지는 것도 바보짓이라
고 해야 한다. 인식능력이라 하든, 사고능력이라 하든, 능력의 우월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능력의 다양성
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思考能力은 特定한 하나의 識이 아니라 6識, 아니 그 以下의 다양한 識들이 모여 綜合되는 過程이다. 精神이
思考 能力을 지칭한다면, 이는 다양한 識들이 綜合되는 양상에 따라 다양한 ‘精神’이 존재할 수 있음을 함축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보면, 동물은 물론 식물에게도 ‘精神’이 없다고 할 수 없다. 植物뿐 아니라 識을
갖는 모든 것은 나름의 ‘精神’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靈魂을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정도의
차이’라는 말을 바꾸어 “모든 존재자는 양상의 차이는 있지만 靈魂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
다. 識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양상의 差異는 있지만 精神을 갖고 있는 것이다. 細胞的 認識能力에 대한 연
구들은, 당시에는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았던 이런 생각이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意識을 特權化하지 않는 ‘識’의 槪念은 존재자들의 平等性을 含蓄하는 이런 發想과 親緣性을 갖는다.
그런데 精神의 손에서 벗어난 識의 槪念이 細胞들의 層位에서 멈출 이유는 없다. 지금의 과학은 最少한
識의 槪念을 分子的 水準으로까지 밀고 가는 것을 可能하게 해주는 것 같다. 가령 遺傳子들이 傳寫되고
그것으로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이 그렇다. 細胞의 核 안에 있는 수많은 遺傳子들, 그것은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우라실(U), 시토신(C)이라는 네 개의 核酸分子들의 ‘認識能力’에 의해 作動한다.
아데닌은 구아닌과 다른 것을 ‘알아보고’ 구아닌과만 結合한다. 티민/우라실은 시토신과만 結合한다.
이로 인해 DNA의 核酸들은 RNA로 전사된다. RNA에 전사된 유전자들은 세 개씩 짝을 지어 하나의
코돈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코돈들은 자신과 對應되는 아미노산을 ‘알아본다’. 가령 ACU는 트레오닌,
AAU는 아스파라긴, AGU는 세린이란 아미노산을 알아보고 짝을 맞춘다. 그렇게 모인 아미노산들이
모여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이처럼 짝이나 상대를 알아보고 결합하는 이런 能力 또한 ‘識’의 一種이
아닐까? 分子적인 ‘認識能力’이 아닐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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