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 자리에서 해탈하는 법
불교에선 깨달음의 성취를 해탈삼문(解脫三門)의 성취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해탈삼문이란 깨달음 즉, 해탈(자유) 열반(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는 공해탈문(空解脫門)으로 一切 즉, 온 세상이 텅~비어서 空하다고 이 세상을 觀하는 겁니다.
둘째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으로 一切 즉, 온 세상이 差別되고 分別된 상대적인 모양이 없다고
이 세상을 觀하는 겁니다.
셋째는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 또는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으로 이 세상에는 구할 것이 一切 없
다고 이 세상을 觀하는 겁니다. 해탈삼문은 우리가 우리의 참된 本性, 우리의 本質, 우리의 根源을
깨닫고 나면 저절로 생기는 眼目이자 能力입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의 本質, 참모습, 實相을 제
대로 깨치고 나면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단지 꿈, 허깨비, 신기루 ,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고 허공과도 같다는 사실이 自覺이 됩니다.
또한 이 虛空이 그저 아무것도 없는 虛無한 虛空 , 그야말로 텅~빈 자체가 아니라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一切가 오직 하나의 일로서 相對가 없다는 事實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虛空 같
기에, 그것이라고 할 게 없기에 굳이 마음을 내어 무언가를 얻거나 바라고 구하는 分別하는 마음이 사라
집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어떤 것도 實體가 없지만 一切가 오직 하나의 일로서 본래부터이미 完全하
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허공 같기에 이미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으니 本來부터 解脫(자유)
이고 本來부터 이미 涅槃(행복)입니다. 본래부터 이미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一切가 그것이라고 말 할 것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텅~비어 고요한 寂滅입니다. 이미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一切가 본래부터 이미 오직
하나의 마음(一心)에서 온갖 꿈 같은 演技로 펼쳐지니 그저 생생하고 생생할 뿐입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一切가 本來부터 이랬습니다. 다만, 인간들의 분별하는 생각 마음 스스로가 이런 事實을 自覺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월 동안 自己自身도 모르게 本來 實體가 없이 텅~빈 空한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에 虛妄하게 執着하고 사로잡혀온 分別하는 意識, 分別心과 그 分別된 허망한 生覺
妄想 幻想에 대한 愛憎, 執着 때문에 스스로의 깊은 내면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던 것 뿐입니다.
지금 가만히 스스로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분별하는 한 生覺이 일어나면 이 세상 온갖
것들이 分別되고 認識되어 펼쳐져서 나타나 보이는 듯 하지만 이 세상을 분별하는 한 生覺이 없을 때
는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난 적이 없는 겁니다. 이 세상을 분별하는 한 生覺이 없다는 일도 없
는 것입니다. 매 순간순간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習慣化되고 自動化된 이 세상을 분별하는 生覺에 속
고, 그 生覺 따라 일어난 感情에 속고, 感情 따라 일어난 執着하는 분별하는 마음에 속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을 시비 분별 비교 해석 판단하는 生覺 즉, 分別意識 分別心은 本來부터 實體가 없는 끊임없이
波動하는 에너지정보체 즉, 파동하는 意識體, 思念體일 뿐입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의 始作은 모든 것을 분별하는 이 한 生覺에서 출발합니다. 因緣을 따라서 일어나는
無意識的 分別心, 微細한 分別心에 순식간에 執着하고 사로잡히는 삶이 虛妄한 妄想 煩惱 生覺에 시달리
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사는 삶의 모습이고,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고정불
변하는 어떤 실체도 없는 파동하는 生覺 에너지에 불과할 뿐임을 뚜렷이 自覺하는 것이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사실마저도 탁 놓아버린 사람의 意識의 境界, 無境界입니다.
이 세상을 분별하는 生覺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관계없이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變化도 없
습니다. 이 세상을 분별하는 生覺이 일어난 것도 그냥 生覺일 뿐이요, 분별하는 生覺이 일어나지 않는 것
도 本來부터 아무 일도 없던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 뿐이니 아무 일도 없는 것입니다. 깨달았든 깨닫지 못
했든 本來부터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았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고 깨닫지 못했다고 자책할 필요
도 없는 겁니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은 本來부터 아무것도 없는 일입니다. 다만 지금 여기 이 순간텅~빈
바탕 공간 이 자리에서 홀연히 문뜩 일어난 實體가 없는 虛妄한 분별하는 生覺 煩惱 想念 妄想에 사로잡
히지만 않으면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은 그냥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如如할 뿐 그럴 뿐입니다. 實體가
없이 분별하는 虛妄한 이 온갖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잡념이 일어나는 根源은 생각으로 헤아려서알 수도 없
고, 말로도 설명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자리이지만 不生不滅, 常住不滅,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자리로
이렇게 우리 눈앞에 늘 如如합니다.
불생불멸의 영원한 이 자리는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고, 생각에 사로잡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들 스스로가 눈이 멀어서 분별하는 한 생각을 따라서 생겨난 그림자 헛허깨비 신기루에
불과할 뿐인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에 執着해서 스스로 휘둘림을 당하면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하고 헛된 짓입니까. 영원한 불생불멸의 이 자리, 영원한 생명
자리 여기에서는 三解脫門도 聖賢들이 마지못해 方便의 말로 베푼 친절일뿐 이 자리는 별도로 따로
어디에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좋은 因緣과 나쁜 因緣이 서로서로 다르지 않을 뿐입니다.
유마경에 惡魔 파순이가 天女를 데리고 내려와 유마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실패하자 다시
天女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깨달음의 마음을 낸 天女들은 惡魔를 따라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자 惡魔가 유마에게 보살의 마음으로 天女들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합니다.
유마는 天女들을 五欲(食欲, 性欲, 수면欲, 財物欲, 名譽欲)의 象徵인 惡魔에게 돌려 주었을까요?
아니면 돌려주지 않고 淸淨한 法의 世界(淸淨法界, 法身佛의 자리, 진리의 세계)에 머물도록 하였
을까요?
유마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天女들을 다시 五欲의 상징인 惡魔 파순에게 돌려줍니다. 왜냐하면 本來부
터 천녀도 惡魔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五欲이란 것도 분별하는 한 生覺이 일으킨 欲望일 뿐입니다.
분별하는 한 生覺이 일으킨 다섯가지 이 欲望도 본래부터 實體가 없는 波動하는 에너지정보체, 思念體
意識體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五欲이 따로 없으니 본래부터 淸淨한 法界 즉, 진리의 세
계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즉 惡魔가 그대로 惡魔가 아니고 유마가 그대로 유마가 아닙니다. 악마가 유마
이고 유마가 악마입니다. 천녀 또한 천녀가 아니고 천녀가 또한 악마와 유마와 다르지 않습니다. 本來부
터 살아온 자리, 옮겨갈 자리가 따로 없는 淸淨한 法界 그 자리에는 본래부터 아무 일도 없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잡념이라는 分別하는 마음 의식에 依해서 分別되고 差別되어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環境 즉, 꿈, 허깨비, 신기루, 아지랭이, 물거품, 그림자와 같은 이 세상 이 모든 것
들 속에서 홀려 속아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부자로, 어떤 이는 가난뱅이로, 어떤 사람은 장사꾼으로, 어
떤 이는 지도자로, 어떤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백수로, 어떤 이는 가정주부로, 어떤 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가장이라는 연극배우로써 各者의 演技를 펼치며 연극이라는 삶을 삽니다. 연극배우로써 演技를 펼
치면서 살아가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解脫하고 涅槃하는 겁니다. 그 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공간 이 자리가 本來부터 아무 일이 없는 如如한 자리임을 如實하게 깨달을 뿐입니다.
해탈(자유)과 열반(행복)은 천녀들을 악마의 손에도 유마의 손에도 넘기는 공부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어떤 時間과 空間의 變移없이 해탈하고 열반에 드는 것이 이 妙한 法,
淸淨한 法界의 理致입니다.
- 릴라님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혁명당사건으로 20년 만에 가석방된 신영복씨 (0) | 2016.01.17 |
---|---|
인생이란..! (0) | 2016.01.17 |
[스크랩] "지식보다 생각 높이려 안간힘" 신영복 마지막 인터뷰 (0) | 2016.01.16 |
‘석과불식( 碩果不食)’ (0) | 2016.01.16 |
석과불식’(碩果不食) (0) | 2016.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