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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는 닦아서 얻는 對相이 아니다

장백산-1 2016. 1. 31. 22:46

 

 

道는 닦아서 얻는 對相이 아니다

2016년 01월 26일 (화) 13:55:43법상 스님 beopbo

마조도일 스님은 ‘도(道)는 어떻게 닦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한 스님의 질문에 “道는 닦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道라면 그 道는 언젠가는 다시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런 道는은 성문(聲聞)의 道일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道를 닦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냥 凡夫일 뿐”이다 라고 답변하고 있다.

삼천배 잘하고 못하는게  깨달음에 조건 될 순 없어
분별과 차별서 벗어나면 그 자리가 깨달음, 道의 자리


 道를 닦는다는 의미는 곧 修行을 말한다. 아마도 佛子들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修行을 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3000배, 1만배 절 修行을 하거나, ‘금강경’ 7독씩 매일 독송을 하고, 대비주를 100독 이상 독송하는 등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修行은 이처럼 끊임없이 고통스럽고 혹독한 修行을 意味했다.

그러다보니 많은 修行者들이 좌절감을 맛본다. 修行을 잘하는 사람 앞에 서면 위축되기도 하고, 修行을 못하고 根機가 낮은 自身을 탓하기도 하면서 相對와의 比較 속에서 劣等感을 느끼기도 한다. 修行을 하는 理由는 他人들과의 比較나 差別을 여의어서 幸福해지기 위해서인데, 오히려 修行 때문에 괴로워지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佛子님들은 자신이 3000배 절을 몇 번 해보았고, 화두 수행을 몇 년 동안 했으며, 어떤 삼매를 맛보았다는 등의 자기 과시적인 수행 이야기를 드러내곤 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修行이란 이런 것과는 아무런 相關이 없다. 修行을 하면서 남들보다 더 잘한다거나 더 못한다는 生覺이 든다면 이것은 나와 타인의 修行을 比較해서 잘하고 못하고의 兩邊에 치우친 極端이며 妄想 分別 生覺일 뿐 참된 中道, 無我, 共, 緣起가 아니다. 道가 만약 닦아서 얻을 수

있는 物件이라면 道를 더 잘 닦는 사람과 잘못 닦는 사람 사이에 比較와 差別이 생겨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道는 닦을 수 있는 物件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잘 닦고 못닦는 比較와 差別이 있을 수가 없다. 修行은 무슨 운동이나 시험 같이 경쟁하는 對相이 아니어서, 더 열심히 노력한다고 빨리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 道라면 그 道는 닦는다는 作爲的인 努力을 통해서 없는 道을 얻어 가진 産物이므로 반드시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道는 人間의 人爲的인努力을 통해 얻을 수 있는 物件이 아니다. 道는 인간의 작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어떤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을 해서 얻어가질 수 있는 어떤 物件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道, 眞理, 참나, 본성(본래성품), 부처, 선, 법, 도, 본래면목, 불성, 진아, 진심, 진성, 무위진인, 본래의 나, 근원의 나, 본래마음은 저멀리 어디에 꼭꼭 숨겨져 있는 事物이 아니다. 감춰져 있는 도, 진리, 참나라면 그것을 찾아내면 될 것이고, 없던 도, 진리, 차마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그것을 만들어내야 하겠지만, 도, 진리, 참나는 모든 곳에 어느 때나 이미 完全하게 환히 다 드러나 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드러나 있는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우주만물, 우리들의 있는 이대로가 現實, 삶, 人生 곧, 眞理, 도, 참나, 본래의 나, 眞實, 참모습이다. 이를 일컬어서 마조 스님은 ‘입처즉진(立處卽眞)’, 임제 스님은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고 이름하여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우주만물,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바로 眞理, 도, 참나, 본성이라고 설했다.

마조 스님은 “어떻게 道를 깨달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自性은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完全하다…, 다만 이 世上 이 모든 것들을 相對로 善이니 惡이니 하는 등의 分別하는 生覺 마음에 가로막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를 修道人이라 할 수 있다”고 답변하고 있다.

道, 眞理, 참나는 없었던 道, 眞理, 참나를 인위적인 노력을 해서 새롭게 얻어 가질 수 있는 物件이 아니라, 다만 언제나 영원히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의 세상 이 모든 것들 卽, 지금 여기 이렇게 이미 本來 있는 그대로 完全하게 具足되어 있는 眞理, 道, 참나를 다만 確認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선이니 악이니 하고 둘로 나누어 分別하고 差別하는 허망된 生覺 妄想 煩惱라는 分別心, 分別意識 때문에 바로 눈앞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道, 진리, 참나,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우주만물 즉, 진리, 도, 참나,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를 相對로 虛妄된 生覺 煩惱 雜念 想念 妄想 分別心 分別意識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인 道, 眞理, 참나의 자리이다.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佛敎와 修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일단 道나 깨달음이나 修行에 대한 그간의 내 나름대로의 偏見은 내려놓아야 한다. 修行은 특별히 根機가 높은 이들만 할 수 있는 전유물도 아니고, 靈的인 슈퍼맨들만 갈 수 있는 비좁은 길도 아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이렇게 가장 平凡하고 自然스러운 당신이야말로 이 공부에 가장 적합한 참사람이다.

 

 

 


[1329호 / 2016년 1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