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장백산-1 2016. 2. 17. 07:56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아주 어릴 적에는 꽤나 종종 심심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특히나 겨울 방학 때면 어디 나가 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너무나도 심심하고 무료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때도 아니고, 지금처럼 인터넷 게임이나 재미있는 TV 프로가 다양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생고구마를 까먹으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심심하던 때에 옆 집 친구가 놀러와

비료포대기를 한 장씩 들고는 뒷 산에 올라가 눈밭에서 눈썰매를 타거나, 눈싸움 하며 마을 어귀를

뛰어놀던 그 때가 때때로 그리워지곤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나 어린이들을 보면 심심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공부에 너무 바빠서도 그렇

고, 가야 할 학원도 많고, 무엇보다도 손 안에는 스마트폰이 초등학생 저학년부터 다 쥐어져 있다.

TV 프로는 또 얼마나 볼만 한 것이 많은가.

 

물론 그것은 어른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요즘은 옛날

처럼 심심하다거나 무료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은 지가 꽤나 오래 된 듯 하다. 가만히 돌이켜보

우리가 우리 自身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가만히 홀로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뒤처지는 것 같아서 무언가를 해야지,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듯 싶다. 하다못해 쉴 때에도 무언가를 하면서 쉬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기만 한 때가 과연 있기는 할

까? 옛날처럼 무료하고 심심할 機會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自由, 그저 잠시

으를 수 있는 自由, 무료하고 심심해 할 수 있는 그런 自由는 정말 필요치 않은 것일까?

 

7년 전쯤 히말라야에서 1달 이상을 홀로 걷기만 한 적이 있었다. 저절로 默言을 하면서, 高山

적응으로 많이 걷지도 못한 채, 그저 빈둥빈둥 놀며 걸으며 한 달 가량을 그저 시간을 죽이며

보내기만 한 적이 있다. 되돌아보니, 그 때처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루에 서너 시

간 걷는 것 외에는 할 일 없이 빈둥대디만 하던 때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 때의

記憶,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에 쫒기지 않으며 그저 하루 하루를 숨쉬고 살기만 했던 그

때가 아주 鮮明하게 종종 그리워지곤 한다.

 

그 때의 그리움은 바로 할 일 없음이 주는 自由였다. 심심하고 무료하다는 것이 의외로 어릴 때

처럼 몸이 비비꼬이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껏 심심해주고, 마음껏 아무것도 안 하고,

마음껏 시간을 죽치고 있다는 것은 삶에서의 아주 새로운 기쁨의 순간이었다.

 

가끔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보라.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

라는 自由를 自己自身에게 선물로 줘 보라. 마음껏 심심해해 보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

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있는 그 함이 없이 허비하는 시간, 바로 그런 시간의 텅~빔

속에 그저 存在할 때가 事實  根源에서는 더욱 꽉~찬 充滿이 피어오르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무언가가 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갖지 않더라도 事實은 아무것도 아닌

지금 여기 이 순간 있는 이대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이미 本來 完全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

들은 이미 다 完全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 眞理의 世界, 참 모습, 實相이기 때문이다. 이루겠다거나,

해야겠다는 生覺이나 慾心내는 마음만 없으면, 우리는 本來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고 이룰 필요도

없는 이미 完全한 存在인 것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存在하게 될 때가 곧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있는 이대로의 完全性 즉, 眞理의 性稟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있는 이대로의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을 

어떤 分別도 判斷도 없이 순수하게 受容해서, 이 세상 이 모든 것들과 '하나' 됨을 뜻한다. 바로 그

때가, 內面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망, 되고자 하는 欲望, 하고자 하는 意志라는 모든 有爲의 行이

멈춰지고, 無爲의 空이 춤추게 되는 순간이다. 根源의 힘, 本來의 빛이 비로소 깨어나 밝게 빛나게 

되는 순간이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