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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분별세계가 아닌 본성을 곧바로 보라

장백산-1 2016. 2. 16. 21:03

허망한 분별세계가 아닌 본성을 곧바로 보라

 

 

우리 腦 속에는 假象現實을 만들어내는 영화상영관이 있습니다. 그 우리 腦 속의 시뮬레이터는 끊임없이

온갖 영화를 찍고, 다큐를 찍어댑니다. 그런데 腦科學에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 腦 속 영화관은 主로

否定的인 영상을 주로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腦 자체가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方便으로 主

로 否定的 情報에 민감하도록 進化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否定的인 生覺 妄想들이 끊임없이 過去의 좋지 않은 記憶들을 組合해서 惡夢과 같은 영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매 순간 깨어있는 意識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머릿속에는 온갖 生覺과 煩惱 妄想들이, 그것도 主로 否定的인 生覺 망상 번뇌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重要한 것은 그렇게 일어난 生覺과 妄想들을 나와 同一視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어떤 生覺이 얼어나면 그 生覺이 바로 나라고  굳게 믿는 것이지요.

 

사실 그 生覺들은 내가 아니고 내  生覺이 아닙니다. 과거에 비슷한 경험과 기억들에서 끌어와 이리저리

경험과 기억을 組合함으로써 만들어낸 虛妄한 妄想일 뿐,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서의

생생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生覺과 妄想은 단지 그저 因緣에 따라서 손님처럼 잠시잠깐

왔다가 가는 파동하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生覺 妄想 煩惱는 내가 아닙니다.

 

生覺이 내가 아닌 것처럼, 이 몸도 진짜 나는 아닙니다. 變해가는 것일 뿐이지요. 우리 몸은 끊임없이

細胞分裂을 일으키기 때문에, 細胞 次元에서는 7년에 한 번씩 몸을 이루는 모든 細胞가 전혀 다른

細胞로 바뀌고, 微粒子(素粒子)의 次元에서는 찰나지간에 微粒子들이 태어나고 소멸한다고(刹那生

刹那滅) 합니다.

 

感情이나 느낌 또한 인연에 따라서 오고 가는 것일 뿐, 진짜 나는 아닙니다. 意圖나 欲望 또한 진짜

나는 아니지요. 狀況에 따라, 條件이 바뀌면 우리의 욕망이나 의도도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思量分別을 통해, 生覺 妄想을 통해 허망하고 허황된 相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스스로 만든

虛相을 實在라 착각하며 거기에 집착  애착하며 그것이 ‘나’고,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날 갑자기 理想形에 가까운 한 女人이 나타납니다. 마음 속에서 그녀를 내 이상형에

끼워 맞추고는, 있는 그대로의 그 여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속에 미리 그

려논 이상형의 그녀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相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相을 만들어놓고 그녀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여기며,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무슨

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짓 相에 執着하고 愛着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진짜 있는 그

대로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생각 망상으로 造作해 낸 ‘그녀’를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이와 같이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나와 너, 사람들, 종교, 도덕, 진리, 세계, 우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내 사고방식대로 조합되고 만들어진 生覺 속

에 그려진 虛象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진짜 나라고 할 수 없는 것들 입니다.

 

삶, 세상, 현실, 우주만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이 생각 속에 그려진 그림과 같습니다. 삶 자체가

이처럼 하나의 巨大한 幻影이고, 意識이 조작해낸 꿈 같은 虛妄한 錯覺의 世상인 것이지요. 허망한

幻影인 삶 그것은 實相의 세계도 아니고, 그 幻影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나’라고  여기던 그 나도

진짜 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짜 나’는 누구, 무엇일까요?

 

生覺이나 마음이나 槪念 觀念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위적으로 造作되거나 허망

하게 부풀려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요? 金剛經에서는 이렇게 生覺 마음 槪念

觀念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相’이라고 하면서, 그 모든 相을 打破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生覺이나 마음, 槪念, 觀念이 아닌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相으로 槪念化되거나

훼손되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對相을 보자마자 바로 아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對相을 보

고 곧바로 聯이어 過去 記憶 속에서 그 對相과 비슷한 것을 끄집어와 對相과 分別 比較 對照함으로써

그 대상에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이고, 槪念化하는 것은 生覺, 分別心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對相을 이름과 이미지로 槪念化 짓기 以前에 그 對相을 즉바로 아는 어떤 것이 있습

니다. 대상을 즉바로 아는 어떤 그것앎(識)이라고 할 수도 있고, 本來面目, 本性, 마음자리, 佛性,

主人公 등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러왔지만 아무것도 없이 텅~빈 바탕 공간의식 하나 그 자리는

그 어떤 이름이나 槪念도 붙을 수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개념화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어떠한 生覺들과 나와의 同一視가 일어나지 않는 단 하나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對相을 볼 때 보는 우리 마음은 그 對相을 쫓아가게 되고, 그 對相을 좋아하고 삻어

하는 分別心에 따라 그 對相을 執着하거나 거부하게 됩니다. 生覺이 일어날 때에도 우리 마음은 그

생각을 좇아가면서 그 생각이 나라고 여기는 同一視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昭昭靈玲하게 아는

자리는 대상이나 생각을 좇아가지 않고, 언제나 대상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 뿐, 움직임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우주만물,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의 根源, 純粹한 本性이며 참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참나나 순수한 본성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이름, 말에 불과합니다.

 

눈으로 꽃 한 송이를 볼 때 꽃의 이름이 무엇이라느니, 어떤 色이라느니, 좋아한다느니, 다른 꽃보다

덜 아름답다느니, 꺾고 싶다느니 하는 그 모든 對相을 좇는 分別心 生覺 妄想들을 일으키기 以前에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그것을 돌이켜 보게 될 때 우리는 참된 本性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廻光返照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때 보이는 對相의 빛깔과 모양 이름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면 그저 보는 性稟, 本性만 남게

됩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도 그 소리의 뜻이나 解釋에 가로막히지 않은 채 듣게 되면 그 듣는 놈을

능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 본성자리를 어떤 특별한 체험의 相對으로 또 다른 相을 지어

헤아립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특별히 체험이 필요한 자리도 아니고, 애써 찾아야 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죽비 소리가 ‘탁’하고 일어날 때 바로 그 소리를 듣는 것에 애써서 귀를 기울이거나,

특별한 노력을 통해서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바탕 이 자리로 드러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늘 쓰면서 함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本性인 줄 모를 뿐입니다.

 

本性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다만 이처럼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볼 때 生覺과

槪念을 對相에 덮씌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떤 소리를 들을 때 아무 解釋 없이 그저 소리의

에너지 波動 그 자체로써 들어 보는 것입니다. 生覺이 일어날 때는 그저 生覺이 일어났다는 事實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렵다고 하겠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는 것이 쉽지, 우리가 지금까지 하듯이 있는 그대로를 내 分別心 妄想 生覺으로 시비 분별하고

비교하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사량분별해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방식이야말로 더욱

어려운 방식입니다. 그러니 對相을 쉽게 보라는 것입니다. 분별해서 보지 말고, 그저 쉽게, 있는 그

대로 본다면 그렇게 보는 것이 곧바로 本性을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