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생사윤회는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

장백산-1 2016. 2. 1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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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전남대 철학과 교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중"
생사윤회는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
2016년 02월 11일 (목) 17:18:25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이중표 교수는 “無我를 깨달아 我相을 없앤 보살은 我相을 버리지 못해 生死輪廻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외면하지 않고 이들이 모두 我相을 버려 열반을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願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강경’의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는 大乘의 核心思想이 담겨 있습니다. 대승정종이란 대승의 근본취지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답변 형식으로 드러나는 ‘금강경’의 취지는 두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보살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모두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구마라집 삼장이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應如是降伏其心)’로 번역한 부분의 산스크리트어는 ‘evaṁ cittaṁ upādayitavyam’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이와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입니다. ‘마음을 항복받는다’라는 번역보다는 ‘마음을 일으킨다’라는 번역이 더 명쾌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부처님 가르침의 취지가 개인적인 성취가 아닌 모두 함께 깨우쳐서 일체중생을 열반(지고의 행복)으로 이끄는 삶, 즉 보살승(菩薩乘)에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보살이 중생 제도한다는 건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  제도할 중생  實在하지 않아

 中道는 모순대립이 떠난 입장,  실체론은 언어를 진실로 판단,  언어 떠나 中道서 실상 봐야


둘째,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여도, 사실은 어떤 중생도 무여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다. 왜냐하면 보살에게 아상(我想), 인상(人想), 중생상(衆生想), 수자상(壽者想)이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구마라집 삼장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으로 번역한 단어의 산스크리트어는 ‘ātma-saṁjñā sattva-saṁjñā jīva-saṁjñā pudgala-saṁjñā’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잡아함경’에는 人間을 의미하는 다양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금강경’과 비교하면 ‘인상(人相)’은 ‘복가라(福伽羅):pudgala(사람)’를 의미하고, 중생상(衆生相)은 ‘중생(衆生):sattva’를 의미하고, 수자상(壽者相)은 ‘기파(耆婆):jīva(壽命)’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금강경’의 네 가지 相이 ‘잡아함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잡아함경’은 우리가 사람이나 自我라고 하는 槪念이 바로 知覺活動과 經驗을 통해 形成된 오온(五蘊 : 色 受 想 行 識)인데, 五蘊은 단지 觀念 槪念이며 記憶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五蘊의 觀念에서 벗어나는 삶이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이런 觀念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을 菩薩이라고 표현합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보살은 大乘佛敎 特有의 존재가 아니라, 根本佛敎에서 이야기하는 涅槃을 진정으로 성취한 사람이며 涅槃을 성취한 보살은 일체중생의 괴로움을 外面할 수 없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만, 나와 남을 分別하는 生覺 마음 즉, 我相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자신이 제도했다는 生覺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我相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은 我相을 버리는 일입니다. ‘잡아함경’은 괴로움의 뿌리인 虛妄한 自我라는 妄想 卽, 我相은 의욕(思)과 소원(願)을 因緣해서 생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의욕과 소원을 가지고 중생을 제도한 後에, “내가 중생을 제도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我相만 더 키운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보살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잡아함경’과 ‘금강경’ 사이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잡아함경’에서는 我相이 의욕과 소원을 因緣하여 생긴 妄想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금강경’에서는 모든 중생을 제도할 願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我相이 있어서는 안 되고, 我相을 생기지 않게 하려면 願을 세워서는 안 되는데, 願을 세우지 않고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면, 보살은 그 자체로 자가당착이며 모순입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일까요? 여기서 모순된 見解를 취하지 않는 부처님의 위대한 沈默, 무기(無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 卽 自我가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몸을 받아서 태어나 늙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空間的으로 有限할까, 無限할까?’ ‘세계는 時間的으로 有限할까, 無限할까?’ ‘生死를 극복한 如來는 死後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하는 문제들은 다 分別하는 生覺에서 비롯된 疑問들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태어나서 죽어갈 세계가 있다고 生覺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것이 我相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63.Cūḷa-Māluṅkya-sutta(말룽꺄에게 설하신 작은 경)에서는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독화살과 같은 사견(邪見)이라고 비판했습니다. 燃料에 依持하여 타고 있는 불과 같이 人間의 몸은 섭취한 음식(團食)에 依持하여 36.5℃로 타고 있는 불꽃이고, 人間의 마음은 經驗이라는 음식(觸食)과 意志와 生覺이라는 음식(意思食)과 分別이라는 음식(識食)에 依持하여 타고 있는 불꽃입니다.

우리는 緣起하는 存在일 뿐, 固定不變하는 實體가 있는 自我로서의 우리가 時間과 空間 속에서 過去, 現在, 未來를 貫通해서 輪廻하는 存在가 결코 아닙니다. 이와 같은 事實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無明이고, 이러한 生覺으로 사는 사람이 衆生입니다. 本來 태어나서 늙어 죽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無我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네 가지 飮食을 取하여 自我라는 妄想을 만들어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生死輪廻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生死는 중생들이 自我라는 妄想을 固執할 때 나타나는 錯覺입니다. 따라서 自我라는 我相을 버리면 生死輪廻는 사라집니다. 보살이 중생을 生死輪廻의 苦痛이 있는 이 언덕에서 生死輪廻의

苦痛이 없는 涅槃의 저 언덕으로 제도한다고는 하지만, 生死가 本來 없기 때문에 제도할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자신이 本來 生死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事實을 알지 못하고 自我라는我相의 妄想에 사로잡혀서 꿈을 꾸듯이 스스로 虛妄한 生死輪廻의 苦痛을 받고 있습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실제로 제도할 중생이 있어서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本來 生死가 없는 삶을 살고 있기에 제도할 일이 없는 중생을 다만 生死輪廻가 있다고 믿는 虛妄한 꿈, 幻想에서 깨어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구제를 받은 중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보살의 誓願은 무원(無願)의 서원이며, 이것이 무원삼매(無願三昧)입니다.

이것이 육조 혜능이 말하는 돈법(頓法)입니다. ‘육조단경’의 가르침의 근본은 정혜일체(定慧一體), 정혜즉등(定慧卽等)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本來부터 가지고 있는 菩提般若라는 智慧’를 깨닫기 위해서는 禪定과 智慧를 수행해야 하는데, 그 선정과 지혜를 一體로 보고 同時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혜능이 이야기한 ‘누구나 本來부터 가지고 있는 보리반야의 智慧’를 誤解하면 안 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本來 生死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육조는 ‘누구나 本來 生死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가리켜서 ‘누구나 本來부터 가지고 있는 보리반야라는 智慧’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조단경’에서는 왜 정혜일체, 정혜즉등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정혜를 둘로 보는 것은 實體論에 근거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선정을 닦아 지혜를 얻어 성불하게 된다는 生覺은 실체론적인 것으로서, 수행자와 그 수행자가 행해야 할 수행(定慧)과 그 수행을 통해 얻을 결과(菩提般若라는 智慧)를 別個의 것으로 分離합니다. 여기에서 선정과 지혜는 보리(菩提)를 얻는 手段으로 간주되며 이 手段의 先後關係가 문제됩니다. 禪定을 통해 智慧가 나오는가, 智慧를 통해 禪定에 들게 되는가? 즉 깨달음(菩提)이라는 結果는 智慧(반야)라는 수단에 의해 성취되는가, 禪定이라는 수단에 의해 성취되는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육조단경’은 이러한 논쟁을 어리석은 사람들이 승부심을 끊지 못해 생기는 것으로서 법집(法執)과 아집(我執), 卽 實體論을 떠나지 못한 결과라고 비판합니다. 卽 自我가 실제로 있다는 生覺을 가지고 수행하기 때문에 나타난 논쟁이라는 겁니다.

實體論은 言語를 眞實한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언어는 그 언어에 相應하는 實體가 없기 때문에 眞實하지 않고 虛妄한 槪念 觀念입니다. 그런데 실체론은 허망한 언어를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를 놓고 모순 대립합니다. 모든 思想的 對立은 언어를 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모순 대립에 대하여 虛妄한 言語의 유희, 즉 희론(戱論)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虛妄한 言語를 떠나 중도(中道)에서 實相(세상의 참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中道는 言語라는 허망한 개념에 의해 惹起된 모든 모순 對立을 떠난 입장입니다. 卽 言語道斷의 입장이 中道입니다. 禪家에서 이야기하는 不立文字는 바로 이러한 中道를 의미합니다. 부처님이 당시의 思想的 對立에 대하여 沈默한 이유는 이러한 中道를 드러낸 것입니다. 般若(智慧)는 말장난을 쉬고, 虛妄한 槪念化 作用을 그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般若(智慧)가 곧 中道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中道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緣起法이라고 하는 眞實을 가르쳤습니다.

‘대승정종분’의 “모든 부류의 중생들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여 그들을 제도하겠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여도, 事實은 어떤 중생도 무여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에 보살에게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생긴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內容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無我를 깨달아 我相을 없앤 보살은 我相을 버리지 못해서 있지도 않은 生死輪廻의 苦痛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外面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이들이 모두 我相을 버려 있지도 않은 虛妄한 生死輪廻의 苦痛에서 벗어나 涅槃(지고의 행복)을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願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중생들이 我相을 버리고 涅槃을 성취하지만, 실제로 열반에 들어간 중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實際로 生死輪廻도 없고, 生死輪廻의 苦痛을 당하고 있는 중생도 없고, 얻어야 할 涅槃(지고의 행복)도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直指人心이란 인간의 마음 즉, 受 想 行 識이 無常하게 緣起하고 있다는 事實을 곧바로 洞察하는 것을 의미하고, 見性成佛이란 마음의 本來 性稟 즉, 本性이 空性이기에 無我(고정된 실체가 없다)라는 事實을 깨달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중생의 삶이 아닌 부처의 삶을 이루는 것(成佛)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처의 삶이란 我相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라는 사실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중생으로 하여금 我相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처의 삶(成佛)이 전법도생(傳法度生)입니다. 이러한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은 점차의 순서 없이 同時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육조 혜능의 頓法(깨닫는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에는 육조의 돈법을 계승하고,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조계종의 종지가 함축되어있습니다. 우리가 自我로 取하고 있는 五蘊에 自我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無我)라는 事實을 般若智慧로 洞察하는 것이 直指人心이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분리 분별하는 생각이 없어진 마음이 見性입니다. 일체중생이 허망한 我相을 버리게 해서 열반에 들게 하는 것이 부처의 삶을 사는 成佛이며, 本來 生死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生死輪廻의 苦痛도 없고, 실제로 涅槃에 들어갈 중생도 없고, 중생이 들어갈 涅槃의 世界도 없다는 眞理를 중생들에게 傳하는 일이 傳法度生입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에 선후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직지인심하여 견성성불한 후에 전법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지인심하면 전법도생하지 않을 수 없고, 전법도생하는 삶이 곧 성불한 사람의 삶입니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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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1월18~22일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에서 열린 ‘이중표 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좌를 요약한 것입니다.

[1331호 / 2016년 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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