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經典이야말로 부처님께 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장백산-1 2016. 3. 7. 21:46

월간 불광(佛光) 2000년 12월호  특별법석 무설정사 혜경스님/ 정리 남동화

 

“經典이야말로 부처님께 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이 法을 說하고 있는데 내가 또 무엇을 보태겠습니까. 꽃과 나무, 시냇물, 그리고 저

산봉우리도 다 저마다 說法을 하는데 다만 人間이 듣지 못할 뿐이지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

지도 모른 채 우리는 속아서 살고 있습니다. 自身이 이생에 온 目的도 잃고 衆生인 채로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가 늘 四弘誓願을 외웁니다만 우리가 이 世上에 온 것은 우리가 그렇게 願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스스로 選擇해서 한 일이기에 기쁨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意味에서 보면 衆生이라는 表現은 맞지 않아요. 원생(願生)이라는 말이 더 適合할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누구나 다 원(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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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 화계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무설정사(無設精舍).

혜경(惠耕, 68세) 스님께서 精舍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에는 다 理由가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또 말하는 바 없이 說해지는 그 無言의 說法을 굳이 말로 하자니 설명이 길어진다고.

 

-스님께서는 비교적 늦게 출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님의 출가인연담을 듣고 싶습니다.
 
출가인연담이라, 글쎄요. 뒤돌아보면 다 因緣所致인 것 같아요. 대학시절 굳이 이공계나 의대를 선택

하지 않고 人文大學을 선택해 歷史學을 전공한 일이나 實存主義哲學을 공부하고 大學院에서 國文學을

전공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을 위한 전주곡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어느날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게 된 法華經이 제 人生을 확 바꾸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人間의 實存에 목말라 하던 차에

法華經은 그 모든 解答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以後 佛敎에 關心을 갖고 또 經典을 工夫해가면서

마침내 出家를 決心했어요. 경전공부를 좀더 전문적으로 해보겠다는 욕심에서였지요. 주위의 그

누구도 내가 출가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서른네 살 出家에 대한 저의 選擇은

매우 理性的인 판단이었습니다.

 


-出家하시고도 主로 經典을 工夫하셨습니까.


출가생활이라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요. 새벽 예불을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기까지 온종일

앉을 틈도 없었던 것이 절집생활이고 보니 경전을 공부하고 번역 일을 한다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하루에 2~3시간을 자며 코피를 동이로 쏟는 일이 허다했지요.
 
그런데 1979년 겨울 어느 날 이었다고 기억이 됩니다. 法華經 序品을 飜譯하던 중 “부처님 이마에서

光明이 나와 十方世界(우주)를 두루 비추고… 땅이 여섯 가지로 振動했다.”는 문장을 보는 瞬間 그야

말로 天地가 振動하는 認識의 大變革을 맞았습니다. 그런 認識의 大轉換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느낌

으로 확 와 닿았습니다. 이제까지 無生物로만 보였던 것들이 生命體로 보이기 始作했습니다.

 

人間을 包含한 모든 生物이나 또는 無生物까지도 다 함께 宇宙 大生命에 依해서 살려지고 있기 때문

에 宇宙萬物의 存在價値는 根本的으로 모두 平等하다는 사실을 터득했습니다. 宇宙森羅萬象萬物이

모두 다 宇宙 大生命의 性稟, 佛性을 지니고 있는 生命體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때 以後로 世上萬事가 다 달리 보였습니다. 無機質도 生命體요, 모든 現象界가 살아있는 生命體이며,

그것들을 이름하여 소위 부처(佛)라 한다…. 그 歡喜와 感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붙들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이른 새벽에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곧 샛별이 나고 내가 샛별

이라는 事實을 깨달은 것입니다. 宇宙가 곧 나고 내가 곧 宇宙라는 事實을 깨달은 것이지요. 經典에 비

로소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그 이후로 어떤 경전을 보더라도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흔히 불교경전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래요. 그러나 본뜻을 제대로 알고 보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경전말씀을 理解하려고 하면서 경전을

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만 아는 것만큼 보는 것이기에 自身의 理解의 限

界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고, 경전이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똑같은 말을 해도 사람들은 각기 제

根機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觀世音菩薩을 念佛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念佛해서 福을 받으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어야지 하며 念佛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어서 念佛을 합니다.

 

경전은 탐구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對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전을

머리로만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事實 眞理 體驗을 傳達할 때 言語는 제 구실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言語는 무슨 言語든간에 一般的인

經驗에 關해서만 이야기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만 電氣라든지 에너지를 말로 설명할 수 있

습니까? 3次元 世上 속의 道具인 言語로는 4次元의 世界를 說明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言語 以前의 世界를 직바로 볼 수 있어야해요.

 

우리들은 흔히 부처님을 믿고 불교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참다운 믿음입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믿거나 자신에게 현상적인 利益이 있으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

다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一致되는 通路이며 廣場입니다. 八萬大藏經이 다 解脫로 통하는 門입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수행보다 경전공부를 강조하시고 계신데요.
 
깨달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평생 경전을 벗하면서 경전이야말로 부처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전을 보면서 어떤 경은 이해가 되고 어떤 경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文字에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經典은 깨달음을 目的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 文字로

되는 것이 아니듯이 經典도 文字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先入見을 다 버리고 純粹한 마음

으로 받아들여야지요. 特히 法華經은 人間의 無限한 可能性을 說하여 가르친 경전입니다.

 

대개 衆生들은 스스로를 凡夫衆生이라고 規定하고 束手無策으로 어찌할 道理가 없다고 斷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천만에 그렇지 않다. 人間의 性品(마음 본래의 성품)이란

空한 성품(空性)이기에 固定된 實體가 아니며, 내 마음대로 能히 바꿀 수 있다’고 希望을 줍니다.

 

뉴턴이 ‘自己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듯이

自己가 누구인지를 알면(見性) 自身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동국역경원에서 경전번역에 참여하시었고,

제대로 된 우리말 번역작업을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계십니다만.

 

漢文經典을 번역할 때 옥편이나 사전식으로 하는 번역은 지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思想 水準에

있지 않으면 誤譯할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 번역하면 아니함만 못하게 되지요.

 

아주 중요한 예를 들자면 유위법(有爲法)무위법(無爲法)을 번역하는 데 있어 한문 그대로 번역

해서 '함이 있다'  '함이 없다'라고 번역하면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有爲法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現象世界로,  無爲法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現象世界  以前의 世界

라고 번역해야 하는 맞는 것이지요. 특히 般若部 경전에 보면 ‘무(無)’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無 그 意味는 그냥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산스크리트어본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 口語體로 된 經典을 文語體로 바꾸면서 誤譯이 많아졌고,

또 言語는 時代에 그 뜻이 달리 쓰이기도 하고 變化해갑니다. 약간’이라는 말도 지금은 ‘조금’이라는

뜻으로 쓰는데 그 당시에는 ‘많다’라는 뜻으로 쓰였지요.

 

또 佛敎의 核心이라고 할 수 있는 ‘공(空)’은 산스크리트어로 ‘수냐(sunya)’ 라고 합니다. 이 原語는

‘팽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타(ta)’를 붙이면 ‘팽창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띠게 됩니다.

膨脹되는 것이 어떻게 固定된 實體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것은 無에서 나온다’는 道敎哲

學化된 中國佛敎를 잘못 받아들이면 空과 空性을 제대로 理解할 수 없습니다.


또한 흔히들 ‘煩惱를 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中國式 解釋이며 잘못된 表現입니다. ‘煩惱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불교가 바르게 전달되고 좀더 저변확대가 되려면 제대로 된 言語 使用이 무엇

보다 중요합니다.

 

-佛子들의 認識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자주 표현하고 계신데 이 기회에 한 말씀 들려주시지요.

 

一般的으로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 해서 衆生을 救濟하기 위해서는 優先 經典 工夫를 하거나

參禪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에 비로소  衆生敎化에 임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事實은 下化衆生을 하고 있노라면 自然히 上求菩提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下化衆生 그 自體가 곧

上求菩提라는 말입니다. 하화중생과 상구보리가 따로 둘로 나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생과

중생의 삶과 부딪침 속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蓮꽃의 德性을 譬喩하는 말 가운데 화과동실(花果

同實)이라는 말도 그와 같은 뜻이지요,

 

깨달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完全하게 깨달아 있는 存在로서 깨달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찾아서 구해야 할 깨달음이  따로 어디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行爲하는

모든 表現 즉, 느낌 감정, 생각 상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하는 마음 분별의식 ,

말, 行動 등등이 곧바로 眞理로 通하는 길이고 ‘부처의 길, 깨달음 길을 가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한낱 보잘 것 없는 存在가 아니라 이미 完全한 부처인 거룩하고 위대한 存在입니다.

다만 중생들이 이런 眞實을 아직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佛子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이미 틀림없는 부처님의 자손인데도 부처에게 등을 돌리고 멀어지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法華經 ‘長者 窮者(부자의 거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부처님께서는

 ‘나는 迷惑하고 못난 人間이다. 죄 많은 몸이다. 라는 따위의 비굴한 生覺은 깨끗이 버리고 佛子라는

眞實에 눈을 떠라. 즉, ‘나라는 존재의 本質의 거룩함(佛)을 發見하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부처(佛)은 永遠不滅, 不生不滅하는 宇宙의 大生命이시며, 이 世上 모든 것들을 存在케 하고 살도록

해주며 活動하게 하는 宇宙의 根源的인 大生命이시기에 이 世上의 모든 存在, 宇宙萬物, 우리들은

宇宙의 根源的인 大生命인 부처(佛)의 化現 千百億 化身이며, 따라서 頭頭物物 花花草草가 모두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중국의 소동파가 ‘저 높은 산봉우리는 부처님(佛)의 얼굴이요,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부처님의

설법 소리일세’라고 말했듯이 이 世上, 宇宙森羅萬象萬物은 모두가 부처님(佛) 卽, 宇宙 大生命의

化現인 千百億 化身佛인 것입니다. 이 세상, 우주만물이 宇宙 大生命이신 부처님(佛)에 依해서

살려지고 키워지고 있다는 眞實을 깊이 自覺하고 그 法則을 說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쫒아

살아간다면 自由自在(해탈)해서 幸福(열반)해질 것입니다.

 

오늘도 부처님 경전 말씀을 쟁기로 삼아 열심히 지혜의 밭을 갈고 계신 혜경(惠耕) 스님은 최근에는

금강경과 유마경, 승만경을 한문 원문과 구역, 산스크리트역, 그리고 주와 해설을 붙이고 마지막으로

현대역 작업을 해서 마쳤다. 그리고 다음 작업으로는 法華經 전 8권을 해설하는 願을 가지고 계시다.

 

 “…바라옵나니 이 공덕이 널리 미치어 나와 함께 모든 중생이 성불케 하여지이다.”

 

 때로는 부처님 말씀을 말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되돌아오지 않는 먼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느껴지

지만 그 말씀을 傳하시기 위해 이생에 오신 것처럼 그것을 당신의 願行으로 삼고 있으시다.  기자가

혜경 스님은 1933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했다. 스님은 56년에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불가에

귀의했다. 법명은 혜경(惠耕) 당호는 회옹(晦翁). 재단법인 법화종 유지재단 이사장과 법화불교대학

학장을 지냈다. 스님은 85년부터 현재까지 無說精舍에 주석하며, 경전번역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법화경 번역의 손꼽히는 권위자로서 경전공부모임을 이끌며 출·재가자들에게 그 가르침

을 널리 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스님이 번역·저술한 불경만도 <법화경 이야기>(범우사), 법구

경 입문(범우사), <법화삼부경>(문학예술사), <우리말 법화경>(도서출판 삼양), <법화경 총설>(도서출

판 삼양), <관무량수경>(집문당) 등 다수.

 

혜경스님은 정교한 논리로 부처님의 교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독특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스님은 신도

들을 대상으로 경전을 가르칠 때도 항상 믿음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보살행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한다.


스님은 요즘 法華經과 관련한 홈페이지 개설을 서두르고 있다. 이제까지 해온 저술과 번역작업이 후학

들이 좀더 쉽게 다가와 공부할 수 있도록 한 일인 만큼  미래세대가 이에 바탕하여 한층 넓게 이해하고

실생활에 도움되는 方便을 개발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생활은 ‘無欲’ 그 자체이다. 평생 어느 것도 所有해 본 적이 없다. 사찰의 주지를 맡아 본적도

없다. 사찰을 지어 곧바로 불교재단에 상좌 명의로 등록한 뒤 작은 방 한 칸만 얻어 살고 있다.

 

私家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준 유산도 모두 불교재단 명의로 상속했다.

스님의 삶은 한마디로 菩薩道의 삶 그 自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