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의 말에서 깨어나기

장백산-1 2016. 4. 13. 13:26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의 말에서 깨어나기


가끔 찾아와 공부를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소식이 없어 온통 답답한 마음을 안고 오시는 분도 있고,

공부하다가 불현듯 어떤 통찰과 변화가 있지만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명백하지 않아  긴가민가하는

마음을 안고 오는 분도 있습니다.


며칠 전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20대부터 깨달음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책을 읽기도 하고 국선도를

하기도 하고 천부경을 공부하기도 했답니다. 그 이후 결혼을 하고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

답니다. 그러다가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답니다. 그때 너무도 가슴이 아팠으며, 그 마음을

안고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틈만 나면 에크하르트 톨레 TV를 보았고, 마하리시, 마하라지, 아디야산티 등 근현대 서양 영성 사상가

들의 책을 탐독했답니다. 그러다가 문득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다는 나름대로의 통찰이 있었

다고 합니다. 모든 게 존재, 마음의 일이어서 이것이 분명히 있는데 이게 현상과 따로 있는 듯하여

이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게 마음의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답니다. 그런데 '둘 아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은 그런 상태가 아니어서 공부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랍

니다. '둘 아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이 말이 자신을 콱 가로막고 있답니다. 마침

아이도 학교에 들어가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데 엄마인 자신은 이 문제에 맞닥뜨려서 손길을 제대로

주지 못하니 안타깝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이 존재가 분명히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모든 것을 드러낸다면 이것과 드러나는 것

사이에 둘이 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되지요?"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이 언어나 생각에서 해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요즘 들어 나름대로 안목이 있다는 사람들이 낸 영성

서적이나 그들의 설법을 들으며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하기 때문에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통찰이 생기고 그 이후로 설법을 잘 알아듣게 되어 공부가 진일보 하였다는

나름의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잘 알아듣는 듯하다가도 어떤 구절에서는 딱 막히는 경우가 있어  안절부절못합니다.

공부가 시원하지 않아 세속일에도 신경을 못 쓰고 공부도 원만하지 않아 어중간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제가 마음공부를 할 때도 비슷한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공부의 변화를 맞고 나서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다

가도 어느 순간 의문이 일거나 어떤 지견이 생기면 그것을 해결해 보거나 내놓아보려고 선생님을 찾아갑

니다. 내 얘기를 듣고 선생님은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게

妄想 아닙니까? 그 生覺 妄想 煩惱 雜念이 일어나는 자리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정도로 말씀하시곤 했습

니다. 그 말을 들으면 말씀은 맞는데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의문에 맞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고 해소해주기

를 바라는데 그런 마음 生覺 妄想 煩惱 想念을 물리쳐버립니다. 그런 마음 생각 잡념이 그저 그게 妄想 아니

냐,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무슨 일이 있느냐라는 말을 들으면 민망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보면 왜 그렇게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응대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 공부란 의문이

해결되고, 자기가 構想한 生覺의 틀에 맞는 變化를 얻어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다른 말로 解脫

이라고 합니다. 解脫은 곧 自由입니다. 어디 어느 것에도 自由롭지 못하다면 깨닫지 못한 겁니다. 깨닫지 못

했다면 自由롭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自由롭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해탈해보기 前까지 우리 스

스로가 무엇에 묶여있는지 명확히 깨닫지 못 합니다. 해탈해본 사람만이 그 正體를 압니다. 물론 설법이나 글

을 통해 觀念으로부터의 해탈이다. 生覺으로부터의 해탈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알아서

이것을 믿고 있는 상태라면 그 自體가 生覺 마음 妄想 煩惱 想念에 拘束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 공부라는 觀念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또 다른 觀念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해탈에 대해 분명하지 않을 때는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을 觀念化시키려는 分別心의 屬性을 보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해탈로 이끄는 方便의 말이나 글이 깨달음, 해탈의 장애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찾아오신 분도 어떤 변화를 겪고 나서 거기에서 모든 觀念, 槪念, 生覺, 妄想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것을

對相化하려는 試圖, 意圖, 分別로 접근하려는 마음의 習慣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 것입니다. 여전히

分別心, 分別意識이 치성하게 法, 이세상 모든 것들을 分別하려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진실로 알려드리

고 싶은 것은 '둘 아닌 하나의 法(不二法)만이 如如하다'는 '理想'이 아니며, 마음(心)은 어떤 깨달음의

'對相'이 아닙니다. 온갖 妄想과 分別이 일어나는 여기로 이끌어 모든 분별 망상이 그저 분별망상임을

곧바로 보아 그저 이 마음 자체로 온존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아무런 계산이나 헤아림이 없습니다. 그러

고 보면 妄想 分別이라는 것은 本來 없었음을 如實히 보게 됩니다.

 

공부에 막힘이 있다는 것은 自己도 모르게 分別妄想에 갇혀있다는 신호입니다. 萬法이 드러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여기에 온전히 契合하지 못하고 여전히 갖가지 槪念 觀念 生覺 妄想 分別心 分別意識이 나와

만법, 이 세상 모든 것들과의 사이에 분리감 틈새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境界 對相, 이 세상 모든

것들, 萬法이 하나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라는 말은 마음과 경계가 하나로 一致하

는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自己도 모르게 固定觀念化시키고 있는 本質인 마음과 그 위에 드

러나는 現象의 世界인 境界, 만법, 이 세상 모든 것들이라는 二分法이 곧 生覺 妄想 煩惱 分別心 分別意識

이라는 事實을 깨달아 이 微細한 觀念, 망상 생각 번뇌 분별심 분별의식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음과 경계가 본래 하나였음이 드러납니다. 不二法은 애써지어서 이루는 어떤 공부 상태가 아니라,

어떠한 人爲的 作爲的인 努力도 필요 없는 本來 그러한 일입니다. 그러니 마음이니, 경계니, 둘이니, 하나니

하는 槪念 觀念 妄想 生覺 幻想에서 깨어나면 될 일입니다. 

 

 

- 릴라 임순희님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글쓴이 : 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