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 분리 분별이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道를 보려는 마음을 내면 도리어 道에 미혹하고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은 오히려 不安속을 구르네.
편안함 없이 편안해지고 보는 것 없이 보아야 바야흐로 이 일이 복잡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 원감충지(圓鑑冲止, 1226-1292)
정존견도환미도(情存見道還迷道) 심요구안전불안(心要求安轉不安)
안도무안견무견(安到無安見無見) 방지차사물다반(方知此事勿多般)
道를 보려 하는 마음이나 깨닫겠다고 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합니다.
이름을 道라고 하건 깨달음이라 하건, 그 이름이 가리키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부 부분 분리
분별 나머지가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라서 결코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 일으켜 어찌
해보려고 하면 그만 어긋나 버리게 됩니다.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限 편안하지 않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을 구하는 마음이
바로 편안함과 불편함으로 나누어 놓는 分別心, 分別意識, 자아의식, 에고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편안하다고 집착하는 순간 저절로 그 반대편에 불편함이 생겨납니다.
헤르만 헷세(Herman Hesse, 1877~1862)는 다음과 같은 시로 말한 바 있습니다.
幸福을 찾아서 幸福을 쫓아다니는 限은
당신은 아직 幸福을 누릴 만큼 성숙하지 못한 의식입니다.
비록 사랑스러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 된다 해도.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목표를 정하고 초조하게 있는 限은
당신은 아직 平和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어떠한 목적도 욕망도 모르고
幸福이란 말을 부르지 않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만사의 흐름은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영혼은 안식을 찾을 겁니다.
완전한 편안함은 편안하지 못함, 불편함마저 포함하고 있는 편안함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편안함에는
편안함과 불편함이 따로 없습니다. 진정으로 보는 것에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본 것이 참으로 본 것이요, 아무것도 깨달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참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참된 道의 입장에서는 이미 ‘道’라는 이름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 道를 보려 하고 깨닫겠다고 하는
마음은 이미 病이 깊은 것입니다. 이것, 이 사실, 이 일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한 없이 단
순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오히려 번거로운 일입니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그저 이 일입니다!
-몽지- / 무진장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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