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수월도량(水月道場)

장백산-1 2016. 6. 22. 16:30
‘무상’만 들먹이며 보살행 않는 얌체짓 하면 안돼
제3장, 귀의자성삼신불(歸依自性三身佛)-10
[0호] 2014년 05월 14일 (수) 15:08:59설우스님/청주 법인선원장
  
 

무상한 줄 알지만 닦고 장엄하는  ‘수월도량’이 바른 불교계 ‘보신’


<단경> 본문을 다시 보자.

“무엇을 圓滿 報身佛이라고 하는가. 등불 하나가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知慧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나니,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를 생각할지니, 항상 미래의 생각이 착한 것을 이름 하여 보신불(報身佛)이라 하느니라.”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를 생각하라’ 는 말은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緣生緣滅이기 때문이다. 찰라에 흐르는 강물에 발 씻은 물이 어디 머물러 있는가? 實體가 없는 緣起法이다. 그러 한 생각 지혜, 등불이 밝아지면 과거 생래 익힌 습도 없앨 수 있다. 천년의 어둠도 한 등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천수경>에도 같은 내용의 구절이 나온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자성이 없는데 습이라는 무명업식에 의해 일어난 마음을 좇아 생겨난 것 뿐이다. 무명업식 마저도 착각에서 일어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 그래서 마음이 멸하면 그 죄도 한 순간에 멸한다. 정견이 서서 본래 실체가 없는 공공적적한 공적영지의 본래 무심자리를 보게 되면 마음이 멸하면서 그 죄도 같이 멸해버린다. 그래서 아도 멸하고 공도 멸하는 ‘양구공’ 이 된다.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이다. 양구공이 되면 진참회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다.


<단경>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 년의 착함을 도리어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 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착함을 보신(報身)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法身을 좇아 생각함이 바로 化身이요, 생각마다 착한 것이 바로 報身이며,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음이 바로 귀의(歸依)라 이름 하나니.”



  
 

本來 自性은 淸淨한 자리이기 때문에 물드는(染) 자리도 아니고 얻는 자리도 아니다. 무명이 실체가 없는데 왜 닦아야 하는가? 선가(禪家)에서는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고 한다. 本來 空寂靈知의 자리가 수월도량이다. 水月은 ‘이 세상 모든 것은 固定된 實體가 없는 것이고  단지

因緣에 의해 化生된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이 비록 인연에 의해 환생(幻生)된 것인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일으켜야하고 닦고 장엄해야 하고 만들어야한다. 영겁의 눈으로 볼 때 절도 몇 천년 가면 티끌이 되는데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無常에만 젖어 있고 寂寂에만 젖어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부처님의 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적적함에도 불구하고 보살의 靈知가 있기에 水月인줄 알면서 보수해야 하고 장엄해야하는 것이다. 그게 因緣法을 바로 보는 눈으로서 報身이다.


불자나 스님들 중에서도 인연법을 잘못 보고 ‘세상이 다 무상한데 할 것이 뭐 있는가’, ‘뭘 중이 그런 것을 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뭘 그래 무상한데' 이렇게 반응하는 분들이 많다. 이렇게 잘못 공부하면 적적에 빠져 할 일 없는 사람이 된다. 머리로만 하는 불교가 돼서, 마른 자리만 피해 다니면서 보살행은 하지 않고 대접만 받으려는 얌체 없는 승가 생활을 하게된다. 법이 어떻다느니 아는 것은 있다 보니 대접은 받고 싶은데 남들도 보는 눈이 있어서 제대로 대접을 안해주니 자기 대접 안 해준다고 스스로 학대하고 항상 남에게 원망을 돌린다. 이런 사람은 법을 어설프게 알고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도정견을 제대로 알면 세상의 어떤 경계가 몰려와도 그 경계를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판단하에 결정한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 들어와서 상구보리가 되느냐 하화중생이 되느냐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느냐 학대하는 고통이 되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원만보신불이다.

[불교신문3008호/2014년5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