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분명해서 오히려 깨달음이 늦다
대혜 스님이 말했다. “나의 '이곳'에는 다른 사람에게 줄 法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法令에 의지하여
判決만 할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것보다 아끼는 소중한 유리병을 가지고 왔는데 내가 한 번 보고는
곧장 그대를 위해 깨버리는 것과 같다. 그대가 다시 마니주를 가지고 오면 나는 다시 그것을 빼앗는
다. 그대가 그냥 오는 것을 보면 나는 그대의 두 손을 잘라버린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은 ‘부처를 만
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인다’고 말한 것이다.
말해보라. 善知識이라 불리는 이가 어째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가? 그대가 살펴보라. 그것이 무슨
道理인지? 지금 공부하는 이들은 공부를 하면서도 '이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잘못을 밝혀 나가고자 한다면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이렇
게 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아도 모두 안 된다. 어떻게 해야 그대가 한 마디 말[一轉語]을 가지고 문득
밝힐 수 있겠는가? 영원히 그것을 밝히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은 매우 單刀直入的이었는데, 그대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인 그곳으로 가려하지 않는다. 그곳은 너무나 간단하고 當然하고 自然스럽고
分明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터득하는 것이 늦을 뿐이다.”
- 종문무고-
이 法, 이것, 이 일, 이 사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어째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의
法이라고 말을 할까요? 不可思議라는 말은 말 그대로 分別하는 生覺으로는 머리로 헤아려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不可思議라는 말을 보통 사람들은 다가갈 수조차 없는,
대단히 신비하고 어려운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曲解합니다. 사의(思議)가 불가(不可)하다 하였거늘,
사의(思議)를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그러한 誤解를 낳게 된 것입니다.
不可思議한 解脫의 法이란 오히려 단박에 말과 生覺을 쉬어버리면 담박에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곧바로 解脫한다는 말입니다. 해탈하는 것이 숨 한 번 쉬는 것보다, 세수하다가 손에 코가
만져지는 것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의(思議)하는 限, 是非 分別하는 生覺 망상 번뇌 잡념
의식 마음 卽, 알음알이(識), 지견, 견해, 이해, 분별심, 분별의식으로 더듬고 헤아리는 限, 이 단순한
당연한 너무나 쉬운 이 事實을 믿지 못합니다. 是非 分別하고 生覺하므로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끝없이 是非 分別 生覺만 하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해탈의 법, 이것,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존
을 모르는 것입니다.
위에 말한 대혜 스님의 조금도 숨김이 없는 진실한 가르침을 잘 살펴보십시오. 대혜 스님은 ‘이곳’에는
다른 사람에게 줄 法 즉,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즉, '이곳'은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다고
헀습니다. 대혜 스님의 ‘이곳’은 곧바로 여러분들의 ‘이곳’입니다. 우주만물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무엇
에게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존이 바로 이곳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곳 여
기엔 한 法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本來無一物입니다.
道, 禪, 法, 佛(부처), 心(마음), 眞理, 깨달음, 진짜 나, 본래의 나, 근원의 나, 本來面目, 주인공, 본마음
本性, 眞性, 佛性, 眞心은 배울 것이 없고 가르칠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만약 오랜 세월 닦아서 익혀
야 할 道, 禪, 法, 佛(부처), 心(마음), 眞理, 깨달음, 진짜 나, 本來面目, 본심, 본성, 진심이 別度로 있다
한다면 그 道, 禪, 法, 佛(부처), 心(마음), 진리, 깨달음, 진짜 나, 本來面目, 본마음, 본성, 불성, 진심이
어떻게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최상승(最上乘)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道, 禪을 공부함은 本來부터 이미 완전하게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일 뿐이고,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錯覺을 깨우쳐 주는 方便의 말들이 道, 禪, 法, 佛, 心, 진리, 깨달음, 진짜 나, 本來面目, 본마음일 뿐입
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分別하고 執着하고 있는 알음알이(識), 지견, 견해, 이해, 분별심,
분별의식을 깨부수고 빼앗고 제거해 주는 일이 善知識의 手段이고 方便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고, 아라한도 죽이고, 부모형제도 죽인다는 극악무도한 소리를 서슴없이 내뱉는 것입니다.
따라서 道를 닦는 길, 禪을 공부하는 길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되고,
저렇게 하지 않아도 안 되는 것일 뿐입니다. 道, 禪, 法, 佛(부처), 心(마음), 眞理, 깨달음, 진짜 나, 진심,
本來面目, 본마음, 진심, 본성, 불성 이것이 무언지를 시비 분별하는 생각 망상 번뇌 상념 마음 의식 즉,
알음알이(식), 지견, 견해, 분별심, 분별의식으로 알려고 하고, 이해하려 하고, 밝히려고 하는 그 마음이
病인 겁니다. 이 마음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알 것도 없고, 이해할 것도 없고, 밝힐 것도 없는 것이
마음공부 입니다. 道, 禪, 法, 佛(부처), 心(마음), 진짜 나, 本來面目, 진리, 깨달음, 진심, 본심은 영원히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밝힐 수도 없는 無始無終의 常住不滅, 不生不滅, 不去不來의 영원한
眞實生命인 끊임없이 波動하는 宇宙根源 에너지, 진리의 몸(法身)입니다.
이 道, 禪, 法, 佛, 心(마음)공부는 시비 분별하기를 좋아하는 생각 마음 의식 즉,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이 할 일이 없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 더듬고 헤아리는 限은 영원히 이 공부와는
因緣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너무나 간단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고 대혜는 말합니다.
이 일만큼 간단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저 시비 분별하기를 즐기는 생각 망상 번뇌
잡념 의식 마음 卽, 알음알이(識), 지견, 견해, 이해, 분별심, 분별의식을 푹~쉬어버리기만 하면 바로
그 자리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비 분별하는 생각을 쉬지 못하는 것이 病입니다.
이것, 이 사실, 이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존, 道, 禪, 法, 佛(부처), 心(마음), 眞理, 깨달음,
진짜 나, 참나, 본심, 진심, 불성, 본성은 너무나 分明하고, 너무나 當然하고, 너무나 自然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道, 부처, 마음, 진짜 나, 本來面目, 진리, 깨달음 이것을 깨닫는 것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 사실, 이일, 道, 禪, 法, 佛, 心, 진짜 나, 本來面目, 진리, 깨달음, 진심, 불성, 본성, 본래마음이
설마 이렇게 쉽고 분명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간단한 것인 줄은 想像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不可思
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쉬운 사실도 모르는 것 그것이 不可思議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이일, 이 사실, 도, 선, 법, 불, 심, 진짜 나, 본래면목, 본심, 본마음, 본성, 진리, 깨달음, 불성이라는
방편의 이름으로 부르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는 完全히 노출(露出)되어 있기에 도리어 잘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보기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아무 것도 알 것이 없는 것이다 보니 오히려 그것을 알기
가 더 어려운 법입니다. 어느 무엇과도 相對하지 않고 짝하지 않는 自己 自身, 진짜 나, 본래의 나, 참나,
本來面目, 본심, 진심, 道, 法, 禪, 佛(부처), 진리, 깨달음, 心(마음)이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도 찾지를 못
하는 것입니다.
아~아 !!!, 우리 인간이 이렇게도 어리석다는 말입니까!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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