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속지 말라
낭중(郎中) 전익(錢弋)이 진정(真淨) 스님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절에서는 화장실을 ‘동사(東司)’라고 불렀는데, 진정 스님은 행자에게 東司가 있는 西
쪽으로 案內하게 하였는데, 전익이 갑자기 진정 스님에게 물었다. “동사(東司)라고 해놓고 어째서
西쪽으로 갑니까?” 진정 스님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東쪽에서 찾지.”
대혜(大慧) 스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나서 말했다. “아! 조주(趙州) 스님이 투자(投子) 스님에게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났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투자 스님이 ‘밤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날이 밝거든 찾아오게.’라고 한 것도 이 말보다 훌륭하지는 못하다.”
- 종문무고-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 銘心할 점은 절대로 말에 속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쓰는 말
(言語)는 사람으로 태어난 以後에 배우고 익힌 意思疎通을 하기 위한 手段이나 道具로 말이 나타
내는 모양, 말 소리, 말 뜻은 無常하고 固定된 實體가 없습니다. 말은 흔히 달(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비유처럼 말이 아닌 眞實을 가리켜 보이기 위한 手段 方便에 불과하다는 事實을 항
상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드러내는 表象보다느 말 자체, 말이 일어나는 출처(出處)나
말이 사라지는 낙처(落處)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랑(淨廊), 동사(東司), 서각(西閣), 북수간(北水間), 칙간(厠間), 해우소(解憂所), 통숫간, 화장실,
변소…. 이 모든 말들이 가리키는 곳은 똥과 오줌을 누는 장소로 동일합니다. 말의 모양, 말 소리에
속지 않는다면 모두 동일한 의미,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란 것 역시 ‘볼 일을 보는
곳’, ‘대소변을 보는 장소’ 등등 또 다른 말의 形態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낱말마다 제각각의 고정
불변한 意味가 있다고 無心코 生覺하지만 實際로는 끝없이 계속되는 말 잔치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말의 모양, 말의 소리, 말의 뜻(의미)는 전혀 실다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말은 믿고 의지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어떤 모양의 말이든, 어떤 소리의 말이든, 어떤 뜻의 말이든, 그 表象에 속지
말고 오로지 그 말이 일어나는 원점(原點), 根源, 出處 또는 그 말이 사라지는 귀결점(歸結點), 落處
를 눈여겨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곳, 거기에는 말이 없지만 끝없는 말이 거기에서 나타났다 거기
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의 원점, 말의 귀결점, 거기, 그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말에도 속지 마시고 어떤 말에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위에 언급한 예화 속의 벼슬아치 전익은 진정 스님을 방문해서 對話를 나누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진정 스님은 행자를 시켜 절의 화장실인 동사(東司 ; 동쪽에 있는 건물이
란 의미)가 있는 西쪽으로 안내합니다. 무심코 행자를 따라갔던 전익은 볼 일을 보고난 후에 문득
호기심이 나서 진정 스님에게 묻습니다. ‘東쪽에 있는 건물이라면서 왜 西쪽으로 갑니까?’ 이것을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베 세 근이라고 합니까?’라는 의문으로
대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말에 길들여져서 말의 틀, 말의 논리, 문법, 활용론(話用論)에 拘束되어 있습
니다. 어떤 限界 內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側面에서 사람들은 言語의 감옥, 言語는 곧 生覺의 發露
이므로 生覺의 감옥 안에 갇혀있는 죄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벗어날 수 없는 言語의 重毒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말에 속아 넘어가고, 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생활은 물
론 禪을 공부하는 마당에서도 말에 속아 넘어가고 끌려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진정 스님 같은 이는 말을 가지고 말의 틀, 굴레, 말의 감옥을 깨부수어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만 따라가서 東쪽에서 화장실을 찾곤 한다!’ 이렇게 습관적 무의식적인 어리석음을 轉換
시켜 깨달음의 인연을 일으키는 말을 일전어(一轉語 ; 심기일전의 말), 또는 전신구(轉身句 ; 몸을 바
꾸는 말)라고 합니다. 짧고 간단한 말 한 마디로 자기도 모르게 말의 감옥에 갇혀있던 미망(迷妄)을
스스로 돌아보고 말의 미혹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게 하는 일이 善知識의 기봉(機鋒)입니다.
뒤에 부록처럼 대혜 스님이 진정 스님이 말한 그 한 마디에 대해 찬탄한 말은 話頭公案의 本質에 대한
일종의 힌트입니다. 말에 속아넘어가면 안 됩니다. ‘無’는 그냥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뜰 앞의 잣나
무’는 그냥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마른 똥 막대기’ 라는 말을 가지고 이런저런
지견 견해 이해 분별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밤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날이 밝거든 찾아오게’
란 말을 머리로 생각으로 분별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십시오. 또 속았습니다.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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