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말에 속지 말라

장백산-1 2016. 8. 7. 14:47

말에 속지 말라


낭중(郎中) 전익(錢弋)이 진정(真淨) 스님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절에서는 화장실을 ‘동사(東司)’라고 불렀는데, 진정 스님은 행자에게 東司가 있는 西

쪽으로 案內하게 하였는데, 전익이 갑자기 진정 스님에게 물었다. “동사(東司)라고 해놓고 어째서 

西쪽으로 갑니까?”  진정 스님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東쪽에서 찾지.”


대혜(大慧) 스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나서 말했다. “아! 조주(趙州) 스님이 투자(投子) 스님에게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났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투자 스님이 ‘밤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날이 밝거든 찾아오게.’라고 한 것도 이 말보다 훌륭하지는 못하다.”


- 종문무고-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 銘心할 점은 절대로 말에 속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쓰는 말

(言語)는 사람으로 태어난 以後에 배우고 익힌 意思疎通을 하기 위한 手段이나 道具로 말이 나타

내는 모양, 말 소리, 말 뜻은 無常하고 固定된 實體가 없습니다. 말은 흔히 달(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비유처럼 말이 아닌 眞實을 가리켜 보이기 위한 手段 方便에 불과하다는 事實을 항

상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드러내는 表象보다느 말 자체, 말이 일어나는 출처(出處)나 

말이 사라지는 낙처(落處)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랑(淨廊), 동사(東司), 서각(西閣), 북수간(北水間), 칙간(厠間), 해우소(解憂所), 통숫간, 화장실,

변소…. 이 모든 말들이 가리키는 곳은 똥과 오줌을 누는 장소로 동일합니다. 말의 모양, 말 소리에 

속지 않는다면 모두 동일한 의미,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란 것 역시 ‘볼 일을 보는 

곳’, ‘대소변을 보는 장소’ 등등 또 다른 말의 形態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낱말마다 제각각의 고정

불변한 意味가 있다고 無心코 生覺하지만 實際로는 끝없이 계속되는 말 잔치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말의 모양, 말의 소리, 말의 뜻(의미)는 전혀 실다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말은 믿고 의지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어떤 모양의 말이든, 어떤 소리의 말이든, 어떤 뜻의 말이든, 그 表象에 속지 

말고 오로지 그 말이 일어나는 원점(原點), 根源, 出處 또는 그 말이 사라지는 귀결점(歸結點), 落處

를 눈여겨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곳, 거기에는 말이 없지만 끝없는 말이 거기에서 나타났다 거기

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의 원점, 말의 귀결점, 거기, 그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말에도 속지 마시고 어떤 말에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위에 언급한 예화 속의 벼슬아치 전익은 진정 스님을 방문해서 對話를 나누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진정 스님은 행자를 시켜 절의 화장실인 동사(東司 ; 동쪽에 있는 건물이

란 의미)가 있는 西쪽으로 안내합니다. 무심코 행자를 따라갔던 전익은 볼 일을 보고난 후에 문득 

호기심이 나서 진정 스님에게 묻습니다. ‘東쪽에 있는 건물이라면서 왜 西쪽으로 갑니까?’ 이것을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 마른 똥 막대기, 베 세 근이라고 합니까?’라는 의문으로 

대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말에 길들여져서 말의 틀, 말의 논리, 문법, 활용론(話用論)에 拘束되어 있습

니다. 어떤 限界 內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側面에서 사람들은 言語의 감옥, 言語는 곧 生覺의 發露

이므로 生覺의 감옥 안에 갇혀있는 죄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벗어날 수 없는 言語의 重毒 

상태에 있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말에 속아 넘어가고, 말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생활은 물

론 禪을 공부하는 마당에서도 말에 속아 넘어가고 끌려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진정 스님 같은 이는 말을 가지고 말의 틀, 굴레, 말의 감옥을 깨부수어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만 따라가서 東쪽에서 화장실을 찾곤 한다!’ 이렇게 습관적 무의식적인 어리석음을 轉換

시켜 깨달음의 인연을 일으키는 말을 일전어(一轉語 ; 심기일전의 말), 또는 전신구(轉身句 ; 몸을 바

꾸는 말)라고 합니다. 짧고 간단한 말 한 마디로 자기도 모르게 말의 감옥에 갇혀있던 미망(迷妄)을 

스스로 돌아보고 말의 미혹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게 하는 일이 善知識의 기봉(機鋒)입니다.


뒤에 부록처럼 대혜 스님이 진정 스님이 말한 그 한 마디에 대해 찬탄한 말은 話頭公案의 本質에 대한 

일종의 힌트입니다. 말에 속아넘어가면 안 됩니다. ‘無’는 그냥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뜰 앞의 잣나

무’는 그냥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마른 똥 막대기’ 라는 말을 가지고 이런저런 

지견 견해 이해 분별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밤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날이 밝거든 찾아오게’

란 말을 머리로 생각으로 분별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십시오. 또 속았습니다.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