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봉사란?
차라투스트라 이후로 2천5백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제대로 이해되지도, 사랑을 받지도, 존경을
받지도 못한다. 차라투스트라처럼 人間을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理解할 수 있는 명석함, 지성, 고요함이 現世 인류에게는 전적으로 부재하다. 그것이 부재한 이유는
현세 인류 그들 스스로가 自身들의 無限한 可能性의 潛在力을 實現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
스로가 自身의 本性, 道를 추구하도록 스스로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 本性,
道의 물결과 함께 흐르도록 스스로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가르치고, 結局 그들 스스로를 당혹스러움과 실패로 이끈 그릇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비난하는 자’가 되었다.
현세 인류 모두가 삶과 즐거움과 本性에 逆行하는 목표를 세우도록 배웠기 때문에 失敗는 현세 인류
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이런 불행한 사람들은 지복至福을 경험한 사람들을 결코 이해하
지 못하며, 至高의 幸福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 즉 他人의 苦痛을 즐길 뿐이다. 그런 사람은
매일 아침 신문에서 지난 밤에 얼마나 많은 범죄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해를 당했고, 얼
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을 했는지 살핀다. 無消息은 喜消息이기 때문에 오직 나쁜 것, 역겨운 것이 뉴
스거리가 된다. 自然스러운 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하더라도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난 반대로 그대가 지극한 행복을 경험할 때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도
지복을 경험하기를 기원한다. 그대가 경험하는 지복은 다른 사람들이 지복을 경험할 때 더 배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他人을 해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가 어느 종교나 사원에서 배우는
규율이나 서약도 아니며, 그대의 지복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他人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삶이 지복 안에서 스스로 삶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어떻게 他人의 삶을 파괴할 수 있겠
는가? 그대가 삶을 향유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도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대 주변의 모든
것이 춤을 추고 황홀경에 빠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대의 황홀경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바로 그 보상이다.
他人을 해치는 것은 그대 자신의 기쁨을 해치는 일이다. 他人이 지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他人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에게 봉사하는 일이다. 他人의 기쁨이 그대의 기쁨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이 지복을 경험할수록 축제의 열기는 더 뜨거워
지고 커져만 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대는 他人과 더 便安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중에서 / 가져온 곳 : 카페 >옥련암
자라투스트라(아베스타어: Zaraϑuštra) 또는 영어식으로 조로아스터(Zoroaster), 독일어식으로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이란 북부지방에서 태어난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을 딴 조로아스터
敎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와 출생 연대 및 활동 지역에 관해서 매우 엇갈리는 기록
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더러는 박트리아 지역, 더러는 이란 남부 지역이 예전의 페르시아 지역
을 그의 출생지로 보기도 하며, 출생 연대에 관해서는 심지어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600년
까지 의견이 매우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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