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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환영하고, 주어지는 대로 받기

장백산-1 2016. 9. 26. 23:20

고통을 환영하고, 주어지는 대로 받기


업(業)이라는 개념은 行爲의 흔적이다. 유식(唯識)에 의하면 惡業이나 善業을 行하고 나면 그 行業에 따른 

흔적이 業藏(업장)이라는 業의 저장창고 卽, 아뢰야식(제8識)에 저장이 된다. 그렇게 저장되어 있는 業은 

당연히 매일 매일의 現實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業의 저장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業障이 하나의 色

眼鏡이 되어 現實을 색안경 색깔대로 되비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업이 많은 사람은 악업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현실을 바라본다. 그 사람은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비뚫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기 쉽다. 반대로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선업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

라보면서 무엇이든 긍정적고 밝으며 선한 쪽으로 세상을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業의 측면에서 본다면 악업은 빨리 받을수록 좋고, 선업은 늦게 받을수록 좋다. 業은 늦게 받을수

록 利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아직 果報로 받지 않은 선업의 씨앗들은 내면에서 공명(共鳴)

하면서 宇宙의 선한 에너지들을 끌어당긴다.


그러니 善業에 대한 果報는 천천히 받는 것이 좋다. 善業의 과보를 받기 前까지 善業은 계속해서 우리의 

을 선한 에너지로 물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惡業은 빨리 받는 것이 좋다. 아직 果報로 나타나지 

않은 惡業의 흔적이 내면을 물들여 악업과 共鳴하는 탁한 에너지들을 우주로부터 끌어당길 것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괴로운 과보일수록 빨리 받고 악업을 빨리 털고 가는 것이 좋은 이유다.


그러니 선업은 천천히 받고, 악업은 빨리 받으라. 좋은 일은 지금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사람들

은 자신의 人生에 계속 좋은 일만 일어나길 바라고, 요행이 일어나길 바라며, 운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業報의 法則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에서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괴롭고 힘든 일일수록 자신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며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괴로운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이야말로 환영할 일이다. 아주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재빨리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그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활짝 열린 마음으로 수용한다면, 그 고통은 생각했던 것 보다 빨리 

지나갈 것이다. 1달 동안 계속되어야 할 악업에 대한 과보일지라도 그 괴로움의 과보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는 1달도 넘게 지속될 수도 있지만, 그 괴로움의 과보를 활짝 열린 기쁜 마음으로 수용해서 주도적으로 감

당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1주일 만에 빨리 왔다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業障을 기꺼이 받아들

이는 자에게 주는 우주의 선물이다.


因果應報, 業因緣果報라는 宇宙의 운행법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생각은 곧 내가 이 우주, 법계, 진리

의 세계, 이 현실세계와 하나가 되어 흐른다는 마음 자세를 보여준다. 내가 利己心과 我相에 빠져 내가 원

하는 방식의 삶만을 고집할 때는 우주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사사로운 ‘나’, 아상를 내세우는 삶이지만, 이

처럼 내 生覺을 고집하지 않고 우주가 보내주는 業報의 法則 즉, 이 현실세계, 현실의 삶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는 我相과 我慢을 뜅어넘어 이 宇宙와 하나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우주 그 자신에게 고통을 오래도록 부여해 주고 싶은 의도가 전혀 없다. 지금 여기 이 현실세계, 이 

삶, 즉 내가 지은 業에 대한 果報를 온전하게 통째로 받아들인다는 生覺은 곧 내가 우주 전체임을 받아들이

는 마음 자세이다. 내가 곧 우주와 하나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것은 매순간 일어나는 일이야말로 

우주, 법계에서 가장 적절할 때에 적당한 장소로 보내주는 과보임을 알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 자체가 ‘나’의 의식의 활동인 하나의 분별 판단일 뿐 절대적으로 선과 악

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는 我相이 사라지고 우주와 하나가 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좋고 

나쁜 분별이나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해야 하는데 그 ‘나’라는 것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판단 분별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