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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의 종언

장백산-1 2016. 11. 25. 13:06

 [아침을 열며] 박정희 체제의 종언


고맙다는 인사라도 건네야 할까.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치적은 ‘박정희 체제’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弔鐘)을 울린 것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소망했던 아버지 박정희의 역사적 복원은 그 누구도 아닌 박근혜 대통령 자신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책 제목처럼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아버지의 꿈이라고 이야기했던 복지국가는 거짓이었고, 대통령 스스로 헌법 질서를 유린함으로써 민주주의는 퇴행했으며, 국격은 땅에 떨어졌고, 남북관계와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는 ‘박정희’라는 집단적 최면으로부터 깨어났다.

유신독재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였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와 누적된 외채로 인해 경제는 벼랑 끝에 매달려 있었고, 독재는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자멸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박정희 사후, 박정희가 신화가 되어 부활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신화로 부활했다. 역설적이게도 박정희를 역사의 전면으로 부활시킨 이는 다름 아닌 박정희 독재에 맞서 싸웠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실정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박정희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이다. 저마다 박정희를 칭송했고, 당시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는 자신을 리틀 박정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도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박정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절정은 20여 년 가까이 최씨 일가의 품 아래 은둔생활을 했던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헌법질서를 유린하고, 권력을 사유했으며, 권력의 이름으로 온갖 불의를 강요하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박근혜의 만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박정희 신화’를 폐기하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으로 치장된 이면에 감추어진 민주주의의 퇴행, 불평등, 경제적 파국, 불의, 인권유린 등 온갖 악행으로 가득 찼던 ‘박정희 신화’를 폐기하고 역사의 한 걸음을 내디디라는 것이다.

이제 시민사회와 민주적 정당들이 할 일은 명확해졌다. 패악 무도한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리고, 박근혜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박정희 신화를 대신해 민주주의, 인권, 평화, 복지, 성장이 함께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는 조작된 지역주의, 세대분열, 안보위기에 기대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패권을 도모하는 정치 대신 다양한 국민의 이해가 반영되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여야의 합의로 비례대표제와 결선투표제를 제도화하고, 제도정치의 진입장벽을 낮추며,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가 세력화될 수 있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수는 더는 성장과 안보 제일주의라는 ‘박정희 신화’에 매달려 집권하려는 어리석은 아집을 버리고 합리적 보수의 비전을 내와야 한다. 경쟁적 시장을 중심에 놓고,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내와야 한다. 진보는 성장과 안보라는 박정희 시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시민사회와 정당들이여, 잊지 마라. 패악 무도한 박근혜 정권은 한국 사회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인 안보와 성장 제일주의를 대신할 민주적 대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탄생했다는 것을. 기억해라. 민주적 대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박정희의 유령에 기댄 제2, 제3의 박근혜를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해라. 광장에 울려 퍼진 수백만 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위대한 함성을.

윤홍식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

저작권자 © 한국일보  2016.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