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자기로 인해서 이 세상과 모든 일이 벌어지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장백산-1 2016. 12. 7. 20:15

자기로 인해서 이 세상과 모든 일이 벌어지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 / 대행스님  


'관(觀)'한다 함은  쉴 사이 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그대로 觀하는 거지, 

'觀'하는 장소 觀하는 때가 따로 있고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 질문 

큰스님께서는 많은 세월 동안 불자들을 이끌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 안에서도 

많은 의식차원의 신도들이 있기에 그들의 근기(根機)에 맞는 수행 방법도 또한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스님께서는 '觀法'으로 불자들을 제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觀法이 어떤 건지 구체적 

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답변 

예, 행주좌와 관법(行住坐臥 觀法)입니다.  우리가 전부 부처님 법(佛法)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행주좌와(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고)하는 觀法이냐 하면 행주좌와 관법은 자기(自己)의 觀法이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태어났기 대문에 相對가 있는 거고 이 세상이 펼쳐진 거지, 자기가 없다면 상대나

이 세상이 드러나 있겠습니까? 무효지. 안 그래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기로 因해서 상대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이니까 우선 자기가 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자기의 이 생산된 肉體가 바로 話頭인 겁니다. 지난 먼 시대에는 話頭를 잡아서 해도 

자기에게 돌아갈 수가 있었지만, 그 때는 화두가 먹혀들어 갔지만, 지금은 화두가 안먹혀들어갑니다. 

왜냐? 겉돌기 때문에 그래요. 왜 겉도느냐? 세계를 안방에서 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움직

이고 활동하는 모든 걸 안방에서 볼 수 있는 데다가 핑핑핑핑 돌아가는 그 머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겨나온 肉體도 話頭이고,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탐구하는 것도 화두인데, 그 화두에

다가 덧붙여 觀法을 또 받아 가지고 수행을 하니까 서로 겉돌 수밖에요. 


행주좌와(行住坐臥) 觀法은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수행법입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하고 

그럴 때는 반드시 시대에 순응해서 시대에 맞게 함께 흘러가야 합니다. 시대의 뒤를 쫓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앞장서 가라는 거지. 빛을 밝혀서 앞장서 가라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행주좌와 관법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쉬지 않고 지구가 자전하면서 동시에 공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도는

가 하면 우주도 쉬지 않고 돌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멈춰있는 게 없어요. 


그런 데다가 이 육체를 구성하는 100조개의 세포들도 쉬지 않고 변화하면서 순환, 즉 돌고 있어요. 

지금 여러분 육체가 쉬고 있으면서 돌고 있습니까?  자 이거 보세요. 자는 것도 자는 게 아니고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니에요. 보는 거, 듣는 거, 먹는 거, 하는 거, 만나는 거, 가는 거, 오는 

것, 어느 하나도 고정된 실체가 없어요.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이 共(공)했지. 내가 한 게 따로 없으니 

물 한 컵을 마시더라도 더불어 함께 동시에 마신 것이기 때문에 공식(共食)이에요. 


보세요. 공생(共生), 공심(共心),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共食) 하면서 더불어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거 먹을 때, 어떤 거 할 때, 어떤 거 봤을 때, 어떤 거 움직였을 때 내가 혼자 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이 共(공), 즉 함께 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함께 돌고 있는 그것에 부처(佛)이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하나인 全切로서 한마음으

로 하나로서 운행되는 것을 두고  如來, 佛이라는 이름을 붙인거지 개별적인 하나가 깨달았다고 해서 

여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에요. 개별적인 하나가 깨달으면 이 세상 전체가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

야지만 그것이 깨달은 사람이 수만 명이다 할지라도 깨달은 그 한마음 자리에 함께하기 때문에 如來라는 

부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배울 때 잘 배워야지, 예를 들어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처음 배우는 거라고 아무렇

게나 생각해서, '삐딱하게 앉아서 배워도 괜찮을꺼야, 요 다음에 배워서 잘하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배우면 앉음 앉음이 습관이 되어 굳어져서 피아노를 제대로 배울 수가 없죠. 그와 같이 인간도 

마음의 오계(五戒) 오계향(五戒香)에 첫째, 내 마음으로부터 다져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첫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나로 인해 생긴 거니까.  

소도 언덕이 있어서 비빌 수 있는 거지 언덕이 없다면 소도 비빌 데가 없고 소가 없다면 언덕이 비벼

지지도 않겠죠. 이와 같이 인간도 내가 있어서 상대와 이 세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했든 못했든 

이 세상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남이 잘했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못했으면 '못한 

것도 내게서 나오는 거니까 잘하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 하고 거기 놔라. 이러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생활 속에서 觀한다 하는 것은 쉴 사이 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그대로 觀하는 것이지 觀

하는 장소와 때가 따로 있고 기도하는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라는 말을 안 합니다. '관'이라 그러죠. 기도는 상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라는 

말을 안 씁니다. 그래서 이 법당에 와서도 불상 앞에 삼배를 올리든 일배를 올리든, 부처님 앞에서 한

마음으로 넣고 일배를 올려도 올리고, 일어날 때는 한마음으로 자기와 같이 하고서 일어나라 이겁니다. 


그러면 이리로 가도 하나요 저리로 가도 하나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깨달을 수도 없거니와 眞理를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 우리가 무한하게 큰 차 하나에 

몽땅 타고 앉아서 이 차 하나가 어떻게 어디를 돌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