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하며 산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그런데 이 질문은 ‘사는 내가 있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잘 살아야 하는 ‘나’가 있을 때에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사는 ‘나’라는 것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무아(無我)다. 삶을 살아가는 실체적인 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나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살아왔다고 여기지만 '나'는 사실은 ‘나’라는 환상일 뿐 ‘나’는 실체가 없는 환상이기에 지금 이대로 맡기고 살면돼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를 고민할 내가 없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 그렇게 고민할 내가 없다. 삶을 어떻게 살지 고민할 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저절로 잘 살아지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 ‘나’가 없지만 삶은 지금껏 이렇게 물 흐르듯 유연하게 잘 살아지지 않았는가!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저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배가 고프면 밥을 찾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는다. 졸리면 자고, 푹 자고 나면 저절로 깬다. 들숨은 저절로 들어오고 날숨도 제 스스로 알아서 잘 나간다.
물론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이렇게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 진실은 그저 삶이 이렇게 이 한 존재를 저절로 자연스럽게 잘 이끌고 와 주었다. 다만 그 지금 여기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 어떤 존재 같은 것에 내 스스로 ‘나’라고 이름을 붙이고,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름과 몸을 나와 동일시하면서, 여기에 있는 이 들숨과 날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것을 보고 ‘내가 산다’ ‘살아있다’고 여겨왔던 것일 뿐이다.
내 인생은 내가 노력한 대로 이루어졌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정말 그런 것일까? 내가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하루에 벌어질 온갖 정교한 일들을 일일이 구상하고 생각해 온 것일까? 내가 그 대학을 가고 싶어서 내 생각으로 인해 그 대학에 가게 되었고, 그 여인을 만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때 그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일까? 이 세계의 많은 인구 가운데 하필 그 여인이 어디에 사는 누군 줄 알고 미리 생각으로 그 여인을 내 인생 위로 끌어왔는가 말이다. 그저 그런 삶이 저절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녀가 저절로 내 삶 위로 들어 온 것일 뿐이고, 돈이, 명예가, 직업이, 부모가 이 삶 위에 등장한 것일 뿐이다.
마치 꿈처럼, 인생 전체가 그저 인연 따라 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어떤 삶이 오고 갈 뿐. 그 어떤 삶이 진짜로 있다고 여기고, ‘나’라고 여길 때 그것을 생멸법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법이라고 한다.
생각도 내가 아니다. 다만 일어난 어떤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생각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내가 생각한대로 이루어졌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던 것일 뿐이다. 실제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베른슈타인 신경센터 등이 공동 실시한 연구에서 자기공명영상으로 뇌신경의 움직임을 관찰했더니 사람들은 의사를 결정하기 최대 10초 전에 이미 의사결정을 관장하는 뇌부위에 신호가 이미 들어와 있었음을 발견했다. 심리학자 아이첼레는 사람들이 실수하기 최대 30초 전에 뇌신경세포에 이미 실수를 감지하는 신호가 간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캘리포니아대학의 프리드 교수는 두뇌 전극 이식 실험 결과 결정을 내리기 1.5초 전에 누군가가 먼저 두뇌에 신호를 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 | |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 내가 생각한다고 여겨왔던 것이 결국 내가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삶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살아진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사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고민에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 내 삶을 이끌어 가는 나는 없다. 다만 살아지는 삶이라는 지금 이대로의 진실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만 있다면, 삶이 알아서 온전한 진리의 흐름대로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거기에 내가 할 고민은 없다. 그저 이대로 완전하게 주어진 법신 부처님으로서 자연스럽게 평화롭게 한 생을 유유자적 살아가면 될 뿐이다.
[1370호 / 2016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