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 곧장 부처라니까
불교는 그 말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一切, 즉 모든 중생, 우주삼라만상이 그대로 부처(佛)라는 가르침
입니다. 너와 내가 분리된 둘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통째로 전부 다 하나의 부처일 뿐이라는 가
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천수경에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이 나오는데요, 그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이 바로 나의 눈
이고, 관세음보살이 바로 나 자신인 겁니다. 나와 나뉘어져서 따로 존재하는 부처, 보살, 신중은 없습니다.
서방 정토 극락세계에 아미타불이 있다는 말은 진실, 실상을 가리키는 方便(방편)입니다. 서방이 바로
지금 이곳이고, 정토세계 극락세계도 바로 지금 여기이며, 아미타불이 바로 지금 여기 나 자신인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둘이 아닌 이러한 不二法, 不二中道, 一心, 一乘의 가르침에서 보면 그 어떤 分別이나
差別의 見解, 知見도 本質인 불이법, 불이중도, 일심, 일승에서는 이미 어긋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佛法에서는 다만 우주만물, 이 세상 모든 것의 진실, 실상, 진정한 참 모습,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가리키는 수단 방편으로서의 이름인 수많은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을 등장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불이법에서는 온 우주 전부가 나이고, 온 우주 전부가 부처이고, 온 세상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게 깨달은
존재이기에, 온 세상 모든 것의 일부인 우리 인간들도 더 이상 갈고 닦을 진리, 법, 깨달음도 없고, 우리는
모두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부처(本來佛)인 겁니다.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모든 부처님들처럼, 모든 보살님들처럼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내 마음 바깥에 이상적(理想的)인 많은 부처님들이나 보살님들 같은 어떤 거룩하고 근사한 인물이나 상황
을 幻想으로 만들어 놓고, 그 환상을 향해 쫒아가는 것은 이 세상을 둘로 나누는 二法, 즉 分別法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필요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애쓰고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佛法을 無爲法이라고 합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의 분별심으로 부처라는 이름 중생이라는 이름 둘로 나눠 놓고 그 두 이름 중에서 나는
중생이며 부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분별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과 불행아라는 이름 둘로 나눠놓고 나는 지금 괴로우니까 행복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라는 이름 둘로 나눠놓고 가난한 사람을 버리고 부자를 향해 나아가고, 어리석음 지혜
라는 이름 둘로 나눠놓고 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어리석은 인간 우리의 分別心이고, 이 분별망상심 때문에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있는 부처가 가려
져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분별망상심을 법화경에서는 거지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를 들어 설합니다. 수 십 년만에 집을
나갔던 부호의 아들이 거지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고 말하면 놀라
도망칠 것이라고 여겨 자기 집에 하인으로 받아들여 똥 치우는 일 등 허드렛일 하는 것부터 맡기다가 그
생활이 충분히 익숙해졌을 때 비로소 자신이 거지 아들의 아버지임을 밝히고, 이 집이 바로 네 집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부자 아버지가 거지가 된 자기 아들에게 곧바로 ‘니가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중생들에게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말하면 중생들은 놀라서 도망칩니다. 이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실제, 사람들은 분별심으로 부처와 중생이라는 이름 둘로 나눠놓고 나는 아직 중생이니까 부처가 되려면
열심히 수행도 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면서 본인이 부처라는 사실을 멀리하고 기도방법, 수행방법을 열심히
갈고 닦도록 이끌어 주는 수단 방편에 불과한 모든 부처님들과 보살님들을 좋아합니다.
법화경에 나오는 거지 아들처럼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네가 곧장 부처라고 하면서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부처이기에 수행이나 노력할 필요 없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부처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깨달음, 진리, 진실, 실상, 본래의 참 모습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방편인 온갖 기도법, 수행법, 노력
하는 유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들이 전부, 아버지 집에서 하인으로 똥 치우는 허드렛일을 하는 기간인 것
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라면 그런 기간이 필요 없이, 그 분이 아버지임을 알면 곧장 똥 치는 일을 하는 거지
아들도 곧장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에 방편이 필요한 것일
뿐이지요. 유위법의 노력, 열심히 갈고 닦는 수행은 하인에게나 필요하지, 주인에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직도 똥 치고 허드렛일만 하는 거지 아들, 하인의 세월, 중생의 세월이 필요합
니까? 아니면 곧장 부자의 아들, 곧 부처가 되시겠습니까? 곧장 지금 당장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부처임을 확인 하시고, 무한한 권능의 주인이 되십시오. 지금 여기 이대로, 지금 이 자리, 바로 이것,
바로 당신이 부처이십니다.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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