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것(존재, 현상)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허망한 我相(아상)이다
[문]그렇게 법문을 많이 들었는데도 여전히 아상(我相)의 뿌리가 안 빠지고 고개를 치켜듭니다.
[답]우선 그렇게나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오. 주변을 둘러보면 알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나’와 ‘내 것’을 지키고 또 ‘나’를 보다 근사하게 세상에 드러내고, ‘나’를 잘 먹여 살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혈안이 되어 서로간에 경쟁을 벌이고 있소...사람들의 그러한 그 모습을
어떤 식으로 포장을 했느냐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다 마찬가지요. 그런 와중에 그래도 이 마음공부를
했다는 공덕으로 자신이 그런 진흙탕속에서 싸우고 있는 싸움에서 한 발 물러나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본
다는 생각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하지만 그와 같은 아귀다툼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이 혼탁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경책하고 한다면 그런 행위는 진정한 수행자의 행위라고 할 수 없소. 我相
이니 자존(自尊)이라는 말을 하지만 그러한 아상 자존이라는 이름이 헛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허망한 그런
이름인 아상이나 자존을 떨쳐버리려고 하는 놈이 무엇이지를 분병하게 알아야 하오. 그놈은 어떻게 보면
아상이나 자존 보다 더 교활한 거짓 ‘나’, 즉 자아의식일 수 있소.
‘나 없는 이치’, 즉 無我의 이치, 眞我(참나)의 이치를 말하는 이유는 아상, 자존, 자아의식으로부터 벗어
나기 위한, 그래서 ‘나’가 편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설해지는 것이 아니오. 어리석은 중생들이 겪는 모든
갈등과 번뇌 망상 분별의 단초가 바로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허망한 생각, 환상, 망령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직시하고, 그렇다면 그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허망한 생각, 환상, 망령이라는 놈의
실상을 밝히고 밝혀서 그 실체를 바닥까지 드러내 봤더니, 도무지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만한 존재가
있다고 할만한 ‘나’가 없기 때문에 ‘나 없는 도리’를 말하는 거요. 실상이 그렇소.
그렇다면 나 없는 이치의 실상이 드러난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언설(言說)과 ‘나’를 높이고 섬기기 위한
모든 생각이나 마음, 행동들은 전부 그렇 필요가 없는 허망한 헛질들인거요. 자 그렇다면 아상의 뿌리가
안 빠진다고 걱정을 하는 생각 분별 마음 자체가 바로 아상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분명
하게 알아차려야 하오.
모든 정신적 물리적인 우주만법,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현상, 존재)의 실상이 모두 텅~비었
다는 사실을 참으로 투철하게 밝힌 수행자는 이제 더 이상 바로 눈앞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일어나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하는 대상 이 모든 일이 몽땅 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허망
한 꿈, 신기루, 헛깨비, 幻想, 물거품, 그림자(幻影), 이슬, 번개와 같은 같은 것임을 사무쳐서 그저 이 세상
모든 것을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있는 그대로 夢幻泡影露電임을 비추어볼 수 있어야 하오. 그것이
아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오.
- 현정선원 법정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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